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옥」에서 지옥은 그 지옥이 아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핫한 한국영화 『지옥』을 보았다. 여러 해외 반응을 소개하는 영상물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디어의 ‘가공할 만한 힘(?)’을 실감하고 있다. 뭐 하지만 이러한 나의 느낌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각기 이미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세계관, 가치관,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한 이해력 등을 가지고 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마다 다른 기대감, 다른 호기심, 다른 관점에서 시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지옥’이라는 어쩌면 매우 종교적인 주제를 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같은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본 것은 아니며, 펜데믹 시대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히 내가 좋아 하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 늘었고, 칭찬이 많은 영화라 보게 되었으며,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보는 김에 나만의 관점과 나만의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이 드라마의 시리즈를 모두 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기대감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영화라는 관점에서 당연히 칭찬을 해 줄만 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판타지한 주제로 구체적인 사회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상기시켜주는 부분들이 좋았다. 가령 아노미적이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공포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온다는 설정, 전 인류적인 재앙 앞에서 무기력하게 되면서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극단적 이기주의, 어떻게 사악한 사람들이 사회적 재앙을 자기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치인들은 재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시사성 있는 주제를 큰 무리 없이 잘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영화가 그토록 큰 호응을 이끌어낸 것은 영화 속의 그 상황에 현재의 전 지구적 ‘팬데믹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는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종교적인 주제, 지옥이라는 그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기껏 만화수준의 이해 혹은 다만 다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떡밥에 불과했다는 것에서 실망을 한 것이다. 나의 솔직한 감정은 ‘저 지옥은 그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은 ‘사회적 영화’ 혹은 ‘판타지 영화’로서의 영화의 가치에 대한 평이 아니다. 다만 일종의 재미삼아, 신학적 혹은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지옥’이라는 종교적 주제에 관한 상상력과 이해력, 나아가 지옥이라는 말이 지닌 현실적 의미 등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는 지옥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그러기에는 지옥에 관한 종교적인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하고, 지옥에 관련된 일들에 대한 상상력도 부족하고, 실제로 고지를 하는 천사나, 영혼을 데려가는 지옥의 사자들에 대한 묘사나 뭐 이런 것들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고, 여타의 헐리우드 괴기영화와 거의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옥이라는 종교적인 주제로 마블식 괴기영화를 만들다 보니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를 등장시켜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먼저 제대로된 종교가 무엇인지를 등장시켜야만, 저게 왜 사이비인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도 아쉬웠다. 과거부터 종교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종교가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종교 자체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문화인 것은 아니다. 이는 정치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또 많은 정치인들이 사이비이기는 하지만, 정치 그 자체가 나쁜 것이거나, 정인인 이라는 직업 자체가 인간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변질되고 타락했을 때, 나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옥이라는 개념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옥이라는 개념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마다 그 개념이 다르고 의미도 다르며, 상상하는 이미지도 다르다. 즉, 지옥에 가보았거나 지옥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옥’의 개념은 그 종교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세계관에서 매끄럽게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가령 불교에서는 끊임없는 윤회의 과정을 거쳐 ‘니르바나’에 드는 것이 그들의 교리이며, 여기서 지옥이란 윤회의 과정에서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 거의 괴물과 유사한 사람들의 영혼이 가는 가장 밑바닥의 곳이지만, 불교의 지옥도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괴물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심판을 받고 그의 생전의 죄 값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또 지옥에 갈만한 죄 많은 사람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의 지옥이란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는 것을 감한한다면, 어지간히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면 너무 억울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중간 한 사람들, 천국가기는 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갈만한 사람도 아닌 그런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어중간 한 사람들이 가는 ‘연옥’이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연옥이라는 개념은 이단적 사고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한 일화는 중세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 따르면 한때 「파리대학」에서 “지옥에 벌레도 있는가?”라는 주제로 치열하게 논쟁을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분명 지옥에서 벌레들이 죄인들의 살을 파먹고 있다는 묘사가 있는데, 하지만 사람이 죽은 이후의 세계에서는 물질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벌레를 가정하거나 육체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옥의 개념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겠지만, 어떻게 상상력을 모아 보아도 하나의 종교가 가진 전체적인 세계관 안에 적합하게 들어맞지는 않는 껄꺼러운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종교에서 각기 나름의 지옥개념을 가지고 있고 이는 분명 그 의미와 상상력에 있어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다면 지옥의 개념은 ‘인생의 정의’라는 관점이 반영된 개념이다. 이는 또한 세계를 부조리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세계로 볼 때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이 자비이든 사랑이든 모든 종교는 죄를 짓지 말고 선량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즉, 종교의 윤리적인 명령은 크게 효력이 없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절대자의 심판’과 ‘지옥’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이 칸트가 생각한 ‘요청된 신’의 개념이다. ―물론 칸트는 천국에 갈 사람들의 경우의 예를 들고 있다―. 플라톤의 경우 ‘깨달음을 얻고 올바르게 산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들’을 가정하고, 사후에 이 영혼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각자 자신의 들의 모습(존재론적 상황)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가장 악날한 사람들의 영혼은 가장 비참한 어떤 것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그곳이 곧 지옥이라는 말로 표현 되는 것이다.
이상의 일반적인 지옥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몇 가지 지옥에 관한 공통된 이해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지옥의 개념이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만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저편세계의 어떤 곳이다. 한 사람의 인생의 전체 여정에 대한 결산 즉, 심판이라는 차원에서 지옥이라는 개념은 오직 죽은 뒤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삶이 한 시간이라도 남은 사람에게는 비록 그가 천국을 희망하거나 지옥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은 전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는 신도 멈추어 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천국이나 지옥의 행선지를 알려준다는 설정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 둘째,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곳은 영들이 사는 곳이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인간을 물어뜯고 하는 설정 자체가 넌센스이다. 천사나 악마는 인간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형상(정신적 존재)들이다. ―이에 관해서는 영화 <베를린의 천사>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은 다만 필요할 때, 인간의 이미지를 빌어 인간 앞에 등장할 수는 있다고 중세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이지 육체적 차원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면서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잡한 설정이다. 셋째,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차원에서 이 영화에서 ‘지옥으로 갈 것이다’는 고지를 받은 사람들의 죄가 무엇이며,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죄의 기준이 무엇인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겠지’라고 시청자들이 상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70억 지구 인구 중 지옥을 면할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설득력이 없다.
넷째, 그래서인지 영화의 말미로 오면 ‘이 사건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닌 단지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며, 이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말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그리고 줄거리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금방 태어난 아기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고지를 받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 그 동안의 사람들의 믿음이 깨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막고자 하는 사이비종교인들과 이를 알리고자 하는 주인공쪽 사람들의 갈등 상황이 그것이다. 이 시점에서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고지’는 죄와 무관하게 무작위 적인 것이며, 누구도 운이 없으며 이 고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이는 정확히 현재의 페데믹 상황과 겹쳐지는 상황이다. 바이러스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공적인 죄인’으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설정 역시 ‘확진자’들이 마치 ‘공적인 죄인’처럼 취급받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반전은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억지스럽다. 무슨 초자연 현상이 ‘너는 언제 어느 시간에 지옥으로 갈 것이다’는 구체적인 말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는 마치 어느 날 느닷없이 한 병아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닭을 많이 먹지도 않은 사람에게 나타나 ‘너는 통닭을 너무나 많이 먹었으니 내일 4차원의 닭의 나라 사신이 와서 잔인하게 죽이고 4차원의 닭의 나라로 끌고 갈 것이다“라고 고지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판타지라도 좀 그럴 듯하게 하여야 하는데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순수하게 판타지 형식을 빌은 사회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하고 수준급의 영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에서 말하는 지옥은 분명 종교에서 말하는 그 지옥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