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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이 홍사
구미에 사는 불자佛者가 지척에 있는 오대 보궁인 통도사에 가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말이 안 되는 불자란 작자가 바로 나다.
나로 말하자면, 이십 대부터 불교청년회에 가입하여 삼천 배를 하러 다니고 마흔 줄에 들어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불교 거사들 모임에 가입하고 매년 두어 번씩 성지순례나 방생을 다닌다. 그리고 지금은 지역에 있는 조계종 작은 사찰의 신도회장이며 새벽마다 맑은 마음으로 천수경을 독송하는 독실한 부처의 제자라고 자부한다. 그런 내가 오십이 넘도록 지척이라면 지척에 있는 통도사를 보지 못한 것은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된다.
전국의 유명사찰을 거의 다 돌았다고 자부하는 내가 통도사를 보지 못한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오대 보궁 중에서도 대형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부처님 진신 사리를 안치해 계율근본도량불보종찰이다. 오대 보궁이라면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의 보궁과 더불어 양산 통도사다. 지금은 1977년도에 부처님 진신 사리가 발견된 구미의 태조산 도리사, 신라최초가람이자 신라불교 발원지인 도리사도 포함시키는 사람도 있어 육대 보궁이라 칭한다.
보궁이 무엇인가? 쉬운 말로 하자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셔온 사리와 정골을 나누어서 보관하는 곳이라고 하면 말이 쉽겠다. 보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계단戒壇이나 사리탑을 세우고 그 방향으로 대형 유리를 달아 신도들이 사리탑이나 계단을 보며 기도할 수 있는 전각을 만드는 게 보통이다.
육대 보궁 중에서 통도사를 빼고 거의 두세 번씩 돌았다. 헌데 보궁의 종찰이라고 불리는 통도사를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난봄까지는 그랬다. 자다가 깨어나서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되돌아보면 통도사를 본 적은 있다. 군에 있을 때였다. 나는 부산에서 해안경비병으로 근무했는데 병장을 달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말년에 한미 연합 훈련인 팀 스피리트 때 꼴사납게 올빼미가 되었다. 올빼미란 가상의 적군이다. 노란 리본을 달고 있는 가상의 적인데 일찍 잡히면 영창감이다. 무조건 부대원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쳐야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얼굴에 검정색 구두약을 발라 위장하고 철모대신에 북한군 모자를 쓰고 이박 삼일을 산 속에서 잡히지 않고 다녀야하는 임무가 주어져서 군용트럭 꽁무니에 실려 양산의 어느 야산에 버려진 것이다. 이인 일조로 나뉘어 우리의 부대까지 잡히지 않고 이박 삼일 만에 돌아오면 포상휴가가 주어지지는 반면 그렇게 했다간 우리 부대 동료들이 작살나기에 이틀 후에 수색대에게 잡혀주는 게 보통이다. 그 땐 말년 병장이었으니 수색대라고 해보았자 같은 대대의 동기들이나 후임들이다. 그 훈련이 끝나면 바로 전역인데 말년을 꼴사납게 보내게 된 게 억울한 마음으로 얼굴에 구두약을 바른 것이다.
작전차량 꽁무니에서 내버려진 첫날은 전투식량을 먹으며 산 속에서 낮 시간을 보내고 야음을 틈타서 나침반만 보고 남쪽으로 산을 하나 넘었다. 적군은 산의 정상으로 다니지 않는다. 칠 부 능선으로 다녀야 가장 안전하다. 능선을 타고 그 산을 넘으니 앞에 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그 산을 넘기 위해 능선을 따라 숲을 헤치고 가는데 따라붙은, 지금은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부산이 고향인 일병 하나가 소리쳤다.
- 이 병장님! 저기 통도사요.
녀석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솔숲 사이로 웅장한 기와지붕이 보였다. 그 때 시간이 여명의 새벽이었는데 나는 노송 사이로 법당의 등뼈만 본 것이다. 아! 통도사. 속으로 감탄하며 손에 든 총을 어깨에 메고 잠시 합장을 했다. 그게 통도사를 처음 본 전부였다.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 후로는 통도사에 가려고 날을 잡으면 무슨 일이 생겨 번번이 취소되는 것이었다. 구미에서 통도사까지는 차로 가면 두 시간이면 족하다. 보궁을 참배하는데 그 정도의 거리라면 지척이다. 설악산 봉정암은 하루 일정으로는 가지 못한다. 어느 길을 택하든 이틀은 걸린다. 평생에 한 번 보기가 힘들다는 봉정암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상원사 보궁은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 통도사는 마음만 짠하지 보질 못했다.
한 번은 내가 다니는 절에서 방생법회를 가는데 통도사를 거쳐서 양산의 낙동강 하류에서 방생법회를 하고 범어사를 돌아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아! 이젠 통도사를 보고 금강계단에 참배를 할 수가 있겠구나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전세버스에 올랐다. 그 땐 내가 다니는 절의 신도 부회장이었다. 그 날 관광버스 세 대를 맞추었는데 일 번 차량은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타고 이 번 차량은 총무스님께서 인솔하고 삼 번 차량 인솔을 내가 맡았다. 그 땐 관광버스마다 마이크를 달고 노래방 기기를 갖추고 있던 시절이었다. 인원을 체크하고 마이크를 잡고 그날 일정에 대해서 차에 탄 신도들에게 설명을 하고 아침 대용으로 준비한 백설기와 물을 돌리는데 전화가 왔다.
현장에서 SOS를 때린 것이다.
그 땐 내가 소유한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열두 대가 구미 바닥을 거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 소장이 때린 전화인데 우리 장비가 파고 있던 지하실의 토사가 붕괴되어 옆의 건물이 위험하니 복구 대책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 전화로는 안 된다. 내 명함에 지하실 터파기 전문이라고 찍혀있었으니 그런 일에는 내가 전문가다. 내가 직접 현장을 보고 복구 대책을 강구해야하는 것이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관광버스 차창 밖을 보니 왜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 번 차량에 탄 주지스님께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하고 관광버스 기사에게 얘기해서 왜관 인터체인지에서 도중하차를 했다. 그리곤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현장으로 날아갔다.
통도사를 보겠다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그때 절에서 차를 마시며 방생법회 일정을 잡을 때 주지스님께서 전라도 송광사 쪽으로 가자는 걸 내가 우겨서 통도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아깝게 되었다.
그 다음에 통도사에 갈 기회가 또 있었다.
내가 가입한 지역 거사들의 모인인 거사들의 회에서 삼사순례를 가는데 통도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임에 나가면 항상 목소리가 작아지고 남의 얘기를 듣는 입장이다. 회원 거의가 법사, 포교사인 까닭이다. 경전의 심오함을 해독하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는 걸 보면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이지 다들 웬만한 스님들을 능가한다. 우리 거사들의 회에는 법당까지 갖추고 있다. 금오정사라는 현판이 걸린 우리들만의 법당은 시내 철물점이 있는 상가 꼭대기 층인 사 층에 있다. 전자 열쇠 비밀 번호를 회원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법당에 가서 염불을 외고 목탁 연습을 하고 마음을 정화시킬 수가 있도록 만들었다. 법당을 갖춘 것은 삼 년 전이다. 그 전에는 월례회 예불을 지역에 있는 사찰을 돌아가면서 정해서 했는데 우리 법당을 갖추고 나니 언제든지 새벽예불도 가능하고 저녁 예불도 가능하다. 비어있는 상가를 싸게 빌려서 같은 회원이며 인테리어 업자인 법화 거사께서 법당 내부를 꾸미고, 수미단을 만들고 날을 잡아서 금오산의 폭포 아래 있는 해운사의 삼존불을 모셔왔다. 조성된 지 백 년이 가까운 삼존불은 미소가 온화하고 영험이 높기로 소문이 나서 회원이 아닌 지역의 아는 보살님들이 양해를 구하고 가끔 우리 법당에 와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가 있다. 아무튼 그 모임에서 삼사순례를 가기로 정한 정기법회가 있던 날 나는 아내와 동행하겠다고 두 명 참가! 라고 신청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모일에 통도사를 가기로 했다고 하니 아내는 달력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날이 내 생질녀, 그러니까 누나의 큰딸 미영이의 결혼식 날이라고 했다. 일찍 결혼식 날짜를 들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회원들이 통도사에서 절밥으로 공양을 할 적에 나는 예식장 지하의 뷔페식당에서 참치를 먹었다. 옆에 앉아 뷔페 음식을 먹는 아내에게 통도사를 가보았냐고 물으니 열 번도 넘게 갔다고 했다. 그 때는 셋째 딸 희진이가 양산에 있는 경남외고에 다니고 있었다.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에는 아이가 혼자서 기차를 이용하지만 방학이나 개학에서 짐을 가져가고 가져올 적에는 아내가 태우러 다녔다. 양산에 가서 시간이 나면 수시로 통도사에 들른다고 하며 나에게 정말 통도사에 가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아내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접시에 남은 연근을 내 접시로 옮겨주었다. 내가 정말 한 번도 통도사에 가보지 못했다고 거듭 강조하자 아내는 다음 주에 토요일에 일삼아서 아이를 태우러 가면서 통도사에 가보자고 했다. 그러자고 응대하고 나는 참치를 더 가지러 갔다.
예식장 뷔페식당에 가면 나는 항상 밥은 조금 먹고 참치를 비롯해 집에서는 먹기 드문 고급 요리를 한 접시 가득 가져다 먹는다. 뷔페식당 식권 한 장에 얼마인데 체면을 차리는지 식욕이 없는 건지 접시에 밥 두어 숟갈과 김치조각 몇 개를 얹어서 자리를 잡는 작자를 보면 괜히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다. 체면 차릴 데가 따로 있지, 많이 먹고 잘 먹었다고 말하는 게 혼주를 도와주는 일이다. 특히나 호텔 뷔페는 식권 한 장이 일반식당의 된장찌개 열 그릇 값에 해당한다. 내가 누누이 그 점을 강조했기에 아내는 나와 예식장 뷔페에 가면 내가 몇 번을 들락거리며 요리를 가져다 먹어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준다. 오히려 어지간히 먹었다 싶으면 아내가 후식으로 과일까지 챙겨오는 입장이다. 아무튼, 그날 뷔페식당은 얼렸다가 녹는 참치가 그렇게 맛있었다. 참치를 먹으며 그 주의 토요일에 일삼아서 희진이를 데리러 가며 통도사를 꼭 보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토요일을 기다렸는데 아이가 연락도 없이 금요일 밤차로 집에 온 것이다. 토요일에 무슨 시험을 치러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럼 통도사는 어떻게 하지?
엉뚱하게 아이에게 묻는 나를 보고 뒤에 앉은 아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일만 날인가? 앞으로 갈 기회가 많아요.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학교에 가보질 못했다. 그러니 통도사도 덩달아 가보질 못한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통도사를 갈 기회가 또 생겼다.
작년 가을이었다.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웃에 사는 군대 동기 S가 아침나절에 사무실에 놀러왔다. 그 친구는 매일 새벽에 운동을 하다가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들러서 커피를 한잔하고 한참 노닥거리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친구다. 그 날은 휴일이라서 아침을 먹고 건너왔다. 작년 늦가을이었지 싶다. 신문을 뒤적이다가 단풍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단풍을 보러 지척에 있는 금오산이나 가서 단풍 냄새나 맡고 내려오면서 동동주나 한잔 하자고 했다. 단풍놀이? 나는 그 친구에게 뜬금없이 통도사를 가보았냐고 물었다. 의료보험 공단에 근무하는 그 친구는 공공노조위원장을 지냈다. 그때 전국을 무대로 뛰면서 짬을 만들어 전국의 명소는 다 다녔다고 하면서 통도사가 빠질 리가 있냐고 되물었다. 가 보았지만 통도사 절구경도 하고 단풍을 보고 오자고 내가 제의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나는 위 층 집으로 올라가 카메라만 챙겨들고 바로 내려왔다. 차는 S가 얼마 전에 바꾼 새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출발이다. 차를 타면서 이렇게 벼락치기로 출발을 해야 통도사를 볼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고속도로에 올리기도 전에 S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S의 장모님이 위독하여 그 날을 넘기기 어렵다는 전갈이었다.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통도사는 고사하고 단풍이라곤 고속도로 입구까지 가면서 가로수의 단풍을 본 것이 고작이었다. 다음날 저녁 무렵 내 친구 S의 장모님이자 아내의 이웃친구 S아내의 어머님 문상을 아내와 같이 다녀왔다.
통도사 금강계단!
생각하면 은근히 짜증이 일고 약이 올랐다. 그 적멸보궁을 보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통도사는 각개전투 하듯이 혼자 다녀와야 정복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적진의 고지처럼 여겨졌다. 부처님께서 나 같은 중생은 통도사 금강계단에 참배할 자격도 없다고 일부러 물리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 짬을 보아서 각개전투에 임하는 태세로 혼자서 가야지 벼르면서도 그 해를 넘겼다.
새해가 들어 올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그건 바로 통도사 금강계단 참배하기였다. 남들이 들으면 새해 맹세치고는 우스운 슬로건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나에겐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이를 갈고 있던 사 월 어느 날 봄비가 새벽부터 내렸다.
-오늘 같은 날 통도사행을 결심하면 장애물이 없으려나?
새벽에 하늘을 보며 짚어 보았다. 예보에 의하면 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날씨 탓으로 중장비 모두가 일을 못 나가니 현장에서 연락 올 일은 없다. 어느 현장에서 다급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화를 하다가 안 되면 사무실로 연락을 할 것이다. 사무실 전화는 경리부장인 여동생 휴대폰에 착신시켜 놓았으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오늘이 기회다. 마음먹으니 바빠졌다. 아침을 후딱 먹고 카메라와 염주만 챙겨서 차에 올랐다. 아내에게 조차 통도사 간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천기를 누설해서 결국 통도사에 가지 못하리라는 기분이 아득히 들었기 때문이다. 차 시동을 걸고 바로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통도사행은 그렇게 007작전처럼 개시되었다. 무탈하게 고속도로에 올리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양산에 내리니 통도사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간판이 아니더라도 차의 네비게이터가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주문 밖에 주차장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 조계종 종단에서 받은, 사진이 붙은 신도 증을 보여주고 입장료를 내지 않고 경내의 주차장까지 들어갔다. 이미 책에서 가람배치도를 보았기에 어디가 어디인지는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먼저 맛보기로 승보박물관부터 둘러보았다. 다른 사찰의 승보박물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승보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오니 추적거리던 비는 그쳤다. 들고 있던 우산이 아무래도 짐이 될 것 같아 차에 갖다놓고 법당으로 향했다. 웅장한 법당의 서까래와 단청을 보니 고찰이 지닌 그윽한 맛을 볼 수가 있었다.
밖에서 신발을 보고 짐작했지만 법당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절을 하는 신도들 앉아서 참선을 하는 신도들로 빼곡했다. 법당에 들어서며 향내를 맡으니 비로소 내가 통도사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나며 진지에 깃발을 꽂은 기분이 들었다.
방해가 되지 않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불단으로 가서 먼저 향을 하나 올리고 합장을 했다. 불단너머 유리로 웅장한 금강계단이 보였다. 나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메고 있던 카메라를 앞에 놓고 꿇어 앉아 반야심경을 외고 나니 옆에서 기도하던 몸피가 튼실한 오십 대 보살이 빠져나갔다. 냉큼 그 방석을 차지했다. 빌어먹을 보살 같으니라고. 절에 오면서 화장을 했는지 방석에서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절을 두 번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방석을 뒤집었다. 그렇게 뒤집으니 화장품 냄새가 덜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절하는 속도에 맞추어 천수경을 속으로 외며 목에 걸고 있던 백팔 염주를 잡고 백팔 배를 시작했다. 나는 통도사에 드디어 온 것이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 예불을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절이 힘들었던지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허벅지도, 종아리도 기분 좋게 뻐근해지는 게 정말 심신이 무아의 경지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다른 신도들보다 신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나는 감성적이어서 이런 영역에 쉽게 들어서는 편이다. 이런 영역을 두고 영어로 엑스터시(Ecstacy)라고 일컫는 모양이다.
절을 하면서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고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니 그곳에 안주하고 빠져나오기 싫었다. 금강계단 앞이라 그런지 정말 황홀했다. 천수경은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슴에서 우러났고 구름을 밟고 절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중생들은 절을 찾는 것이리라.
황홀한 기분으로 입술만 달싹이며 천수경을 다 외고 백팔 배를 마치는데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 분간 예불을 외며 마무리 절을 깔끔하게 하고 무아의 경지에서 현실세계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절을 해서인지 법당에서 나와 신발을 신을 적에 허벅지가 뻐근하여 잠시 다리가 휘청했다. 신발을 신고 거침없이 법당을 돌아서 금강계단으로 들어갔다. 가슴 높이의 토담에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금강계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보았던 어느 보궁보다 그 규모에서 뛰어났고 사면을 둘러보니 책에서 본대로 대칭이 절묘하게 이루어진 과학적인 설계였다.
누군가 말했다. 한국 사람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꼭 손으로 만져봐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금강계단의 돌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카메라를 열었다. 그리고 금강계단을 이쪽저쪽 다니며 앵글 각도를 조정해서 셔터를 눌렀다. 금강계단 건너에서 눈에 들어온 법당의 기와지붕 곡선이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그것도 카메라에 담고 적멸보궁이라 쓰인 현판도 단청이 적당하게 벗겨지고 양각으로 새긴 힘 있는 필체라 작품이었다. 그것도 크기를 조절해서 두 컷을 담았다. 어디를 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사진을 찍을 땐 날씨가 개이고 햇빛이 나서 셔터를 누르는데 조도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금강계단은 사진에 담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도 몇 바퀴를 돌며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곤 했다. 통도사의 길이 멀고 험난했기에 금강계단을 쓰다듬어보는 일이 더욱 값지게 여겨졌다. 네 모퉁이 석주 끝마다 돌로 연꽃문양을 새겨두었다. 그걸 일일이 다 쓰다듬어 보았다. 법당과는 달리 그곳에는 신도들이 붐비기는커녕 적막이 감돌았다. 이유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금강계단 입구에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자다. 어느 스님이 호통을 치며 어떻게 관계자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부처님께 여쭈어보시라고 하면 간단하다는 생각으로 걸린 빗장을 풀고 들어와 빗장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금강계단을 온전히 내 가슴에 담고 나서 할 일 있다. 그건 바로 공양을 하는 것이다.
어느 절에 가더라도 나는 점심을 준비하지 않는다. 내 주특기가 바로 절간의 밥을 공짜로 찾아먹는 일이다. 불공이나 불심으로는 비교가 안 되지만 공양을 하는 일은 법사나 포교사를 능가한다. 그 때만은 법사나 포교사를 발 아래로 보는 도사다.
금강계단을 쓰다듬어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적당한 시간에 나와서 바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 옆에 붙은 공양소를 찾아갔다. 공양소를 찾는 데도 귀신이다. 가람 배치를 보면 어디에 공양소가 붙었는지 단박에 감이 잡힌다. 요즈음 큰절의 공양은 대부분 뷔페식이고 나물 반찬으로 비빔밥이다. 먹고 나서 자기가 먹은 접시와 수저를 깨끗이 씻어두고 공양을 준비하는 보살님들에게 ‘성불 하십시오’ 한마디면 모든 게 해결된다. 언제 먹어도 절밥은 깔끔하고 맛이 있다.
통도사의 공양도 뷔페식이었다. 특히 콩나물무침과 푸성귀무침이 먹음직스러웠다. 김치는 묵은 지가 아니라 갓 절인 것이었다. 반찬을 둘러보니 그 정도면 내공을 다지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쟁반을 찾아들고 밥을 적당히 담고 콩나물과 푸성귀무침을 적당히 담았다. 그리고 쟁반 귀퉁이에 갓 절인 김치도 몇 조각 담고 고추장을 한 숟갈 퍼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내공을 다질 밥을 씩씩하게 비비는데 공양소로 들어오는 스님 한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라! 이분이 누구시더라?
생각할 사이도 없이 일어나 합장을 했다. 합장을 하고 바로 악수를 또 했다. 진명스님이시다. 진명스님은 지금 내가 신도회 회장으로 있는 절에서 일 년 동안 공부를 하시다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춘 스님이다. 그게 벌써 칠팔년 전의 일이다. 나랑은 엄청 친하게 지내시던 분인데 목청이 터져서 염불도 구성지게 하시지만 하모니카로 흘러간 가요를 구성지게 잘 부시던 스님이다. 늘 법당을 지키시다가 짬이 나면 칠성각 아래 솔밭에서 홀로 하모니카를 즐겨 부시던 스님인데 어느 날 사라졌다. 주지 스님께 진명스님 어디로 가셨냐고 물으니 주지 스님은 중놈이 절이 싫어서 떠난 모양이라고 미련을 버리는 투로 말했다.
-처사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진명스님께서 스님들이 공양하시는, 별도로 분리된 작은 식당을 가리켰다. 나는 주위에 앉아 밥을 먹던 신도들의 눈치를 보며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스님들은 공양을 마쳤는지 진명스님 혼자서 공양을 받았다. 스님들은 뷔페로 자기 음식을 담지 않는다. 자리를 잡으면 일하는 보살들이 공양을 대령한다. 스님들 특별 요리로 대중들 뷔페에는 없는 두부튀김과 고사리무침이 나왔다. 스님 공양이 나올 때까지 숟가락을 놓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스님은 그 절의 토지 문제가 잘 해결되었냐고 물었다. 그 절이란 내가 신도 회장으로 있는 절을 말한다.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우리 절에는 소유권 분쟁이 있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내가 다니는 절은 백년 고찰이다. 거의 백 년 전에 불심이 높은 구봉 거사께서 자신의 산에 절을 지어서 조계종 종단에 헌납을 했다. 그런데 건물은 헌납을 했고 몇 푼 되지 않는 땅은 그대로 방치했던 모양이다. 그 산이 통째로 구봉 거사의 증손자에게로 상속이 되었다. 그 증손자란 자식은 지금 어느 교회의 집사쯤 되는 모양이었다. 수시로 와서 절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불사는 물론이고 화장실만 고쳐도 어떻게 알고 와서 생난리를 죽이는 것이다. 절터만 팔라고 해도 팔지 않고 심심하면 원상 복구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법당에 물이 새서 기와만 갈아도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서 난리를 죽이다가 주지스님께 몇 푼을 뜯어가는 것이다. 진명스님이 계실 때도 절 아래 주차장을 보수하는데 와서 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열흘쯤 뒤에 주차장에서 절 마당으로 올라서는 돌계단을 놓는데 제 마누라까지 데리고 와서 또 난리를 죽였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때쯤 진명스님이 사라졌다. 공부를 하려고 왔던 진명스님이 말없이 사라진 이유가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진명스님은 고사리무침을 젓가락으로 듬뿍 집어서 내 비빔밥 접시위에 올려주셨다. 그 고사리무침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통도사에 오신 지 오래 되셨습니까?
-한 일 년 되었을 겝니다.
-그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중이 절에 있었지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름이 경원이 맞지요? 지금 몇 학년이죠?
-스님 기억력 대단하십니다. 대학을 일 년 다니다가 군에 갔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아들 녀석과 세월을 들먹이며 공양을 마치자 스님께선 자신의 방에 가서 차나 한잔하고 올라가라고 하셨다. 차보다 커피가 있냐고 물었다. 마침 좋은 커피가 있다는 말에 스님의 거처로 따라갔다. 요사채 건물 뒤편에 붙은 작은 방인데 작고 정갈했다. 베트남에서 어느 신도가 보내준 커피라며 스님께서 직접 커피를 내리셨다. 커피 향이 그만이다.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 전원을 켰다. 이젠 누가 비상을 걸어도 통도사에 깃발을 곶은 뒤라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전화기에 난리가 났을 거라는 생각으로 전원을 켜니 부재중 전화가 겨우 두 통이 들어와 있었다. 둘 다 아내의 전화였다. 안심이다. 별 일은 없는 모양이다. 아내의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왜 전화를 했냐고 물었다. 어디냐고?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전화였다. 지금 통도사라고 말하니 아내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얘기나 하고 갈 것이지. 사무실에 있는 줄 알고 점심을 차려놓고 찾으니 없더라는 요지였다. 그렇게 밝히고 출발하면 기가 누설되어 통도사에 못 온다고 일축하고는 진명스님을 만나서 같이 공양하고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있다고 했다. 아내는 진명 스님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스님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스님과 길게 통화를 했다. 전화 말미에 진명스님께선 그래요. 그럼 언제 한번 오세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커피가 굉장히 맛이 있다고 하자 스님께서 앉은 자리에서 문갑을 뒤지더니 커피 두 봉지를 내밀었다. 베트남 글씨로 쓰인, 사각 반듯하게 압축시켜 포장을 한 커피인데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져가서 내려 자시라고 하시며 그걸 작은 쇼핑백에 담아주셨다.
주차장으로 와서 차를 시동을 걸고 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통도사에 깃발을 꽂은 것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아서 잠시 정리할 틈이 필요한 것이다.
속으로 찬찬히 짚어가며 정리를 했다. 분명히 통도사에 왔다. 오십이 넘은 오늘로써 오대보궁을 다 돌았다. 책으로만 보던 금강계단을 온전히 가슴에 담았다. 보궁을 담은 가슴이 벅차오른다. 진명스님께 고급 커피를 덤으로 얻었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가자!
차를 출발시켰다. 평일 날 한산한 시간이라 고속도로는 달리기 딱 좋았다. 통도사를 출발해서 한 시간 반 만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말자 처박아 둔 커피포트부터 찾았다. 커피의 향이 일품이었다.
그렇게 007작전으로 통도사를 처음으로 다녀온 게 지난봄이었다.
그날 오후에 한가롭게 진명스님께서 주신 커피를 내려서 마시며 사진을 노트북에 옮겨 저장을 시켰다. 저장시키고 사진을 클릭해서 큰 화면으로 보니 모두가 걸작이었다. 피사체 조절을 잘 한 게 아니라 대상이 모두가 걸작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벼르고 별러서 통도사에 길을 터니 무슨 조화인지 갈 일이 또 생기는 것이었다. 007작전으로 통도사를 다녀오고 난 일주일 후쯤 야밤에 통도사를 또 가게 되었다.
그 날은 벼르지 않았다.
갑자기 통사로 가게 된 이유인즉슨, 다니고 있는 절의 공양주 보살인 자비심께서 진명스님을 뵈러 가는 길에 내 차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아내의 말을 토대로 구체적으로 밝히면, 진명스님이 통도사에 계신다는 말을 아내가 절에 가서 했던 모양이다. 주지스님은 중놈이 어딜 가겠어? 절에 있기 마련이지이지 하시며 담담해하셨고 공양주 보살인 자비심은 펄쩍 뛰었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 자비심은 올해로 꼭 환갑이다. 마흔 아래 남편을 잃고 전자 공장 청소일로 떠돌다가 우리 절에 들어오신 지 거의 십 년이 넘었다. 홀로 키워서 결혼시킨 아들이 하나 있으나 거기에 얹혀살지 않고 절로 들어와 부엌살림을 도맡고 있다. 모르긴 해도 진명스님이 계실 적에 어지간히 정을 준 모양이다. 공양주인 자비심은 운전도 못할뿐더러 차가 없는 까닭에 아내에게 아무 때든, 스님들 저녁공양을 마치고 밤에 아내의 차를 이용하여 통도사를 한번 다녀오자고 만만한 아내를 엄청 졸랐던 모양이다. 헌데 날을 잡고 시간을 맞추어 아내가 절로 가서 공양주 보살을 태워서 나오는데 아내의 차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이다.
아내는 차를 정비소까지 끌고 가서 나에게 SOS를 때린 것이다.
처음에 통도사 얘기는 하지 않고 어느 정비소로 좀 오라는 것이었다. 차가 고장 났다고. 그때 나는 곧 시작할 아시안컵의 결승전을 느긋하게 시청하려고 저녁 대용식으로 치킨과 맥주를 시켜놓고 있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집을 나서려는데 시킨 치킨과 맥주가 배달되었다. 그걸 식탁에 던져두고 아내가 일러주는 정비소를 찾아갔다. 가서 보니 공양주 보살과 같이 있었다. 차를 파악해보니 바로 고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헤드밸브가 하나 부러졌거나 풀린 모양인데 부픔 가게 문을 다 닫아버린 시간이라 그 날은 틀렸고 다음 날 오전이나 되어야 차를 살릴 수가 있는 실정이다. 공양주 보살은 나에게 매달렸다. 주지스님에겐 진명스님을 뵈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잠시 시내에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하고 나온 모양이다. 내 차를 아내에게 주고 택시를 타고 들어가서 결승전을 보고 싶지만 내 차는 대형승용차라 아내는 자신이 운전하기에 너무 커고 고급이라 조심스럽다고 했다. 더구나 밤길이고 장거리다. 할 수 없이 두 보살을 뒤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내려가면서 결승전을 라디오로 들어야했다.
통도사에 도착하여 진명스님 방으로 안내하니 공양주 보살과 진명스님은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게 정이 든 사이인 줄은 미처 몰랐다. 공양주 보살은 진명스님께 드리려고 뽁은 땅콩이며 참깨강정을 비롯하여 각종 견과류를 한 보따리 풀어놓았고 진명스님은 자비심 보살 손목에 향나무로 만든 것이라며 단주 하나를 걸어주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재회를 마치고 다시 두 보살을 태우고 밤길을 달려 절에 가서 공양주 보살을 내려주고 집으로 왔다. 뜻하지 않게 오밤중에 통도사를 다녀와서 축구 결승전은 못 보았지만 기분만은 홀가분했다.
통도사에 길을 터니 뜻하지 않게 또 가게 되었다.
군대 동기 가운데 구미에 세 명이 산다. 훈련소부터 자대까지, 전역신고까지 같이 한 사이고 구미 바닥에 같이 살고 있으니 엄청 친한 사이다. 나랑 이웃인 의료보험 공단에 다니는 친구와 전선회사를 다니다가 조기퇴직하고 타이어 가게를 하는 친구다. 헌데 타이어가게를 하는 친구가 일찍 둔 아들이 일찌감치 장가를 가는데 결혼식을 양산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왜 양산이냐고 물으니 며느리가 될 신부의 집이 양산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결혼식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을 해야 했다. 우리 셋만 친한 게 아니라 여자들이 더 친해서 계를 모아놓고 더 자주 모이는 사이다. 결혼식 날 혼주인 타이어 가게 친구가 전세 버스를 맞추어 놓았지만 우리 부부는 의료보험 공단에 다니는 친구 내외와 그 친구의 차로 다녀오기로 했다. 이유는 술 때문이다. 우리 내외와 그 친구의 아내는 결혼식이나 모임에서 한잔씩 하는데 그 친구만은 술이라곤 한 잔도 입에도 못 댄다. 술이라고 이름이 붙은 건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댔다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온 몸이 벌게지며 이상한 반점이 생겨 긁어대기 시작하는 특이한 체질이다. 그 친구에겐 불행이지만 이웃에 사는 우리에겐 그런 행운이 없다. 하여 그 친구는 가끔씩 있는 우리들의 나들이에 전용 기사노릇을 한다. 가로수의 벚꽃이 분분한 봄날 일요일이었는데 우리는 시간에 맞추어 출발을 해서 결혼식을 보고 뷔페음식을 양껏 먹었다.
넷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반주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그 친구의 아내도 안주가 좋다며 홀짝홀짝 거들어서 한 병씩 셀프로 가져다 먹은 게 세 병이었다. 얼큰한 기분으로 나오니 그 친구의 아내가 양산에는 뭐가 유명하냐고 물었다. 통도사가 유명하다고 아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내의 대답이 시큰둥한 이유는 그 친구 아내가 독실한 성당댁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결혼식을 갈까? 성당을 갈까? 엄청 갈등을 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양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결혼식은 가급적 토요일에 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던 그녀였다. 아내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소리를 했다.
-우리 온 김에 통도사 구경이나 하고 가요.
-정말이야? 술기운에 하는 말 아니지?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못을 박았다.
-그래. 절에 가는 것이 아니라 통도사 구경하는 거야.
그 소리를 뱉는 친구의 아내가 얼마나 고와보였는지, 그 봄날 어울리지 않게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통도사로 가서 친구 아내에게 내가 아는 통도사를, 역사를 더듬어가며 다 안내해 주었다. 내가 터득한 요령으로 금강계단 안에도 우리일행 네 명만 감쪽같이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었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까닭에 나는 사진을 안 찍었지만 친구 아내는 휴대폰으로 내가 지목하는 모든 경관을 다 담았다.
참배계획만 세우면 불발이 나던 통도사, 그렇게 벼르던 통도사에 007작전으로 길을 터니 올 봄에만 세 번을 다녀왔다. 지금은 어떤가. 가지 않고도 앉아서 통도사를 매일 본다. 통도사에서 찍은 사진을 노트북 바탕화면에 띄워놓았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켤 때마다 통도사를 보는 것이다. 금강계단 뒤에서 찍은 사진을 일주일 또 적멸보궁이란 현판을 일주일, 실증이 나자않게 바탕화면을 자주 바꾸는데 사진을 고르다보면 다 통도사 사진이다. 오늘 새벽에 또 바탕화면을 바꾸었다. 여태까지 곡선이 유연한 통도사 법당의 기와지붕을 띄워놓고 있었는데 금강계단 모서리에 찍은 사진으로 바꾸었다. 바탕화면 바꾸기를 클릭하자 철거덕 금강계단이 열리며, 머릿속에 아련히 향내가 일며 숙연해지는 게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기분이다. 바탕화면으로 금강계단을 띄워놓고 합장을 하고 예물을 외며 새벽기로로 하루를 연다.
감성이 예민한 나는 합장을 하고 입술만 달싹이면서 속으로 예불을 외며 금세 엑스터시의 영역에 발을 담근다. 통도사가 있어 오늘도 새벽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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