깝깝이와 걱정마 / 백봉기
세상에 이름 없는 것이 없다.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것도 있다. ‘부추’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 ‘솔’이라고도 하고 ‘정구지’라고도 한다. 나는 무당이 지어준 ‘판옥’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본명을 놓아두고 예명이나 아호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비빔’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비빔에 대한 철학이 뚜렷해서 가게 이름도 ‘비빔소리’라 했고, 본인의 이름도 ‘유인섭’에서 ‘유비빔’으로 바꿨다. 그 집에 가면 비빔밥과 비빔주가 있고, 본인이 고안해 냈다는 비빔글씨도 있다. 이와 같이 호나 예명, 상호는 본인들이 원해서 붙인 이름이지만 원치 않는 이름 하나를 더 가진 사람들도 많다. 별명이다.
별명은 그 사람의 특징적인 현상에 따라 붙여지는데, 성격이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키가 너무 커서 ‘전봇대’라는 별명을 가진 이도 있고, 키가 작아 ‘땅콩’, 웃음이 많아서 ‘방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도 있다. 자신의 이름이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떠올리게 해서 붙여지는 별명도 많다. 김계동이라는 이름은 김개똥으로, 강도연은 강도년으로 불리기도 한다. 내가 모시던 직장 상사 중에 ‘럭비공’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별명은 친근감을 주고 서로의 마음을 여는 촉매제 같은 역할도 하지만 신체적 결함을 들춰내는 별명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어둡게 만든 일도 있다.
우리 아버지의 호칭도 하나 더 있었다. 고모님이나 작은어머님들이 우리 아버지를 지칭할 때는 ‘에또’라고 했다. ‘에또 집에 있냐? 에또랑 엄마랑 싸웠다며?’ 아버지가 ‘에또’라는 별명을 가진 것은 어떤 일을 하다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일 때, 잠깐 사이 ‘에~또’라는 소리를 습관적으로 했다고 한다.
별명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이 있다. ‘깝깝이와 걱정마’이다. 처음에 그 여자 분을 소개 받을 때 ‘많이 깝깝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이해가 갔다. 음식점을 운영하는 분이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끔은 상대를 이해시키거나 설득해야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은 성질이 좀 급해서 자신의 말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면 가슴을 치면서 “참 깝깝허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깝깝이’였다. 힘들게 설명했는데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참 답답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 ‘걱정마’ 역시 말버릇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 친구는 누가 심각한 말을 해도 무조건 ‘걱정 마!’라고 한다. 사업이 잘 안 된다고 해도 ‘걱정 마!’, 주식이 떨어져 큰 손실을 봤다고 해도 ‘걱정 마!’, 속이 아파서 술을 못 먹겠다고 해도 ‘걱정 마!’다. 한번은 밤 12시가 넘도록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들을까봐 조용히 “알았어, 걱정 마!” 2시가 넘어 또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조금 커지더니 “걱정 마! 금방 갈께.” 4시쯤 포장마차로 옮겨 한 잔을 더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화난 목소리로 “걱정마라니까~!” 새벽 4시가 됐는데도 귀가하지 않으니 아내는 걱정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걱정 마!’라고만 하니 속이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같이 있는 우리들도 당연히 싸잡아 욕을 얻어먹었을 게 뻔하다.
최경주 선수에게 붙여진 ‘탱크’나 이종범 선수에게 붙여진 ‘바람의 아들’ 같은 듣기 좋은 별명도 있지만 ‘독사’ ‘코쟁이’ ‘자린고비’처럼 매우 듣기 거북한 별명도 많다. 이렇듯 많은 별명들이 있지만 기왕이면 내 친구처럼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회사일, 집안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언제 들어도 좋은 말, ‘걱정 마!’ 부르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은 별명 ‘걱정 마!’ “그래 친구야, 걱정 않을 게. 인생 뭐 있어! 걱정한다고 해결 되니?”
[백봉기] 수필가. 《한국산문》등단.
전북예총 사무처장. 온글문학회 회장,
전북문협, 한국산문작가회, 전북수필
*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탁류의 혼을 불러》등등
* 전북문학상, 한국미래문화상(문학)
‘호’는 문인, 화가, 학자 등이 본명 외에 가지는 풍아한 칭호로 풀이된다.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뜻을 둔 곳에 자호를 지어 밖으로 드러냈다. 호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뜻한 바가 있거나, 마음이 가는 사물이나 장소에 따라 또는 어떤 의미를 취해 주로 스스로 짓지만,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이 지어 줄 수도 있는 호칭이다.
'호'와 달리 '별명'은 타인이 지어 붙여준다. 친한 이들 사이에는 이름보다 별명으로 불릴 때가 더 많지 않던가. 이왕 붙일 별명이면, 왜소한 외모나 거북한 특징을 부각한 단점으로 만들기보다는, 장점을 살려서 지어준다면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신이 날 것 같다. 그 어느 별명보다도 <걱정 마!>가 최고의 별명이다. 인생 뭐 있어, 걱정한다고 해결 되니~~
첫댓글 "걱정마" ~ 참 좋은 별명입니다. 긍정적 의미를 가진 별명이면 괜찮겠네요.^^
작가님은 한 번 뵌적이 있습니다
호탕하시더니 글도 아주 편안합니다
<걱정 마> 참 좋은 별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