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官 그리고 牧民官 梧溪 曺挺立 경상대 명예교수 조규태 梧溪 曺挺立은 1583년(선조 16)에 할아버지 때부터 자리 잡아 살기 시작한 합천 고을에서, 陶村 曺應仁과 全州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從叔父인 이재(頤齋) 曺友仁에게서 수 학하였으며,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합천 가야에 사는 南冥 曺植선생의 수 제자 인 내암 鄭仁弘으로부터 학문을 닦았다. 모범이 되는 목민관으로서 널리 알려진 아버지 조응인, 문학에 조예가 깊은 종숙부 조우인, 敬義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강직한 선비 조식, 그리고 이 학문적 정신을 정치에 실현하고 있던 내암(萊庵) 鄭仁弘, 이런 분들의 가르침과 영향이 오계(梧溪)의 인격과 역량에 영향을 형성했다. 27세 되던 1609년(광해군 1), 오계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북인(北人)이 小北과 大北으로 갈라져 권력투쟁을 하다 大北이 권력을 장악하던 시대라 官路가 순탄하지 않았다. 다음은 公 이 북청판관으로 되기까지『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는, 1612년(광해군 4)부터 1618년(광해군10)까지 조정에서 임명 받은 기록이다. 公은 주로 사간원과 사간부의 벼슬을 임명받았는데, 맨 처음으로 司諫院의 정6품 正言에 임명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30세 되던 1612년(광해군4)부터임을 알 수 있다.이때부터 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맡아 수행하였으며, 예문관과 홍문관의 벼슬도 한 차례씩 임명 받았다. 정언, 지편, 헌납, 봉교, 교리는 모두 임금가까이에서 임금과 대신들에게 간언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너무 강직하게, 즉 벼슬자리를 내려 놓고 간언을 해서인지 수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었다.
『朝鮮王朝實錄』에기록되어 있는 ‘爲正言’은 ‘정언에 임명한다는 뜻이다. 司諫院 ’正言‘벼슬에 5번 임명되었으니, 평균 2개월마다 한 번씩 새로 임명된 것이다. 사간원의 정5품인 ’헌납‘도 모두 5차례 임명받았는데, ’奉敎, 校理, 佐郎,‘을 포함하면 평균 4개월에 한 번씩 새로 임명된 셈이다. 이처럼 言官 벼슬에 자주 임명 될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나 대신들에게 싫은 소리를 거침없이 지건하여 연관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公이 언관 벼슬을 지낼 당시의 행적을 보면, 공의 처신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아마도 조선 중기 당쟁이 심하던 시대의 당파를 초원하여 소신을 피력하기란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선 피력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자기 당파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에 자기 당파의 견해에 맞는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公 은 萊庵 정인홍의 제자 였다. 합천이 정인홍의 고향인데다, 정인홍이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인 까닭에 자연히 내암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당시 최고 권력자인 내암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그리하여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사를 일으킬 당시 사간원 정언이었던 공은, 大北의 편에 서서 朝庭의 일에 관여하였다. 大北派가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멸문시키고 宣祖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비윤리적인 일을 자행할 때, 李恒福이 극렬하게 반대하였는데, 오계는 이항복의 편을 들지 않았다. 양사의 대간들이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公 도 동조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처신으로 인해 仁祖反正이후에 비난을 받은 것은 오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삶에 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계가 마냥 대북편에 서서 비윤리적인면에 동참한 것만은 아니었다. 1618년(광해군 10)1월부터 仁穆大妃를 유폐시키려는 일이 절정에 달하자,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공은 사간 南以俊과 持平 金昈․鄭良胤과 함께 그 부당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北靑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북청에 귀양와 있던 백사 이항복에게 1613년 癸丑獄事 때 탄핵한 일에 동참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여 지난날의 일을 반성하였다.『梧溪集』권2에 白沙 李恒福에 대한 추모의 글, 「白沙李相公恒福挽詞」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戊午年(1618,광해군10)가을에는 북청에서의 치적이 뛰어난 덕분으로 서북의 문관수령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전히 이전의 노여움을 품어 공과 같이 폐비의 일에 동참하지 않은 네 사람을 모두 지방으로 옮겨 임명하였는데, 이때 공은 盈海縣令이 되었다. 영해현령으로 재직시에 중도부처(벼슬아치에게 어느 어느 곳을 지정허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가 된 일이 있었음을 친구인 황윤중이 보낸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남쪽으로 올 때 以正(조정립의 字)은 야성(영해)의 경북 盈海에서 바닷가에서 나를 작별하였는데, 그 후에 이정은 중도부처 되었다가 곧바로 풀려나는 은총을 입었다. -黃中允(1577~1648)『국역동명선생문집』
★牧民官으로서 빛을 발휘하다 1636년 丙子年(인조14년)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도성으로 쳐들어오자, 공은 난리를 듣고 勤王兵을 일으켰다. 다음에 봄에 도성에 이르러 비로소 工曹佐郎에 임명되고 이어서 平壤庶尹에 制守되었다. 평양 고을은 오랑캐에게 병화를 겪어 곳간이 텅 비어 피폐해 졌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공이 수고로 움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니, 1년이 되지 않아 옛날처럼 안정되고 창고에도 쌓인 것이 있게 되었다. 당시의 서북지방에는 일이 많아 공문이 번잡하였는데, 巡察使가 번거롭게 처라 할 것이 있으면 公 에게 맡기니, 공이 판단하여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당시에 死刑囚가 한 사람 있었는데, 허위로 자백하여 형벌을 받게 되었다. 공은 그가 원통하다고 의심하여 집행을 늦추었는데, 마침내 진짜 범인을 찾아내니 觀察使이하 官員들이 모두 신통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사신들이 왕래하며 公 의명성에 대해 서로 말하였다. 5년 임기가 다 되어 내직으로 돌아와 軍資監 正 이 되었다. 얼마 뒤 星州牧使로 나갔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품계를 올려 중용하려고 하여 備邊司에서 東萊府使로 추천하였으나 명이 내려오기 전에 곧 遞職되어 돌아왔다. 1645년(인조23)에 潭陽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에 定州牧使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平壤을 경유하였는데, 온 경내 父老들이 서로 다투어 맞이하고 전송하여 수백리에 장막을 쳐 놓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定州에 있을 때도 한결같이 평야을 다스릴 때처럼 하여 백성들의 삶을 잘 보살폈기에 지방관에 대한 평가가 일대에서 최고였다. 임기가 끝나고 그대로 1년을 머무렀는데, 두 고을 사람이 모두 비석을 세워 선정을 치하했다. 公 은 언제나 강직한 언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였다. 당쟁이 심하던 光海君시대를 살면서 당파에 매몰돼 판단을 그르친 적도 있었지만, 仁穆大妃 廢妃論에는 동료 세 명과 같이 반대 입장을 표명한 용기 있는 선비였다.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는 牧民官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기에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晩年에 공은 세상을 잊기 위해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黃江 가의 경치 좋은 곳에 봉서정을 짓고서 자연과 더불어 餘生을 보냈다.
선비문화 제34호에서 裕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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