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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종소리... 여운이 길게 울려 퍼지는 고요한 그 종소리가 지금도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릴 때면 아련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고적하게 들려온다.
먼 옛날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그 어느 성탄절 날 토계 예배당 사람들이 넓은 마루 바닥에 소복이 모여 앉아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정겹게 부르던 그날의 잔상들이 오늘처럼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왠지 쓸쓸하게 떠오른다.
휘날리는 하얀 눈발 속으로 잊혀진 교회당의 모습들이 까마득한 세월의 미로 숲을 헤치며 다시 기억 속으로 나오고 첨탑 위에 높이 매달린 십자가의 소슬한 풍경들도 그립게 다가온다.
♤그림 설명(caption) : 은은한 종소리... 여운이 길게 울려 퍼지는 고요한 그 종소리가 지금도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릴 때면 아련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고적하게 들려온다. 붉은 점이 있는 곳이 반세기 전 토계 예배당 자리였다. 필자가 반세기 전에 존재 했던 "토계 번화가"를 스케치 한 그림이다. 그림 속에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죄다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다소곳이 소담스럽게 눈을 맞고 있는 고요한 시골 교회의 전경이다. 유년시절 우리 도산골 토계 예배당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사진1~3은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위치한 덕천장로교회 전경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및 덕천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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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과 예수 할머니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던 고적한 하계 마을 그리워..."
토계 번화가 1번지 시작 지점인 도산지서에서 버스 정류소 방향으로 내려가면 백운이발관 맞은편 아래로 면사무소와 석유집이 이어져 있었다. 석유집 밑에 있는 기름 창고를 지나 계속해서 변두리로 100여 미터를 내려가면 길 건너 오른편에 회백색 목조식 예쁜 예배당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배당의 마당 서쪽 담장에는 높은 첨탑 위에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었고 첨탑 아래 양철 지붕 속에는 큰 청동종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었다. 청동종은 매일 아침 도산골 사람들을 깨우고 '일상을 선하게 시작하라'는 듯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주었다.
도산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예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분강촌(분천동, 부내) 동네에서 토계에 있는 예배당에 나갔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교회를 다니셔서 예수 할머니라고 불렀다(조모님의 택호는 구레실댁). 교회당은 도산우체국 약간 위에 길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 부내 우리집과는 학교 거리와 거의 같은 십 리 길이었다. 주일마다 교인들은 넓고 큼직한 예배당 마루에 빼곡히 앉아서 엄숙하게 예배를 보았다. 연로하신 목사님께서는 예배 시간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여러번 말씀하시며 울다시피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목사님께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은 죄가 참 많으신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덜컹 겁이 났다. 지난 봄 뒷동산에서 참꽃을 닥치는 대로 꺾어서 두견주를 담근 죄, 통소 여불대기에 고인 저수지에서 버들뭉치와 붕어를 마구 잡은 죄, 물레방간 강섶 왕버들 엉클어진 뿌리 사이에서 피래미와 흑조개 가족들을 못살게 굴은 죄, 한여름 양수장 아래 물섶에서 사발무지로 수루매기 어미들을 잡아서 새끼들과 생이별 시킨 죄, 학용품을 산다면 할머니를 졸라서 받은 돈으로 산도와 오란씨를 사먹은 죄, 뒷 담벼락 살구나무에 탐스럽게 익은 살구를 먹으러 온 다람쥐에게 돌을 던져 괴롭힌 죄, 기와집 처마에 제비가 애써 지은 집을 장대로 후빈 죄, 달걀을 낳던 암닭을 밀어내고 달걀을 빼앗은 죄, 학교에 가기 싫어 삼바꼬 아래 토째비골에서 중간학교 한 죄, 알분이 아지매 우표 수집책에서 우표를 훔진 죄, 선돌할배네 수박밭에서 수박 서리를 한 죄, 정옥이 아지매네 복숭아 밭에서 복숭아를 따먹은 죄, 구당나무 아래 영주할매네 땅콩밭에서 땅콩을 마구 캐 먹은 죄... "으앙~" 나 또한 만만찮은 온갖 죄들이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예배 시간 동안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온 몸에 식은 땀이 줄줄 났다. "아~ 이제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천당에는 다 갔구나" 하며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불안한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자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용서를 빌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목사님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지으신 것 같았다. 주일날 설교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큰소리로 죄를 용서해 달라며 예배를 끝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연신 부르시며 사정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무척 안돼 보였다. "연세가 많으시니 나보다 지은 죄가 훨씬 더 많으시겠지" 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할머니한테 목사님께서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으셨냐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또 다른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지은 죄가 많이 있다'고 하며 '그 용서를 대신해서 빈다'고 하셨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 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에 태어난 기억도 전혀 없는데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워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고 이쁘게 살아야겠다고 주님과 목사님과 할머니께 마음 속으로 약속하며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러다 보니 숙제도 잘 해 가고 삽지껄 담벼락 아래 만들어 놓은 채송화ㆍ봉숭아 꽃밭에 물도 잘 주고 감실이 안에 기르는 집토끼들에게 써구새(씀바귀)도 잘 뜯어다가 갖다 먹이고 다람쥐과 제비들에게 행악을 부리는 일도 없어지고 뒷산에 참꽃도 안 꺾고 분강에 고기들을 괴롭히는 일도 점점 줄어 들었다. 어느덧 일기장에는 항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말로 끝을 맺는 문구가 많아졌다. 그러면 2학년 담임인 안계화 선생님과 3학년 담임인 장낙진 선생님께서 그대로 다 믿어주시며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다섯게 포개어 그려주시고는 그 위에 "참 잘 했어요" 라는 예쁜 칭찬 글씨를 써 주셨다. 그렇게 사인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참 좋아졌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유년시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물레방간 둔덕과 양수장 앞 파란 잔디 언덕 그리고 솔밭과 통소, 구여울 주변에서 보냈다. 밀양대는 축구와 야구, 권투, 이까놀이(오징어놀이), 감자꾸지를 할 때만 찾았다. 어른들이 안보이는 외딴 그곳이 아이들이 놀기에는 편했다. 어느 때는 양수장 아래 푸른 강변에 앉아서 손을 턱에 고이고는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는 나중에 무엇이 될까. 달리기 선수가 될까. 선생님이 될까. 구여울을 지나 흘러가는 저 강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다다르는 먼 산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엄마 아부지는 왜 우리만 부내에 남겨두고 목실골로 가셨을까..."
순결한 마음과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를 써 갔을 아름다운 소년의 지난날의 모습들이 적이 떠오른다.
눈이 펑펑 내렸다. 예주님의 생일인 성탄절이었다. 예배당 사람들이 모두 들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다. 나는 색종이로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루돌프 사슴을 그리고 교회당 누나들은 예수님을 그려서 작은 소나무에 붙이는 일을 맡았다. 간단한 일이었다. 교회에서 나눠준 다양한 색종이에 별과 사슴을 먼저 그리고 나서 크레용으로 색깔을 칠한 후 오려서 노끈으로 소나무에 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별들과 사슴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반짝이는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다. 하늘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교회 마당에서는 마실에서 놀러 온 백구들과 참새들이 함께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예배당 안에서는 고요히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이 온 도산골과 하계 마을로 가득히 내려오는 은혜롭고도 축복받는 성탄절이 되었다.
♤거실에 있는 구약성서를 그린 이 그림을 볼 때면 토계 예배당과 예수 할머니가 그립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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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할머니는 밤마다 호롱불 아래서 돋보기를 쓰시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번갈아 읽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찬송가를 부르시고 주무셨다. 나는 예수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곤 했다. 거의 매일 이런 날이 반복 되곤 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이 찬송가는 예수 할머니께서 제일 즐겨 부르시는 노래였다. 그래서 나도 1학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노래였다.
3학년 어느 늦겨울 주일날 예수 할머니는 예배당 종이 울리는 시각에 맞춰 주님께로 가셨다. 편안하신 얼굴로 임종을 맞이하셨다. 얼마 전에는 잠자리에서 "저 하늘에 가면 모두 다시 만나게 되니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해 놓고서는 할머니 품 속에서 한참 울었다. "할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때는 기도를 많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교회 사람들이 모두 와서 분홍색과 붉은색을 입힌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꽃상여가 되었다. 목사님께서 우리집 담장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 펴 놓은 큰 멍석 위에 놓인 상여 앞에서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과 도산골 교인들을 바라보며 영결예배를 올리신 후에 찬송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불렀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여러 번 부를 때 아버지께서 소리없이 흐느끼며 많이 우셨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슬퍼 보여서 나도 따라 울었다.
그리고 꽃상여는 집을 떠나서 마릉당골로 갔고 할머니께서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얼마 후 엄마가 할머니께서 꿈 속에 나타나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시며 손을 흔드시는 것을 보았다고 가족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주님 나라로 가셨다.
예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후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부내에서 혼자 다닐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주님께로 가신 후 등하굣길에 교회 앞을 지나갈 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우체국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교회당 앞을 후다닥 뛰어 지나가곤 했다. 교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잘 참았다.
은은한 종소리... 여운이 길게 울려 퍼지는 고요한 그 종소리가 지금도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릴 때면 아련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고적하게 들려온다. 먼 옛날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그 어느 성탄절 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예배당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정겹게 부르던 그날의 잔상들이 오늘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왠지 쓸쓸하게 떠오른다. 휘날리는 하얀 눈발 속으로 잊혀진 교회당의 전경들이 까마득한 세월의 미로 숲을 헤치며 다시 기억 속으로 나오고 첨탑 위에 높이 매달린 십자가의 소슬한 풍경들도 그립게 다가온다♧.
♤노래 설명(caption): 그 해 늦겨울 어느 공일날 토계 예배당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천사의 노래소리가 분강촌에서 희미하게 멎어질 무렵, 예수 할머니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토계 예배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수 꽃봉오리를 만들어 상여에 걸쳤다. 꽃상여가 되었다. 우리집 삽지껄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 멍석을 여러 개 펴고 꽃상여를 올려 놓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를 때는 소년도 따라 부르며 울었다. 먼 옛날 할머니를 떠나보낼 때 불렀던 그 노래를... 할머니를 그리워 하며 다시 불러 보았다.
♤위 사진(caption): 성탄절 날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목사님과 아이들이 늙은 청동종의 밧줄을 함께 당기며 행복해 하고 있다. 참새들과 강아지들도 주님의 축복 속에서 성탄절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다. 예배당 속에는 은혜로운 찬송가가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아들 경이가 아빠의 상상에 맞게 추억 속의 전경을 그림으로 그려 주었다. 1972년 성탄절 날 토계 예배당의 전경이다).
♤아래 사진(caption): 사진 오른편 둘째줄 모자를 쓴 애기의 바로 왼편에 계신 분이 필자의 할머니(조모님 함자는 이기수)이다. 1950년대 말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고모님이 살았던 반야월에 잠시 사신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반야월교회를 다니셨다. 할머니는 1960년대초 분천동으로 다시 오셨다. 도산국민학교에 다닐 때 할아버지를 따라서 반야월에 있는 고모님댁에 가면 주일날 고모님 가족과 함께 반야월교회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 기억에도 반야월교회의 건물이 엄청 크고 마당도 넓었다. 50여 년 전인데도 그곳 큰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기도를 올리던 모습이 어렴풋하지만 전설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운 추억들... 그리운 사람들... 위에 할머니가 나온 사진은 토계 예배당이 아니고 반야월교회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할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예수할머니라고 불렀다. 고모님들과 할머니만 기독교를 믿고 할아버지(조부님 함자는 이유석)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는 불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다.
수몰 전 1950년 당시(필자가 태어나기 전) 예수 할머니께서 우리 마을 부내 동네에 전도하신 이력도 있었다는 사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밝혀졌다. 1950년대 부내(분천동)에서 물레방간을 운영하셨던 풍산 할배(함자는 이희원)의 자제 되는 유걸 할배(77세ㆍ"서래섬에 달이 뜨다" 저자)가 최근 필자의 에세이(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그 옛날... 토계 예배당 성탄절 그리워)를 읽으시고 보내온 옛 사연을 옮겨본다. "예수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도 오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 옛날 우리 집에도 예수 할머니가 오셔서 밤새도록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신기했던 것 같네. 왜냐하면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으니까..."
예수 할매는 성격이 부드럽고 별로 말씀이 없으셔서 전도 활동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때 풍산 할배댁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면 짐작건대 다른 집에서도 아마 했으리라 여겨진다. 할머니께서 기독교의 복음을 유교의 본 고장이자 본 무대였던 우리 부내 동네까지 전했다고 생각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유년시절 할머니와 함께 다닌 예배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는 결혼 후 형제자매 가운데 혼자서만 교회를 다니고 있다. 서래마을에 살았던 아내 집안은 부모님께서는 반포성당에 나가셨고 아내와 동생은 남서울교회에 다녔다. 아내는 모태 신앙자이다.
♡위 사진은 우리 가족이 다니는 노원교회 시온 성가대가 성탄절을 맞아 캐럴 송(Carol song)을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아내는 앞줄 제일 오른편에 서 있다(2023.12.24). 아래 사진은 성탄절 캐럴 송 오르골 동영상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첫댓글 메리 크리스마스~~
그때는 그랬지
눈이 펑펑오면 마음 들떠 너무 좋았지
지금과는 사뭇 다르네
이제는 눈이 오면
부모~자식~ 다칠까봐 걱정이
도로 찻길 미끄러워 질까 걱정이
걱정이 앞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