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0일 금요일
주간보호센터
김미순
집사림이 작년에 세삼을 떴다.. 순식간에 온 심장마비로 허망없이 갔다. 내가 옆에서 잤는데 죽는 것도 몰랐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디가 자식들이 잘 되어서 이제야 어깨펴고 사는가 싶었는데~~
나도 비슷했는데 나는 집사람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술도 마음대로 먹고 그때마다 깽판지르면 그걸 다 받아주었다. 성격이 개떡같은 어머니의 성질도 다 받아 냈다. 딸은 고등학교만 보내면 된다고 떼를 써도 두 딸을 다 대학까지 보내는 강단을 두었다.그래서 둘 다 선생님으로 만들었다. 아들 둘 다 공기업에 높은 자리에 앉게 했다.
나는 육 개월을 상심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혼자 뭘 먹는다는 게 부끄럽고 슬펐다. 나도 따라 죽었야야 했다. 죽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큰아들이 나에게 주간보호센터를 소개했다.
"아버지, 그렇게 가다간 아버지도 죽어요. 이렇게 안 드시면 몇 달 못가서 저희들 얼굴도 못 봐요"
주간보호센터는 세 끼 밥 다 주고 여러가지 문화활동도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설득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장난 아닌 중년의 여자와 그에 비해 아주 작고 볼품없는 젊은 남자가 우리집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 여자는 주간보호센터의 센터장이었고, 남자는 운전기사였다. 승합차를 탔는데 이미 부부인 듯한 두 명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보며
"여보!"
하고 여자 노인이 내게 여보를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 밀 안 하고 옆에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자기 가슴으로 끌어갔다.
그때부터 그 여자는 반가워서 그러는지 못 하게 하는 남편에게 항의하는 뜻에선지 마구마구 울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도 도착하여 보호센터에 들어 가서도 줄곧 꺼이까이 울기만 했다. 여러사람들이 등을 어루만지며 달래고 얼러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여러 강의와 신체활동이 진행되었으나 그녀는 남편과 함께 강의실 모퉁이 작은 소파에 앉아 웃다가 울다가 박수를 쳤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를 반복했다. 집에 갈 때 쯤에야 안정이 되는지 잠잠해졌다.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사과를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처음인데 나, 김상밀이요. 제 집사람이 중증 치매환자요.앙해해주시오"
"짐작했소. 고생하겠소. 나, 정영진이오"
그 이후 매일 나에게 달라붙는 그 여자와 떼어내려는 그 남편의 실링이가 계속되었다.
나는 처음엔 놀랐다가 점점 익숙해졌다. 그냥 놔 두세요, 당신도 예뻐요, 우리 같이 걸어요,하고 베란다에 나와 밖을 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그녀의 남편이 활동을 그만 두고 우리둘을 지켜 보았다.
나는 그 여자가 치매에 걸렸다지만 내 아내를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한참 정신없이 날뛰고 살았을 때가 있었다.
읍내에 까투리라고 하는 방 하나에 맥주와 소주를 파는 술집이 있었다. 소위 시인이라고 하는 그 여주인이 참으로 고상하고 정결해 보였다. 자신의 시집이라고 시집을 내밀었은 때 손이 벌벌 딸렸다. 나는 한 일 년 동안을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집에는 거의 안 들어갔다. 집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른 제했다. 그 여주인의 실제 남편이 와서 머리를 질질 끌고 읍내를 떠났을 때, 나는 집에 들어갔다. 술을 왕창 마시고 깽판을 질렀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구새가 잠잠해질 때 옆집으로 피신했던 어머니와 자식들이 들어 왔고 얼굴이며 팔에 시퍼런 멍을 단 아내가 허리를 꼬부리고 자고 있었다.
나는 하도 목이 말라 일어났다. 벌써 해가 뻔히 뜨고 있었다.
"여보!"
아내가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여보"
몸을 흔들었다. 전혀 일어날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나 다음엔 착한 남자 만날라요"
그 후 나의 술구새는 점점 줄어들었고 말년에는 그야말로 착한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틀이나 그 부부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궁금하여 센터장에게 물어보았다. 남자가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내일이면 그 여자가 센터에 올 거란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왜 그러지? 뇌졸증 전조 증상인가?
나는 그 여자의 집에서 내렸다.조금 놀다간다고 센터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여자 집에 갔다. 요양보호사가 저녁 간식을 챙겨주고 갔다. 단 둘이 남겨지자 그 여자가 노골직으로 나에게 접근했다. 손을 만지고 얼굴을 만지고 가슴을 만지고 심지어 그곳까지 만졌다.
나는 뒤늦게 여자맛을 보았다. 즐겁고 기쁜 날의 연속이었다. 저녁을 지새고 새벽에야 집에 가는 게 일이었다.
지금 나는 병원 입원실에 누웡있다. 왼 쪽이 마비되어 말도 못 한다. 옆에는 큰아들이 보조의자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다항히 일인실이라 조용하다.
생각을 더듬어 본다.
그날도 그 여자 집에서 알콩달콩 웃고 떠들며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얼굴을 들여다 보고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깨가 쏟아졌다. 그땨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그 여자의 남편이었다. 입구에 세워졌던 지팡이가 날아왔다. 정통으로 내 머리를 가격했다. 나는 삐요삐요 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골든타임유 못 지키고 수술은 이미 흘러버린 피만 제거했다. 그리고 벌써 삼 개월 째 이러고 있다.
그 여자의 집 옆집에서 나를 살려냈고 그 여자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는 센터장의 말이 못내 서운하다. "여보" 라고 다시한번 불러줬으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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