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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나, 침상 밑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22.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25.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막4:21-25)
21 Jesus continued, “Does anyone ever bring in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or under the bed? Isn't it put on the lampstand? 22 Whatever is hidden away will be brought out into the open, and whatever is covered up will be uncovered. 23 Listen, then, if you have ears!”
24 He also said to them,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The same rules you use to judge others will be used by God to judge you—but with even greater severity. 25 Those who have something will be given more, and those who have nothing will have taken away from them even the little they have.”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나, 침상 밑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21 Jesus continued, “Does anyone ever bring in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or under the bed? Isn't it put on the lampstand?
방에 전등을 왜 켜나요?
벽에 머리 박지 않고 헛발 디뎌 꼬꾸라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등을 방의 어디에 붙입니까?
전등을 침대 밑에 달아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전등 단 후에 널판자를 구해다가 빛을 완전히 가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놓일 장소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천장 제일 높은 곳입니다.
전등에 대한 대우도 정해졌습니다.
그것은 됫박에 덮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는 상식적입니다.
교회가 비난을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상식으로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강대상에서 여자를 두고 음담패설을 하면서 이 일을 성스러운 행동으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두고 성령 본체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아멘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박사가 이 사람을 두고 그런 헛소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까불면 죽어를 하나님과의 친화력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부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박사는 제 할아버지 이름을 할아버지 면전에서 부르면서 너 까불면 죽어하나 봅니다.
제가 가르쳐주겠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교주가 죽으니 그 마누라가 여자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둥
어떤 추한 늙은이는 흰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정말 닭살 돋는 일입니다.
자신이 계시록의 그리스도인양.......
어떤 여자는 강대상에서 내려오더니 제 교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몰상식이고 이 정도면 아주 심각하게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비상식 몰상식을 성경 어디에서 보았습니까?
성경을 읽는지 마는지 소리를 질러대며 드럼을 두들겨대며 기적을 요구하는 교회의 현실로 인한 것입니다.
상식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가장 먼저 인간 존재에 대해 성경의 상식적 이해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모조리 죽을 존재라는 상식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그 권세 높은 바로 왕도 그 피라미드 밑에 진시황도 거대한 흙더미 밑에 깔려있습니다.
몇 곱절 무거운 돌덩이와 흙무더기가 얼마나 무거울까!
늙은 영감이 흰말을 타고 나타났는데 그 자가 죽어도 다시 살아날 자입니까?
그런 종교 쑈 때문에 대구가 코로나19로 난리 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기적으로 척도하려는 수준 낮은 신앙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바이러스가 덤벼들면 이불 쓰고 드러누워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상식입니다.
신앙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존재를 요구합니다.
이 여자처럼 사람을 향해 뺨을 때리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보기에 그 여자는 미친 것입니다.
상식에 못 미치는 여자의 요구대로 제 부모까지 뺨을 때리는 사람들이 이상합니다.
강대상에서 음담패설을 하는 것은 비상식입니다.
자신을 두고 성령의 본체라는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아멘을 합니까!
진리를 판단하는 데에 상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16:1-4)
구름이 몰려오면 비 올 것 아닙니까?
구름이 없으면 맑을 것 아닙니까?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4:3,4)
그리스도가 빵이 돌이 되게 기적을 베푸는 경우 인간을 완전히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배만 채우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적인 필요(need)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그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립니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보호하십니다.
그 환상적인 일을 상상해 봅시다.
6.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7.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마4:6,7)
주님이 그렇게 성전에서 뛰어 내리셨다면 천사들이 등장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 환상적인 영적 현장이 드러났더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 더 잘 확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기적을 통해 과시하시는 식으로 입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몰랐는데 사탄이 요구했던 식의 기적 과시 행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극에 사용되는 빗자루 혹은 가발입니까?
그것을 벗었다가 제 필요할 때 가져다 뒤집어 쓰는.......
종말에는 이렇게 기적을 앞세우면서 허다한 거짓 그리스도가 혹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마24:24)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 말씀을 위배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보이셨습니다.
그 때는 주님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실 때였습니다.
53.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54.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천사들을 동원해서 속 시원하게 적군을 무찌르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 시원하게 거역하는 사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부인하게 한 것입니다.
기적의 방식을 통해서!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마27:39,40)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린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그리스도는 성경 밖에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하는 예수님을 믿어서 뭐하겠습니까?
그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부인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사탄의 믿음입니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27:42)
현실은 보장 되었지만 십자가가 사라진 기복적 믿음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두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눈을 밝혀줄 것입니다.
등불이 그런 대우를 받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제 몸을 태우면서 남들의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등불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이릅니다.
혹은 성령님을 통해 믿음을 가진 자들을 뜻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믿는 사람은 이 등불과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오래 같이 있다 보니 일어난 일입니다.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출34:29)
그 일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님을 모셨을 때 일어나는 결과적인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을 했습니다.
71.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72.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막14:71,72)
이렇게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가 그 무서운 공회원 앞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8.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거늘,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으니,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5:28,29)
베드로는 자신의 입이 감히 공회원을 향해 당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전혀 달라진 자신 입에 대해 놀랐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의 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빛이 드러날 때 세상은 빛 된 우리를 그 높은 곳에 두고 대우할 것입니다.
세상은 구덩이에 빠지고 벽에 부딪히지 않으려는 그들의 필요 때문에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신앙을 기적으로 설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등은 천장 맨 위에 단다.
그것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신앙이 성경적 상식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22 Whatever is hidden away will be brought out into the open, and whatever is covered up will be uncovered.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부정적인 상황을 언급합니다.
드러나야 할 것이 감추어지고
높은 곳에 위치할 것이 숨겨진 것입니다.
실재로 사도들이 빛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노골적으로 그 빛을 죽이려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빛을 전했음에도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상식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숨기고!
가리고!
독재자 헤롯은 군대를 끌고 와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습니다.
빛을 전하던 사도들은 죽음으로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런 인간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을 에덴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곳은 빛으로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2:16,17)
하지만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당시 이브는 하나님의 요구를 암송까지 했습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창3:2,3)
그랬는데 이 부부는 잘도 외우던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어긴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에서 세상으로 쫓겨간 것입니다.
일 주 전 우리는 성탄을 맞았습니다.
그 날의 의미는 빛 되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9-11)
그리스도께서 빛의 대우를 받지 못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했습니다.
실은 이 일이 불신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13:12)
놀라운 일인데 바울조차 자신의 하나님 인식의 한계를 고백한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 나라를 실은 잘 모르겠다.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다.”
그런데 바울에 비교해서 똥덩어리 같은 어떤 인간이 나타나서 자신을 성령 자체라고 떠들어댈 때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가 말하는 비상식을 믿고 십자가의 깃발도 아니고 뜬금없이 태극기 들고 성조기 들고 뛰어다니는 교인이 더 한심할 뿐입니다.
물론 최후의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만큼은 아담과 이브와는 다릅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빛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5:39-42)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식당에서 봉사하다가 어떤 집사가 나를 들먹였다면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 않았나요?
터무니없이 오른뺨을 맞은 다음에 왼뺨까지 내밀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 바보입니까?
말씀은 말씀이고.......
러시아가 총 쏘며 쳐들어오면 나토에 미국에 도움을 받아서 미사일로 갚아야지!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막상 말씀이 저기 침대 밑에 처박혔다는 것입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서슴없이 실천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봉성 교회에서 14년을 봉사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임xx 교우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 사람은 저보다 12살이 많았을 것입니다.
띠동갑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분 집안이 머리가 대단히 좋았습니다.
저보다도 더 12년 일입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 분은 서울의 용산고를 졸업했고 서울대를 합격 했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밭을 팔아서 이 분의 입학금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형 역시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동생의 서울대 입학금을 그의 형에게 부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동생의 입학금을 가지고 친구들과 술을 마셔버렸습니다.
그 분이 우리 교회를 나오시게 되었는데 저는 그 분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분은 그 성경을 한 7,8독을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분은 저에게 성경이 참 재미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그 때 이 분에게 딱 한 가지를 기대했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의 말씀 중에서 이 한 마디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를 바랬습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그 일이 이 분에게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 판 술자리와 바꿔버린 형을 어떻게 용서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만 좋게!
내 인생은 완전히 망치고 말았는데!
그는 그의 형을 서울역 앞에서 칼로 찔러버리려 했다고 제게 고백했습니다.
그 분은 실은 정신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입니다.
그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혼했습니다.
결국 농약을 마셔버렸습니다.
제가 그 일로 그 분을 119에 태워서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제가 이 분의 보증을 섰습니다.
정신병에 시달렸던 식구들도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그 분이 중환자실에 눕혀졌습니다.
여러분도 텔레비전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뛰 찍이익 뛰 찌이익 주기적으로 소리를 내며 그래프를 그리는 작은 화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갑자리 찌이익 일직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죽음이 신호가 온 것입니다.
그 순간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그 몇 사람이 저를 으슥한 곳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에게 아주 반말로 따졌습니다.
당신이 뭔데 보증을 서!
당신이 뭐야!
그 때 보증을 섰으니 이제 나에게는 감옥 갈 일만 남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에게 돈 받아내기 다 틀렸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내가 으슥한 곳에 끌려가서 곤욕을 당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죽을 줄 알았던 그 임xx 교우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일반 병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일반 병동의 침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간증을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임xx 소리치시더니 일어나라고 내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셨습니다.”
울면서 나에게 그 간증을 했습니다.
그 경험을 한 후로 그 분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주일날은 반드시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분이 마을 도로에서 주차하다가 앞차를 들이박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는데 그 날 오후였습니다.
그분이 교회 사택의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농약을 마셨어요.”
처음에는 그 분이 너무 말짱해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푹 쓰러지는 것입니다.
저는 또다시 119를 타고 응급실로 달렸습니다.
그 일로 그 분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일로 괴로움에 제주도 귤밭을 한없이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일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막상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의 뜻을 잘 몰랐는데 그것은 거부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임교우의 죽음 후에야 나는 하나님 말씀의 무게를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파괴 행위였습니다.
그 말씀은 곧 생명을 뜻했습니다.
그가 형을 사랑했더라면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이성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의지를 가지고는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수용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어진 것입니다.
죄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성령은 통한 믿음을 통해 실천될 뿐입니다.
이 죄인의 눈에는 그 임xx 교우의 죽음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말씀을 확연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23 Listen, then, if you have ears!”
제가 제주도 하도 교회에 있을 때 집사님 한 분은 집에 일부러 똥돼지를 몇 마리 길렀습니다.
그것은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님의 이야기로는 그것이 사료를 먹여 기른 돼지보다 더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돼지들은 똥이 떨어지면 밥 떨어진다고 달려들어서 그것을 먹습니다.
돼지 눈에는 똥이 제 밥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아무리 훈련을 시킨다고 해도 똥이 밥으로 보이게는 못할 것입니다.
똥은 똥이지.......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해 보세요.
뭔소리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당연히 무시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빛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즉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을 만드셔야 그 사람의 귀에 말씀이 제대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아예 죄인의 태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죄인의 차원에서 하나님 자녀의 차원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진심으로 찬양하게 합소서
성령이여 우리 기도 드릴 때
우리 곁에 계셔 일러 주소서
성령이여 우리 성경 읽을 때
그 속에서 빛을 보게 합소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찬양을 해도 찬양이 아니며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을 한다고 그 말씀이 들리고 그 나라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전혀 다른 귀로 만드셔야 합니다.
눈도
코도
입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들리는 사람은 성령님의 사건을 만난 분들입니다.
지금도 이 말씀에 아멘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는 이미 영적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는 이전의 귀가 아닙니다.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24 He also said to them,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The same rules you use to judge others will be used by God to judge you—but with even greater severity.
여러분들은 이 문장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등불 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남을 판단에 대해 말씀하시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염두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의 의도입니다.
그는 그의 전하려는 메시지 때문에 등불 이야기를 하시다가 또 남의 판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왕좌왕 되는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려면 이 문맥 안에서 일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빛으로 여겨서 이 빛을 천장 가장 높은 곳에 또 환하게 비치도록 달았는지 그 구체적인 실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빛을 제대로 빛으로 대우하려면 첫째로 주의하라는 것(Pay attention to)입니다.
특별히 지금 들려지는 이 말씀(what you hear)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빛으로 여기는 구체적 실천 행위는 둘째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그 기준을 가지고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그 모양이니 농약 마시고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 말씀이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셨네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 잘하고 있다면서 부부가 금단의 열매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식입니다.
그렇게 에덴을 쫓겨난 후에 그러지 말았을 걸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인에게는 원수를 사랑할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의지가 없습니다.
원수만 좋으라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대충 무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듣고 있는 바로 이 말씀을 주의해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두고 우리는 잣대(CANNON)라고 합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우리는 정말로 확실한 잣대를 찾은 것입니다.
그 마당에 사람들은 이 잣대를 들고 여기저기 재고 다니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재고 장로님도 재고 집사님도 재고
이래서 틀렸고 저래서 맞았고
이것은 말씀을 완전히 오용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잣대질을 그만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잣대질을 한 바로 그 식으로 우리를 재시겠다는 것입니다.
24.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24 The same rules you use to judge others will be used by God to judge you—but with even greater severity.
한국의 성경은 긍정적인 측변에서 해석한 것이 분명합니다.
“됫박으로 넘치게 되어 주면 너도 넘치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네가 사용한 바로 그 식(The same rules you use to judge others)으로 하나님께서 너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잣대를 사용하느냐 용서의 잣대인가 징계의 잣대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징계의 잣대로 재면 하나님께서 그 잣대로 우리의 징계를 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의 잣대로 재면 하나님께서 그 잣대로 우리의 용서를 재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셉이 처녀인 마리아와 약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숙한 여인으로 알았던 이 여인이 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런 경우 율법에 적힌 대로 돌로 죽였을 것입니다.
징계의 잣대를 들이댔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전혀 달리 대응했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마1:18,19)
요셉이 약혼녀에게 쟀던 잣대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다른 것입니다.
용서의 잣대입니다.
실은 이 용서와 자비가 사랑의 예수님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용서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잣대를 남에게 들이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에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실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종말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책임을 물었던 대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제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먼저 물어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 이웃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어?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싶으면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25.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5 Those who have something will be given more, and those who have nothing will have taken away from them even the little they have.”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30배 60배 100배로 엄청나게 번식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것은 썩어서 다른 식물을 위한 거름이 되고 맙니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는 엄청난 플러스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잃으면 그것은 남의 거름이나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들립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말씀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말씀의 수용과 또는 거부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이렇게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