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민학교 10주년 기념으로 무슨 문집 같은 걸 낸다고, 다들 한 편씩 글을 쓰란다.
본래 시키는 일은 잘 하지 않는 편이라 미루고 미루다 겨우 완성했다.
다 쓰고 읽어보니 감정소모가 심하다.
이상한 선생님
2009년도 여름방학이었다. 당시에 기간제교사 6년 차였던 나는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5년간은 방학 때 출근할 일이 거의 없었으나, 수원의 이 학교로 와서는 방학이란 게 아예 실종되고 말았다. 말이 방학이지 실제로 쉴 수 있는 날짜는 일주일이 고작이었다. 남들이 다 쉬는 7월 말 8월 초의 휴가 기간에만 쉴 수 있었고 다른 날에는 ‘보충수업’이 잡혀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다들 출근해서 보충수업이라도 하면 되었으나, 중국어를 담당하는 나로서는 보충수업도 없었고, 단지 담임이라는 이유로 불려 나오는 것이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보충수업이 있는 오전에는 빈둥거리다가, 오후에는 자율학습 감독을 하고 6시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저녁 8시였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은 유난히 더웠고, 집이 있는 광명시에서 수원 학교까지 전철을 갈아타고 화서역까지 한 시간여, 역에서 학교까지 20분을 걸으면 뭘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졌다. 점심 무렵이었을까? 교무실에 있다가 우리 반에 가 보았는데, 반 아이들의 절반 정도가 보이질 않았다. 애들이 어디 갔냐고 한 아이에게 물으니, 천연덕스럽게도 국어 선생님이 애들더러 집에 가도 된다고 해서 다들 집에 갔다는 대답이 나왔다.
난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나는 당시 우리 반에서 가장 힘 좀 쓴다는 녀석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야, 나 담임인데, 너 지금 어디 있냐?”
“중심상간데요.?”
“너하고 애들 다 그 근처에 있냐?”
“아마 그럴걸요. 근데 왜 그러세요?”
“이것들이 몰라서 묻냐? 너, 당장 애들 다 찾아서 20분 내로 학교로 돌아와.”
정확히 20분 후에 도망친 아이들이 모두 반에 모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으니, 국어 시간에 아이들이 수업 태도가 하도 불량하다 보니, 국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공부하기 싫으냐’고 물었단 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 반은 ‘이과’ 반이었음에도 총원 44명 중에 태반이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기 위해서 등교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공부하기 싫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이 ‘그럼, 집에 가서 쉬어라.’라고 말했고, 아이들이 ‘정말, 가도 되냐?’고 반문하자, 선생님이 ‘정말, 가도 된다’라고 허락해서 결국은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술자리에서 내가 국어 선생님께 ‘그때, 진짜로 애들더러 집에 가라’고 했느냐고 여쭈어봤다. 그런데 선생님은 ‘당연하죠, 얼마나 공부하기가 싫었으면 학생들이 그러고 있었겠어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셔서 깜짝 놀랐었다.
그 학교에서 1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나는 ‘본거지’ 인천으로 돌아가서 한 해 동안 더 기간제 교사를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호구지책으로 ‘교도관’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다. 비록 기간제 교사였지만 ‘학교’라는 자유로운 공간에 있다가 ‘교도소’라는 꽉 막힌 곳에서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을 많이 다쳤다. 나는 수원 근처에 있는 교도소에서 근무했는데, 내성적이고 타인과의 교류가 별로 없는 사람인지라 가끔 ‘사람’이 그리우면 ‘국어 선생님’을 찾아뵈었었다. 선생님은 사실 학과는 다르지만, 나의 대학 선배님이셨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장끼를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대화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어주는 그런 분이셨다.
그렇게 가끔 선생님을 만나 속에 있는 말을 하며 지내다가, 2013년 어느 날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명예퇴직을 하시고, 무료로 검정고시를 준비시키는 ‘대안학교’를 차리셨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선생님 가정에는 아직 대학을 다니는 자녀가 둘이나 있었고, 심지어 큰 딸은 영국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누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자비를 들여서 그런 큰일을 벌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셨고, 대학원에서도 대안교육을 공부하시는 데다가 참관하기 어렵다는 영국의 유명한 대안학교인 ‘썸머힐(Summer Hill)학교’까지 찾아가서 배우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수원시민학교’라는 일을 저지르실 줄은 몰랐다.
나는 ‘수원시민학교’ 초창기에는 소정의 기부만 하였다. 선생님이 극구 만류하셨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은 월 5천 원씩만 하라고 하셨지만, 2만 원으로 합의를 보았다.
2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어느 술자리에서 술 먹은 김에 선생님께 ‘제가 그래도 학교 경력이 칠 년이고, 교육과 관련된 경력을 다 합치면 13년인데, 수원시민학교에서 강의를 한번 해 보는 게 어떨까요?’라는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해보시더니, 일주일 안에 연락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날 술을 많이 마셔서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바로 다음 날 전화를 주셨다.
“박 선생님! 제가 생각해봤는데, 선생님이 중국어를 전공하셨으니까, 우리 학생들한테 ‘교양과목’으로 ‘한문’을 해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지금까지는 제가 틈틈이 기초한자를 가르쳤었는데, 아무래도 전문가가 하시면 낫지 않겠어요?”
“선생님, 근데 한문이 검정고시 과목도 아닌데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요. 검정고시 과목이야 시험 끝나고 나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한자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교양을 높이는데 필요하니까 어쩌면 한문을 배우는 게 진정한 공부일 수 있지요.”
“그럼, 언제부터 나갈까요?”
“당장 다음 주부터 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한 번, 매주 금요일마다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우주선이 착륙한 듯 휘황찬란한 불빛이 산란하는 수원야구장 근처 수원시민학교에 출강했다. 나름 재미있게 해 보려고, 퀴즈도 만들고, 쉽고 잘 알려진 한시(漢詩)도 가르치고, 옥편 찾는 방법, 사자성어에 이르기까지 직접 수업자료를 만들어서 강의했다.
나는 마흔아홉까지는 승용차가 없었다. 그래서 직장이 있는 화성시 마도면에서 시민학교까지 가려면 상당히 먼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수원 장안문 앞에서 내려서 15분 정도 더 가면 시민학교가 나왔다. 교통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수업을 하는 1년 반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 후, 직장에서 ‘야근’ 부서로 발령이 나면서 잠시 수업을 멈추었고, 가끔 커피 한 봉지씩 사 들고 수원시민학교로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었다. 그 후로 몇 년 후, 나는 야근을 하지 않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2018년 10월의 어느 날, 그날도 선생님과 술을 마시다가 시민학교 수업 얘기를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이번에는 중학반 ‘도덕’을 맡아달라고 하셨다. 이번에도 역시 시작은 바로 다음 주였다. 당시에 아들이 마침 중학생이어서 중학교 도덕 교과서와 EBS 방송교재, 기출 문제를 찾아서 직접 교재를 만들어 수업했다.
1년여가 지난 다음 나는 다시 ‘야근’ 부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그만한다고 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4일에 한 번 야근을 하니까 4주에 한 번씩만 요일을 바꾸어서 수업하면 되었다. 선생님께 내 계획을 말씀드리자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하면서 지내다 보니 시간이 빨리 흘렀다. 2021년 가을부터인가 선생님이 가끔 학교를 비우셨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차가 없는 나를 수원역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주셨고, 일이 있어서 미리 가시거나, 그리하지 못하실 때는 태워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셨었다. 그런데 12월쯤 되자 선생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해 보기도 하고, 문자를 해 보기도 했지만, 감감무소식, 함흥차사였다.
그 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가 극성이었고, 우리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아내부터 시작해서 나도 옮았다. 아내가 병이 나은 다음, 아내는 안방에서 자고, 나는 격리를 위해서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잤다. 근데 병세가 심했는지, 아들이 ‘혹시 아빠가 죽었나!’ 해서 새벽에 나와서 내가 숨을 쉬는지 살펴보았었다고 했다. 코로나 격리가 끝나는 마지막 날 부고가 왔다. 선생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매우 슬펐다. 나는 교만한 인간이라서 누구를 쉽사리 존경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건 알면 알수록 실망하기 때문에 아예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알면 알수록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경황도 없었고 그리 빈 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빈자리가 커졌고,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하고, 울컥울컥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교도관 생활이 만 12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중 9년 넘게 ‘야근’을 한 교도관은 전국을 다 둘러보아도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나이가 쉰이 넘으니 ‘야근’이 벅차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는 ‘주간’ 부서가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야근해야 할 것 같다. 올해부터 나는 고등반 ‘도덕’을 맡았다. 중학반 교재 준비하듯이 준비했다. 고등반은 그래도 수준이 있다 보니 준비하는데 두 달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냥 대충 수업할 수는 없었다. 몇 년 전 성탄절에 한 칠십 대 학생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셨다. 내용은 간단했다.
“ 선생님, 못 배운 저희를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배워서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가신 지, 어느덧 1년 3개월이 지났다. 몇 년 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수원시민학교도 한 십 년 정도 하면 자리가 잡히지 않겠어요? 그땐 내가 없어도 어떻게 잘 굴러갈 거예요.”
올해 수원시민학교 십 년 차, 어떻게 잘 굴러가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우리가 잘 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선생님께 한 말씀 올리고 싶다.
“내가 아는 세상에 쓸모 있는 유일한 인간 박무영, 교만한 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 박무영 선생님, 이상한 선생님 박무영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