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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스테판 츠바이크 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안인희 역, 바오출판사, 2019.
1.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세계사’를 배운 사람들에게 “칼뱅을 아십니까?”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대부분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조금 더 공부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는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천재적인 신학자”라고 대답할 만큼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랬다. 칼뱅은 25세라는 젊은 나이(1535)에 이 책의 초판 원고를 완성하였고, 이듬해(1536)에 초판이 출판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 교파 중 개혁교회와 장로교는 그의 사상을 추종하여 따르는 후예들이다. 그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오늘날의 미국(U.S.A.)을 건국한 중심인물들이었던 청교도들도 칼뱅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헌법도 그러한 영향력에서 만들어졌다. 이쯤되면 칼뱅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칼뱅 사상의 핵심은 ‘원죄론’과 ‘예정론’이었으나 처음부터 그의 주장은 찬반 논란이 치열하였고 그 논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그 사상의 옳고 그름과는 별도로 칼뱅이 보여 준 ‘신앙(사상)의 자유’에 대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쫓겨 다니던 시절의 칼뱅은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으나 그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자 그의 종교적 광신주의(狂信主義)는 상상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쓴 기독교강요의 가르침에서 단 하나라도 벗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공격하고 제네바 의회라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강요’는 성서가 아니라 성서에 대해 칼뱅이 본 해석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강요의 내용에 대한 반대 연구물은 압수되고 소각되었다.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체포구금 하였으며, 주장을 번복하지 않으면 화형으로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그 사실을 만방에 드러낸 책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소설가이자 뛰어난 전기 작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바로 이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다.
2. 이 책의 주인공들
1935년에 독일어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폭력에 대항한 양심-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의 기록 대상은 ‘장 칼뱅’과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지만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칼뱅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스위스 제네바 의회의 판결로 화형당한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다.
1) 장 칼뱅(Jean Calvin)
이 책의 목차 제1장과 2장은 장 칼뱅에 대해 서술하는데, 츠바이크가 파악한 칼뱅에 대한 이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칼뱅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의 광신적인 독재가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가르침에 반대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고 제네바에 신설한 종교국을 통하여 무력과 권력으로 통제하였다. 이 책의 “제1장 칼뱅의 권력 장악, 제2장 자유를 질식시킨 광신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스물네 살 된 칼뱅은 ···일 년 만에 저술한 「기독교강요」를 내놓아 최초로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닦았다. ··· 기독교강요는 ··· 방종이던 것이 교의(敎義)가 되고, 자유는 독재로 변했으며, 영적인 흥분은 정신적인 규범이 되었다.”(p.41) “자신이 한 번 형식화한 내용은 절대로 그 완강함을 줄이거나 변경시키지 않는 것이 칼뱅의 능력이었다. ··· 칼뱅은 상대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붕괴되는 수밖에 없었다. 칼뱅이나 혹은 그에게 대항하는 데 중간적인 감정이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 하나의 선택밖에는 없었다. 칼뱅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칼뱅에게 종속될 뿐이었다.”(p.42) “내가 가르치는 것을 나는 하나님에게서 얻는다. 이 사실이 나의 양심에 힘이 된다. ···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리셨다. ··· 누군가가 칼뱅에게 극히 학술적으로 반대하는 경우에도, 그가 ‘하나님의 종’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를 모독한다고 했다.”(p.53) “이 모든 향락적인 영혼의 마비여! 사라져라. 예배 도중에 오르간 연주도 필요 없다. 심지어는 종소리도 제네바에서 없어져야 한다.(p.75) “제네바 시민들에게 허락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별로 없었다. 살고 죽는 일, 일하고 복종하고 교회에 가는 일이 허락되었다. ···아니 허락되었다기보다는 법으로 엄격하게 권장되었다. 시민이 자기 교구 안에서 일요일에 두 번, 세 번의 설교,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성경 공부에 참석하지 않았다가는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pp.82-83)
2) 미겔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제4장 불운한 희생양, 제5장 ‘다른 의견’의 비극적 종말”에는 미겔 세르베투스에 대한 스토리가 나온다. 세르베투스는 신앙의 차이 때문에 칼뱅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제네바 의회에서 화형을 당한 최초의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세르베투스를 ‘신학의 돈키호테’(p.123)라고 표현한다. 세르베투스가 유명해진 것은 “특별한 재능 때문이 아니라, 오직 끔찍한 종말로 인해 기억할 만한 인물이 되었다.”(p.123) 세르베투스가 본국인 스페인과 망명지인 제네바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다른 견해 때문이었다. 세르베투스는 “니케아종교회의는 정당성을 갖지 못하며, 삼위의 영원한 본체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본질인 통일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p.126) “유아세례와 삼위일체라는 자기가 보기에 잘못된 교리를 개신교 지도자들이 전파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 그의 양심에는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p.130)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저술에 「기독교 재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온 세상을 향해 칼뱅의 ‘기독교강요’에 맞서서 자신의 ‘기독교 재건’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p.132)
그런데 칼뱅은 이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체포된 세르베투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10월 26일 만장일치로 세르베투스를 산 채로 불태우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잔인한 판결을 바로 다음 날 샹펠 광장에서 집행하라는 명령도 이미 나왔다.”(p.163) 실제로 다음 날인 10월 27일에 화형이 집행되었다. 세르베투스는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p.173)라는 말을 남기고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다음 일요일에 칼뱅은 “검은 수도복을 입고 엄숙하게 강단에 올라서서 말 없는 교인들을 향해, 자신은 두 눈으로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 행위를, 위대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었으며 정당한 일이었다고 찬양했다.”(p.174)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츠바이크의 이 글에 대한 진위여부는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나무위키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20세기 초에 장로회 신학자들이 제네바에 칼뱅이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 카스텔리오 등의 학자들을 핍박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이 논란의 사실 여부는 어느 정도 결정 났다고 할 수 있다. 1903년 제네바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350년 전인 1553년 10월 27일, 미셀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장작더미가 쌓였던 샹펠(Champel)의 자리에 세운 속죄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칼뱅)을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후예로서 종교개혁의 참된 원리와 복음에 따르는 양심의 자유에 확고히 서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 속죄비를 세운다. 1903년 10월 27일 “일부에서는 최근에 제네바 의회의 회의록을 검토한 결과 그 당시의 칼뱅은 아무 힘도 없었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칼뱅주의자들의 자기변호로 보여진다.
3) 세바시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누군가가 ‘세바시티안 카스텔리오’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답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별로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카스텔리오’는 그 당시 ‘칼뱅’의 사상을 유일하게 평화롭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학자였으나 권력을 쥔 칼뱅은 그 반대의견을 허용하지 않고 처절하게 짓밟아 그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유생들과 그 책자들을 모두 태워 없앤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비슷하다. 다행히 유학은 얼마 안 되어 진(秦)을 이은 한(漢)나라 정치사상의 기반이 되어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스텔리오의 사상을 담은 연구물과 책들은 칼뱅의 권력에 의해 금서가 되어 철저히 소각되고 압수되어 불행하게도 남은 것이 거의 없다. “카스텔리오의 초상화도 단 한 장만이 남아있다. 그것도 중간 수준 정도의 초상화일 뿐이다.”(p.99)
카스텔레오에 대한 기록은 이 책의 제3장, 그리고 제6장에서 제9장까지다. “제3장 자유와 양심의 수호자, 제6장 관용의 선언: 폭력에 반대한다!, 제7장 폭력에 맞서 양심이 일어서다, 제8장 폭력이 양심을 제거하다, 제9장 카스텔리오의 부활”을 보면 카스텔리오가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저항 방법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항거자였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나 미국의 ‘마틴 루터 킹’이 시도했던 비폭력 저항운동은 400여 년 전인 16세기의 카스텔리오에 의해 이미 시도되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2-53)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저항방식이 원조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 이 책의 메시지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에서 츠바이크가 강조하고 싶은 주장들이 무엇인지 감지가 된다. 이 책의 내용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이지만 저자가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츠바이크가 독일의 나찌에 항거하여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을 참작하면 짐작이 간다.
1) 진리가 정당화되려면 다른 의견은 없는지 객관적인 상황에서 살펴야 한다.
이 책의 관심사는 ‘관용(寬容)’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라는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주관은 자유롭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츠바이크가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신념은 자유다”(p.177)라고 한 카스텔리오의 말을 제6장의 주제어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해 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이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기본권 중 하나이다. 우리가 환원운동의 구체적인 방법론 중 “본질에는 일치(ln essential Unity), 의견에는 자유(To opinions Liberty)”를 알고 있으나 이 구호는 결코 우연히 탄생되지 않았다. 수백 년에 이르는 종교개혁이 환원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지혜다.
필자가 목격한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회 안에도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거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군중 또는 형제들을 내세워서 주장이나 교리를 악용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버젓이 활개 치는 그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부당함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간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일치와 자유를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2) 내가 믿는 진리를 반드시 전달하고 싶다면 평화적으로 정당하게 설득해야 한다.
칼뱅은 로마가톨릭 하에서 박해를 당하던 때는 종교적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러다 막상 권력을 손에 쥐자 자신의 교리(주장) 외에는 권력과 폭력으로 모두 막아 버리는 이율배반의 모순을 드러냈다. 성서의 가르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나 신앙이 아니라, 신(神)을 이용한 사기나 독재로 전락한다. 1960년대에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정권 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어린 홍위병들을 조종하여 근 10여 년간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정권이나 다른 누군가를 이용하여 목적을 완수했다는 점이 이와 유사하다. 칼뱅이 세르베투스와 카스텔리오를 제거한 수단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제네바 정권의 수장인 파렐(Guillaume Farel)과 의회를 통해서였다. 치밀한 정치적 모사(謀士)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사상적 목적을 달성하는 이러한 방식은 ‘머리는 좋으나 마음은 굳게 닫혀 있는 독재’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적(敵)과의 이합집산(離合集散)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대다수의 순진한 사람들은 꼭두각시로 활용하여 싸우게 한다.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내가 믿는 진리를 반드시 전달하고 싶다면 평화적으로 정당하게 설득해야 한다. 설사 그 일로 손해를 본다 해도 말이다.
3) 자유도 중요하되 일치도 중요하다. “오직 성서로!”
현대 민주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훗날 미국을 건국하며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민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기독교 정신, 즉 성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되 자유의지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들 스스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만큼, 그 어떤 시민이라도 억압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정착된 것이 완전한 제도는 아니지만 그나마 자유로움이 있는 ‘시민 종교(civil religion)’다. 자유롭되 일치(一致)하고 진지하되 일상(日常)적이다. 이 부분의 보충 글은 참빛 386호(2021년 7월-8월호)에 기고한 필자의 졸고 “크리스천이 모범적인 세속 시민으로 사는 법”을 참고하면 약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주제 중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칼뱅과 카스텔리오 그리고 세르베투스’ 세 사람은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으나 흥미롭게도 그들이 공통으로 일치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직 성서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세계관의 의지다. 그들은 츠바이크의 관심사인 ‘관용’에서는 일치하지 못했으나 “오직 성서로!”라는 삶의 기본에서는 모두가 하나였다. 그 기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같은 주제여야 한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동안 생명을 걸고 헌신한 그들의 노력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대는 성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임학균 전도자 / 등대 그리스도의 교회
첫댓글
이 책은
금년 1월, 병원에 수술 후 입원 중일 때
고봉환 형(목사)님께서 문병 오셔서 읽으라고 선물해 주신 책이었는데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다 읽었던 책입니다.
그만큼 내용이 좋았습니다.
번역도 깔끔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을 읽듯이 수월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었는데
모두에게 "강추"합니다.
고봉환 형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