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성산 전투 패배의 충격을 이겨내고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이두황의 장위영군에 패했다는 소식은 동학농민군에게 충격을 주었다. 세성산은 서울로 가는 길목이며 북쪽에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기 위해 내려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목천 일대는 1880년 초부터 보은과 더불어 충청도 동학의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었다. 그런데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목천 일대의 동학 세력이 무너졌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동학농민군의 시기도 떨어뜨렸다.
동학농민군이 점령하기로 한 공주는 충청도의 중심지로 충청감사가 있는 곳이었다. 공주는 남쪽으로는 높은 산들로 가로막혀 있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금강이 돌아나가 평지로 들어가는 길이 없었다. 남쪽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빠른 길은 우금티를 통해야 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도 우금티를 넘어 공주로 진격하는 것을 주공격로로 정했다. 논산에서 출발해 노성에서 경천을 지나 바로 북상하면 우금티 고개를 만나게 된다. 또 이곳에서 하천 방향으로 따라 올라가면 효포를 지나가게 된다.
논산에서 합류한 전봉준과 손병희의 연합부대는 세성산 전투가 벌어진 10월 21일 공주 공략을 위해 소토산의 대본영을 출발했다. 2~3만의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출발해 노성과 공주 부근의 경천점(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군영을 설치했다. 삼남대로에 있는 경천점의 주민 증언에 따르면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경천점에서 판치(板峙) 쪽으로 가는 길목의 쇠봉 아래 있는 삽작골에 유진했다고 한다. 삽작골에서 들판 건너편 금대리 금띠 마을에는 9세 소년 정두상이 동학군 연락병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서주골에는 동학군이 군량을 쌓아 두고 이인으로 운반해 간 ‘군량고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또 동학군이 진지로 쓰고 봉화를 올렸던 금반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경천점의 동학농민군 유영지. 경천점의 쇠봉 아래 삽작골에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다고 하는데 사진의 야트막한 봉우리가 쇠봉이다. |
우금티는 호남 동학농민군이 공격하기로 했다. 경천점에서 동학농민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기로 했다. 전봉준 부대의 1대는 판치(板峙, 무너미)를 넘어 효포(孝浦)와 웅치(熊峙, 곰티, 능티)로 공주의 동쪽을 공격하기로 했고, 한 부대는 이인으로 나아가 공주의 남쪽을 공격하는 전략을 짰다. 그리고 손병희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의 대교(大橋)로 진출했다. 대교는 옥천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세 갈래 길 중 동쪽에 있다. 관군은 대교로 들어온 손병희의 호서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동네 뒤의 작은 기슭에 숲에 의지하여 진을 친 자들이 수천 명이었으며, 넓은 들판에 깃발을 꽂고 둘러 있는 자가 족히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라고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당당했음을 기록했다.
관군과 일본군도 속속 공주로 집결
동학농민군이 논산을 떠나 공주로 진격하던 시기에 충청감영에는 이미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과 일본군에 의해 방어선이 구축돼 있었다.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은 호남의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 10월 23일 경리청 군대와 일본군을 이인 쪽에 집중 배치했다. 이인에는 경리청 영관 구완희(具完喜)와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 그리고 일본군 용산수비대에서 파견된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소위의 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과 경리청 영관 구상조(具相祖)는 병대(兵隊)를 인솔하고 효포를 지키게 했고 감영 우영장 이기동(李基東)과 경리청 대관 백낙완(白樂浣)은 금강 나루에서 진을 치고 동학농민군을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8월 16일 청국군과의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후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에 동학농민군을 모두 살육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서울에서 세 길로 나누어 압박하면서 동학농민군을 남쪽 바다로 몰아 몰살하겠다는 이른바 ‘청야작전(淸野作戰)’이라는 구체적인 전술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 결과 10월 24일에는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가 지휘하는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서로 분진대가, 26일에는 미나미가 이끄는 중로 분진대가 공주에 도착했다.
이와 함께 우선봉 이두황은 장위영 병사를 이끌고 10월 21일 목천 세성산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다음 10월 27일경에 공주로 들어왔다. 좌선봉 이규태는 교도 중대와 통위영 2중대를 이끌고 과천-수원을 지나 일본군 3중대와 합류해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했다. 동학농민군이 공주를 공격할 즈음 충청감영에는 경군을 합친 조선 관군이 대략 3200명이었으며, 일본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대교에서 손병희의 호서 동학농민군 패배
동학농민군의 공주를 점령하기 위한 공주 공방전은 크게 이인 전투, 효포 전투, 우금티 전투가 있다. 이 세 전투 가운데 우금티 전투가 가장 치열해 동학농민군의 공주 공방전을 우금티 전투라고 부른다. 이 세 전투 이전에 벌어진 전투로 호서의 동학농민군을 관군이 습격한 대교 전투가 있었다.
몰래 배후에서 먼저 숲에 있는 적들을 습격하고 조금 있다가 포를 쏘면서 산을 내려가 넓은 들판의 적들과 서로 마주쳤습니다. 그 숲과 기슭을 빼앗으려 서로 포를 쏘면서 반나절을 대치하여 죽인 자가 20여 명이고 사로잡은 자가 6놈이었습니다. 그런 뒤에 점점 해산하여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달아나기에 병사가 45리를 뒤쫓아 가서 반나절을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날은 저물고 병사는 피곤하여 하나하나 토벌하고 싶었지만, 진퇴양난이었기 때문에 방(榜)을 써 붙여서 백성을 안심시키고, 적들이 버리고 간 약간의 물건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대교 전투에서 손병희 휘하의 호서동학군은 졸지에 관군의 습격을 받고 2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생포됐다. 홍운섭은 호서의 동학농민군에 큰 타격을 주고 공주로 돌아갔다. 손병희의 부대는 다시 이인의 전봉준 부대로 합류했다.
이인 전투와 호포 전투
공주 공방전은 이인 전투로부터 시작됐다. 손병희가 지휘하는 호서 동학농민군은 왼쪽 공격로를 맡아 이인에서 치러 올라가기로 했다. 10월 23일 이인에 나간 성하영의 경리청군과 구완희의 감영군이 호서동학농민군을 선제공격했다. 이에 대항해 싸우는 호서동학농민군의 위세는 관군도 놀랄 지경이었다. 성하경은 호서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깃발들을 수풀과 같이 꽂아놓았고 보루에는 적병이 가득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옥녀봉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은 회선포를 쏘면서 관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다. 성하영의 경리청 병대는 남쪽 기슭을 에워싸고 총을 쏘았고, 스즈키 소위의 일본군은 야산 북쪽으로 올라가서 몸을 숨기고 총을 쏘며 서로 호응했다. 구완희의 감영군은 남월촌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물리치고 큰길을 따라 들어왔다. 이렇게 삼면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공격하자 동학농민군은 수십 명이 쓰러졌고 결국 옥녀봉을 버리고 취병산으로 도망쳤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대포 2좌, 탄약, 깃발 등을 획득했다.
이인을 점령한 관군이 성내로 회군했고 일본군도 빠져나가자 후퇴했던 동학농민군은 전진해 작은 봉우리 두 개를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은 다시 이인 일대를 차지했다. 화력이 우세한 관군과 일본군도 동학농민군을 막아내려 했지만, 동학농민군의 인해전술에는 당할 수가 없어서 피해가 적지 않았다. 동학농민군 측의 기록에는 이인 전투에서 관군에 크게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인역 터, 공주로 들어가는 이인역을 동학농민군이 차지하고 공주로 진격하기 위한 이인 전투가 전개됐다. 초기에는 관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마지막에는 동학농민군이 승리했다. |
10월 25일 새벽에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동학농민군이 효포로 진군했다. 여기에는 호서의 동학농민군도 일부 가담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선 경군과 효포 일대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다. 서쪽을 맡았던 호서 동학농민군도 효포 쪽으로 합류했다. 이렇게 되자 경천과 이인에서 우금티와 효포까지 넓은 지역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효포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능티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했다. 능암산과 봉화산 사이에 있는 능티를 넘으면 새말을 거쳐 공주 성내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효포 전투는 하루 동안 치러진 대접전이었다.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냉쳔 뒷산에 약 3000명의 동학농민군이 올라와 관군과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고 했다. 동쪽으로 올라온 주력부대는 호남동학군이었다. 그리고 공격의 일익을 담당한 것은 호서 동학농민군으로 효포 전투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연합작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인에서 북상하면 봉황산으로 직행하는데 그 후면에 들어가서 포진한 것이 호서 동학농민군이었다. 또한, 주력부대의 좌익으로 호서 동학농민군이 가담했다.
▲ 효포에서 바라본 능암산과 성재산. 동학농민군은 이곳 능암산을 넘어 공주로 진격하려고 했다. |
효포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약 7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동학농민군은 들을 지나 후퇴해 시야산 등성이에 진을 쳤다. 그리고 경천에 다시 집결해 11월 8일까지 12일간 전력을 재정비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