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독서 모임 금빛수다에서
강현만 시인의 〖따따부따〗
금빛수다는 책과 관련 수다 떠는 모임이다. 다양한 세상사 관련 수다가 오고 간다. 11월 15일 종각역 근처에 있는 ‘온’에서 시집 『내 가슴이 하늘에 녹아 불타는』, 산문 『사랑이 아니라면 분노하고 투쟁할 이유가 무엇이랴』 출간을 축하하는 조촐한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떨었던 수다를 나누고자 한다. 두서없이 여러 수다를 한 중에 같이 나누었으면 하는 이야기의 몇 대목이다.
‘한강 그리고 책 구매와 쓰기’
우리는 한강의 노벨상 문학상을 축하했다. 박수와 환호로 기쁨을 나누었다. 한강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00만 권을 훌쩍 넘게 팔렸다. 서점에서 독자에게 책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행복한 비명이다.
대형출판사, 소위 말하는 메이저 출판사를 통하지 않으면 작가(시, 소설, 수필 등)의 책은 쌈짓돈 들여서 잔치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sns 등 한강에 관한 책 소개와 후기가 많이 올라온다. 좋은 일이라 기쁜 중에도 자기 주변도 돌아보는 의리와 친절한 예의가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기 주변에 가까운 사람의 책은 읽을거리가 없거나 수준이 낮아서 사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크게 할 말이 없다. 노벨 문학상 이전에 한강의 내공을 알아보고 책 소개와 후기를 올렸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유행처럼 휩쓸리는 파도에 나도 함께하고 있다는 위로도 좋다.
안타까운 것은 해외여행, 먹거리 자랑 등 돈 좀 있는 자랑은 은근히 하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의 책에 대해서 매정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책은 주는 것 아니야 하는 태도를 보이는 모습도 있다. 씁쓸한 일이다. 책 한 권 사는 값은 그리도 아까운가 말이다. 자고로 책은 읽지 않아도 사고 보는 일이라 하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형편이 어려운 처지는 그냥이라도 책을 주고 싶다.)
대형(메이저) 출판사를 통하지 못하면서, 이래저래 공을 들여 책을 내는 지인이 주변에 있다면 응원하는 마음과 의리를 담아서 책 한 권쯤 구매하는 친절한 예의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독서·인문학이라는 카카오톡 단체방의 구성원이, 친구가, 지인이, 모임의 구성원이 낸 책을 사주고 읽었다고 자랑하는 친절한 애정의 따스한 장면은 어떨까?
AI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쓰면 책이 나올 수 있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원고만 있으면 된다. 그간에 써 놓았던 글이라도 모으면 된다. 글을 쓰고 책을 내자.
‘가난과 소외, 약자와 가까이 - 소수자, 비주류, 이방인, 경계인 – 가는 삶’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당신은 왜 사는가? 무얼 위해 사는가?
‘불평등 계급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너무 뻔하고 쉽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그 자체로 전부이고 목적이다.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고, 넘치는 무언가를 가졌다면 그 여유와 능력이 가리키고 바라봐야 할 시선은 언제나 인민(민중)이다.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이다. 구속과 억압, 차별 속에 놓인 약자들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자는 지배계급 권력자에 대해 차고 넘치는 인정이다. 그게 귀족이든 임금이든 자본가든 대통령이든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에서 넘치는 부와 권력을 향유한다. 자본과 권력을 좀 더 갖겠다고 싸우는 지배계급의 종을 자초할 일이 무에 있겠는가?
다들 보면 똑똑하고 잘났다. 민(民)이 주인이라는 천부인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자기가 빨아대는 정치인과 정당에 절대 선을 부여한다. 까마귀 고기라도 삶아 먹었는지 몇 년 주기로 바뀔 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고의 진영논리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편이면 무조건 옹호하고 상대편이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 흡사 무조건적인 빠와 좀비의 모습이다. 민이, 당신이, 주인이라면 자본과 권력의 노예를 자초하는 행태는 끝내야 한다.
그 넘치는 열정과 의지가 있다면 그 시선은 언제나 가난과 소외된 자들, 사회적 약자들에 머물러야 한다. 아부와 굴종의 비굴한 처세,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세가 아니라 어느 모임, 단위든 약한 곳에 시선이 머물러야 한다. 이 시선으로부터 저항과 투쟁이 발동되어야 한다.
‘비우고 버리는 삶의 지향’
우리는 넘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이면 기본이라고 이야기하는 의식주가 썩어 넘치는 세상이다. 엄청난 돈을 들여 치우는데도 처치 곤란한 상태다. 이런 풍요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다른 한쪽에서는 살지 못하겠다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불평등 계급사회의 모순은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서 해결하고 극복해야 한다. 역사는 평등한 세상을 향해 오대양 육대주에 피를 흥건히 뿌려왔다. 흐르는 물길이 멀다고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필요 이상의 넘치는 탐욕은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우선 들이댈 수 있는 잣대가 ‘돈’이다. 그 사람 행위의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이면에 돈을 갖다 비춰보면 된다. 어떤 자리와 처신에 있어서 이면에 돈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지배계급에 복무하고 차별을 전제하는 종교라면 마땅히 버려야 한다. 가진 자를 위해 거름이 되는 종교는 있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 사상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 사회적 약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쓸데없는 사상과 노선도 마땅히 버려야 한다. 관료주의와 패권주의에 찌든 당이라면 그 당은 어디에 쓸 것인가?
민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전부다. 민이 주인이라면 주인으로서 지위와 역할을 올곧게 가져가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는 민이 주인인 세상이다. 말이나 글자로 쓰여 있는 주인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민이 위치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조합, 시민단체, 어떤 모임이든 민(조합원, 회원)이 주인으로서 지위와 역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위원장, 회장 등 장이 주인이 아니다.
풀, 민초가 주인으로 만들고 서는 세상에서 내가 돈과 권력, 자리와 명예에 집착하고 탐욕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이비, 사기다. 직접민주주의는 민이 주인임을 형식과 내용, 본질과 현상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