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 2015년 <시작> 시인상 당선작
《 심사평 》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명,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