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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7) - 마태 / 마 9:9-13
2023년 묵은해가 지나고, 2024년 새해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새해 첫 주일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의 영혼이 더 풍성해지고, 육신도 더 윤택해져서, 평온하고 건강하고 영과 혼과 마음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해변에 사는 사람에겐 바다가 잘 안 보입니다. 바다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면이 바다이고, 어딜 가나 바다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바다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문득 바라다본 수평선에 초저녁달이 뜨는 순간 “아!” 하는 감탄의 소리와 함께, 멀리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발견하고, 그 바다의 아름다움에 놀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기 가운데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공기가 내 코로, 내 입으로, 살갗으로 스며들어와, 내가 숨을 쉬며 살게 합니다. 공기가 이렇게 고마운데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멍청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한 병에 걸려 산소호흡기를 코에 달고 간신히 숨을 쉴 때, 비로소 공기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온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쉬는 시간,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순간까지, 하루 24시간 동안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하시며, 성도를 지키시고 돌봐주시고 사랑하시고, 필요한 모든 은혜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에게 지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위기에 빠지고 심각한 순간이 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합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에 합당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 받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난 사람은, 도움과 해결을 받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무사에서 복음사역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라 D. 생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184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에든버러에서 출생했습니다. 생키는 에든버러에서 뉴캐슬로 이사하여 고등학교를 마친 후, 그곳 감리교회에서 독창자로 활동하면서, 복음성가 가수로 작곡자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시절에 생키는 군복무를 하였는데, 군목과 함께 찬송을 인도하였습니다. 전쟁이 종식되고,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YMCA 사업을 도왔습니다. 생키가 무디의 권유로 시카고의 무디 전도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31세 때였습니다. 그는 지방행정 관리직인 국세청 일을 접고, 무디의 전도집회에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애창하는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353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등, 많은 곡들이 생키의 주옥같은 작품들입니다. 1874년 무디와 찬양 사역자 생키가 영국에 가서 집회를 하다가, 당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따돌림을 받고 있는 집시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그들이 마차를 몰고 집시촌에 들어가자, 집시촌의 소년들이 무디와 생키가 있는 마차 주변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때 생키는 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유명한 설교자로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실현될 확률은 1%도 없었습니다. 그 소년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천연두로 죽었으며, 소년은 글도 읽지 못하였고, 예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그 소년은 생키가 말한 대로, 젊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젊은 전도자는 미국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생키가 살고 있는 뉴욕에 도착하여 생키를 찾았습니다. 그는 생키를 만나 물었습니다. “과거에 무디와 함께 영국 집시촌에 온 일을 기억하세요?” 생키는 “아 기억하고 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젊은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마차 옆에 서 있던, 어린 집시 소년들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죠.” “그럼 당신이 한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너를 설교자로 만드실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럼요. 그것도 기억합니다.” 그때 그 젊은이는 안도하며, “제가 바로 그 소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키의 얼굴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젊은 전도자는, 집시 스미스로 널리 알려진 로드니 스미스 목사입니다.
그 외에도 무디와 생키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은, 복음에 불타 5대양 6대주로 달려갔습니다. 특히 아시아와 한국 선교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인 마포삼열, 윌리엄 블레어, 그레이엄 리, 스왈른, 찰스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역시, 무디 부흥을 경험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 조선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중 마포삼열(새뮤얼 오스틴 모펫) 박사는 평양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24년간 헌신했고, 8대 총회장을 지냈습니다. 마포삼열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 일본의 암살 타겟이 되기도 했는데, 1939년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의 몬로비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마포삼열목사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생키는 세무공무원이었지만 주님의 부름을 받고 복음을 전하며 많은 복음이 씨앗들을 남겼습니다.
오늘 살펴볼 제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직업이 알려진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네 명의 직업은 확실합니다. 그들의 직업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어부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태의 직업입니다. 마 9:9-13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는 자신의 직업이 세리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리가 아닌데, 세관에 앉아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음식 접대를 하면서, 많은 세리를 초대했을 리가 없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당시 어부가 천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귀한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밥 먹고 살기 위한 생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다릅니다. 결코 평범한 직업이 아닙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직업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한 세트로 묶어서 불렀습니다. 세리는 누구도 존경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직업입니다. 자녀가 장차 세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 로마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정부의 녹을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편에서 보면, 그들은 매국노였습니다. 로마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면 세리는 로마에 바칠 세금만큼만,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리는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책정하기도 했지만, 개인 치부를 위해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다보니 동족들의 피를 짜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세리는 경계의 대상이자 회피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고, 세리를 만나면 그날 재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세리는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법정 증인으로 채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봤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하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마태는 세리를 창녀와 묶어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마 21:31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당시 세리는 사회의 혐오대상이었습니다. 누구도 상대하기 싫은 말 섞기도 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사정이 있어 세리가 된 사람은 있어도, 세리를 평생직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태가 어떤 계기로 세리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말 못할 가슴 아픈 사연이 있을 거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마태 대신 레위로 나옵니다. 막 2: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학자들은 레위가 마태의 본명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또한 마태가 레위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레위의 후손은 다른 지파와는 달리 특별합니다. 제사와 성전을 위해, 영적인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받은 지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레위의 후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자기 아들이 레위 지파로 살아가기를 바라서, 이름을 레위로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세리를 선택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세리로 살아가는 것에, 심적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나 친족들까지도 말입니다. 마태의 근무지는 가버나움 세관입니다. 마태는 그날도 세관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마태가 부름 받을 때의 장면을 세복음서가 기록했습니다. 마태 9장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마가 2장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누가 5장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어쩌면 세 복음서가, 마태가 부름 받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도 일치하게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생업에 충실한 마태를 부르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의 마음에 세리직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세리로 살아야 할지에 대해 갈등하고 번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리로 있는 동안은, 세리직에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불성실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은 예를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 생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업보다 본업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불성실한 사람으로 찍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리고, 교회 밖에서는 직업을 통해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마태의 고향은 가버나움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이 갈릴리의 중심도시였고, 갈릴리로 드나드는 나들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갈릴리를 지나 다메섹으로 갈 때도, 가버나움을 통과해야 했고,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가 가버나움 세관에서 근무했기에, 갈릴리의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세관에 매여 있습니다. 세관을 비우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예수님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의 안에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즈음에 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 세관을 지나가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우연히 봤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한두 번 보신 것이 아니라 쭉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 형제를 지켜보셨던 것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지켜보셨던 것처럼,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지켜보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타는 목마름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탈렌트 이상윤이라는 인기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가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퇴근하다가 길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약 스타로 발돋음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연예계에는 탁월한 외모로 인해, 종종 길가다가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길거리 캐스팅’이라고 합니다. BTS 멤버 중에도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 멤버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마태’입니다. 그럼 누가 마태를 캐스팅했나요? 예수님께서 마태를 캐스팅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초청에, 그는 바로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 장면이, 언제 어디 가기로 선약한 후, 기다리고 있다가, 약속 시간이 되어 “가자” 할 때, 바로 일어나 간 거 같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며, 바로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태의 영접을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세리인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난 후 보인 반응이 비슷했습니다. 눅 19:5-7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의 집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에, 삭개오나 마태는 별 부담이 없습니다. 자신들은 타인들에게 한두 번 손가락질 받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질도 처음 몇 번이 아프지, 반복되면 익숙해집니다. 부담은 오롯이 예수님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마 9:10-11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올 줄 모르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신다는 표징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이 비난받는 것은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태는 열두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리가 사도가 된다는 것인데, 어디 이게 보통 일입니까? 세리 출신이 열두 제자 조직에 들어올 때, 전에 부름을 받았던 자들의 반발까지는 아니라도, 긴장감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팀워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런 부담 없이,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얘는 인품이 좋으니까 괜찮을 거야.’ ‘얘는 성품이 좋으니까 잘 믿을 거야.’ ‘얘는 평판이 좋으니까 사고 안 칠 거야.’ 아니,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대망상증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해도, 심지어 죽임을 당해도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마 9: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병든 자였기 때문입니다. 몸과 영혼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하고, 우리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교회로부터 맡겨진 직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늘 우리가 불러야 찬송이 있습니다.
257장 3절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310장 1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맘 가지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 맘 변하지 않고, 교회 다녀야 합니다. 이 맘 흔들리지 않고, 직분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시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태가 잔치를 열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잔치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축제의 영성이 회복돼야 합니다. 마태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새 출발을 알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친구들 앞에서 공개 선언했습니다. 마태는 잔치를 통해, 자기가 살아온 과거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의 어두웠던 과거, 그의 불행했던 과거와 뜨거운 안녕을 했습니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와 잘 작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태는 잔치를 통해,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열어 동료 세리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마태의 사역 중 가장 큰 것은, 그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록되지 않은 사역들도 많았겠지만, 복음서를 기록한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성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강해된 복음서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사실 한 권이 아닙니다. 66권을 한 데 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39권은, AD 90년경 얌니아 랍비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AD 90년경이면, 신약의 서신서들이 거의 다 써졌고, 복음서가 완성 돼 가는 시기입니다. 신약 27권은, AD 397년 카르타고 공회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이때 신약성경 목록도 배열 됐을 것입니다. 연대순으로 배열하지 않고, 특성에 따라 배열한 것은, 구약성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더라도 4복음서를 배열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순서대로 할지를 두고, 어떻게 의견이 일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기록했느냐 보다,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했느냐에, 방점이 찍힌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세리 출신으로 친로마적이어서 매국노란 손락질을 받던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고, 그걸 공회에서 공인한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세리는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책을 복음서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데, 그러려면 기억력에만 의존해서 되겠습니까?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리에게 메모는 필수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세리만큼 문서 정리를 잘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하나님이 세리 출신 마태를, 복음서 기자로 쓰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십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쓰십니다. 아무리 쓰고 싶어도, 능력이 없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마태는 능력이 있었고, 거기다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걸작인 마태복음을 쓸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은, 마태가 이 세상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그 업적 하나만으로도, 마태는 할 일 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세상에, 교회에 확실한 것을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뭘 남길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준비된 만큼, 가진 능력 만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닌 예수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근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이런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윌리엄 캐리의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태는 주로 이스라엘 내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자기를 향해 누구보다 험한 욕을 했던 동족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애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생 말년에는, 에디오피아, 페르시아, 시리아에 가서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돌아오던 길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돈을 추구했다면 세리직이 나았습니다. 세리는 욕은 먹지만, 확실하게 돈은 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돈과 예수를 놓고 예수를 선택했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살다가, 끝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 6: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는 이 말씀대로 살아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데서 머물지 말고, 한 말씀이라도 그 말씀대로 살아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첫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 365일,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에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날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두 가지 획기적인 전환을 했습니다. 첫째는 직업적인 전환입니다. 세관원의 자리를 떠나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맡기시는 일을 하십시오. 보다 만족할 수 있는 일, 보다 더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신앙적 전환입니다. 수 천 년 믿어오던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주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주님은 마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영원토록 주님은 마태와 온 가족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목자로서, 구주로서 함께 계셨습니다. 올해는 전능하신 사랑의 주님만 의지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 영육간에 축복이 풍성한 2024년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2024년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갈보리교회 성도에게 넘치게 하옵소서. 땅에서 싹이 나오고, 뿌린 씨가 움이 돋아 자라나 열매를 풍성히 맺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 은혜와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며 노력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심령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한해를 살게 하옵소서. 2024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받아누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