[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맨부커상 수상 이유 3가지
…"한국문학의 세계적 위상 올라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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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이 1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맨부커 인터내셔널'부문 시상식에 앞서 자신의 책 '채식주의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AFP=뉴스1 |
16일(현지시각) 영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46)은 ‘양극의 대가’다. 서정적 시로 꾸린 문장 안에 깊은 공포가 자리하고, 일상의 가벼운 테마에서도 묵직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
‘맨부커 인터내셔널’부문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그간 ‘폭력’을 화두로 내세운 작가의 농밀한 묘사가 소설 전반에 걸쳐 어둡게 드리운다. 어린 시절 육식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겪은 여자 주인공이 극단적 채식을 통해 폭력을 거부하며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날 시상식에서 보이드 턴킨 심사위원장은 수상작에 대해 “잊을 수 없을 만큼 파워풀하고 독창적”이라고 극찬했다. 심사위원 대부분도 양극의 키워드로 이 작품의 의의를 설명했다.
“3개의 목소리로, 3개의 다른 관점에서 풀어낸 간결하지만 불안한 작품.”, “기존의 모든 규범과 생각을 거부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풀어냈다.”, “서정적이면서 날카롭다.” “짧고 격렬하고 오묘한 이 작품은 어쩌면 꿈에까지 따라올지 모르겠다.”
한강 작가가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건 ‘기적’에 가깝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다…“인간은 폭력과 규범에 맞설 수 있는가”
주인공 영혜는 육식이라는 폭력에 맞서 햇빛과 물을 객체로, 나무를 주체로 대상화한다. 욕망이나 폭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증명한다. 욕심과 욕망에 길들여진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자를 방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생의 물체를 통해 밝혀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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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다. /사진제공=창비 |
한 작가는 책을 쓰는 이유를 “내게는 질문하는 방법이고,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육식을 먹어야만 생존한다고 느끼는 인간의 보편적 규범에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는 채식이라는 가장 약한 저항을 내놓았다. 무너질 걸 알면서 그것밖에 할 수 없는 대항은 ‘존재란 무엇인가’란 근원적 물음을 던져준다.
한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내가 써온 소설들은 상업성이나 대중성과 거리가 멀다”며 “인간에 대한 질문을 나눠 갖고 각자의 답을 찾는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세계 평단들도 ‘욕망’ ‘존재’ ‘죽음’ 같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깊고 예리하게 추적했다고 호평했다.
숨은 조력자…‘7년 한국어’ 배운 원어민 번역가 “작가 생각 읽어야”
‘맨부커 인터내셔널’은 작가와 번역가에게 공동으로 주는 상이다. 그만큼 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채식주의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대 SOAS 한국문학 박사과정을 졸업한 데보라 스미스(28)가 맡았다. 한국어를 배운지 7년 밖에 안 되는 젊은 신예는 그러나 작가 못지 않은 집념으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단어를 쓰는 작가처럼, 스미스도 “번역은 시를 쓰는 일과 같다”며 두 음절 형용사를 찾기 위해 며칠간 머리를 쥐어짜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번역에 매달린 스미스가 번역본의 일부를 영국 출판사 포르토벨로에 보내면서 한강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됐다.
스미스를 간접 지원한 한국문학번역원과 한 작가의 저작권을 보유한 에이전시 KL매니지먼트의 노력도 한몫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에이전시에 소속된 작가 23명의 267건의 번역을 지원하며 세계에 한국문학을 알리고 있다.
번역원 관계자는 “한 작가의 수상을 계기로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원어민 전담 번역가들의 양성은 작품성 획득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타고난 소설가 집안…아버지와 나란히 ‘이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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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각 서점에서 이 책 판매량이 급증했다. 특히 수상소식이 집중 보도됐던 오전 9시~11시 사이에는 1분에 7권씩 판매됐다. /사진=뉴스1 |
타고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일까. 한 작가는 문인 가족의 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을 쓴 한국 문단의 거장인 한승원이 아버지이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한동림은 오빠다. 부녀는 국내 최고 소설문학상으로 꼽히는 이상문학상을 2대가 받은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한 작가는 소설가 데뷔 전, 시로 먼저 등단했다. 그의 소설에 시적 향기가 배어있는 건 당시의 이력 때문이다. 99년엔 중편소설 ‘아기 부처’로 제25회 한국소설가문학상을 받았고, 2000년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한 작가가 ‘채식주의자’ 이후 발표한 ‘소년이 온다’는 이미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판권 계약을 마쳤다. 오는 25일엔 한 작가의 신작 ‘흰’이 출간된다. 시 65편으로 엮은 작품은 시와 소설의 경계를 오간다.
한 작가는 “이제는 아름다움이나 빛같이 어떻게 해도 파괴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