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수영 장대 순교성지
주소: 부산시 수영군 광안4동 556-1 교구 부산교구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일컫는다. 조선 시대에는 군영의 연병장 정면에 장대가 있었고, 연병장에서는 군사들의 열병 훈련과 사열이 있었으며 간혹 중죄인을 처형하는 사형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부산시 수영구 광안 4동 546-4번지.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수영 장대골에서는 병인박해 당시 동래의 전교회장이던 이정식 요한(李廷植, 1795-1868년)을 비롯한 8명의 천주교인들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처형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항구 도시인 부산에는 병인박해 당시 광안동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있어서 붙잡혀 온 천주교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하곤 했다.
이때 처형된 교인들의 목은 장대 위에 매달아 두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경계심과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이 경탄하여 구전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형을 하는 수영 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마치 잔칫집에 나가는 기쁜 표정으로 순교를 했다.”고 한다.
1988년 성역화를 마치며 건립한 수영장대 여덟 순교자 기림비.이때 순교한 이들로는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 마리아 그리고 조카 이삼근 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옥조이 바르바라, 이정식의 대자인 양재현 마르티노(梁在鉉, 1827-1868년) 등 8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에서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올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서 이삼근과 이관복은 가족관계와 이름과 세례명 연결이 주교회의 편찬 약전과 수영장대 및 오륜대 순교자 성지의 안내문이 다르다. 여기서는 약전의 설명을 따른다.]
이정식 요한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교련관(敎鍊官)이 되는 등 여러 소임을 두루 거쳤다. 그러다가 59세의 나이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무관직을 사임하고 첩을 내보내며 가족과 이웃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는 등 누구보다 수계와 전교에 열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동래의 전교회장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다하던 중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교우들에게 티를 내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몸을 피했다가 1868년 봄 울산 수박골로 다시 피신했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심해져 동래뿐 아니라 인근 울산 · 언양 · 기장 등지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동래 포졸들 역시 갑자기 없어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았고, 마침내 울산에서 이정식의 가족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동래로 압송되었다. 동래 옥에서 이정식은 앞서 동래에서 체포되어 갇혀 있던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장대돌과 여덟 순교자 위패. 광안 성당은 2004년 이정식 등 8위의 위패를 성지에 안치하였다.동래 부사는 그들을 47일간 옥에 가두어 두고 여러 번 심문하며 형벌을 가하였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고, 다른 교우들의 사는 곳 역시 발설하지 않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구주원(具冑元)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수영(水營)으로 옮겨진 이튿날 구주원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혹형을 가한 다음 배교하기를 강요했는데 그들 중 세 사람은 혹형에 못 이겨 배교하여 방면되었다. 그러나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부부 등 8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하여 1868년 9월 창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 순교복자기념관(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뒷동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 건립하였다.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들에 대한 기록은 “일성록”(日省錄)과 1951년 8월 20일 현장 목격자인 두 증인의 증언 그리고 1977년 7월 17일 당시 광안 본당 주임신부에 의해 이곳에서 발굴된 장대석 8개, 기와 조각, 동전 등으로 이 같은 증언이 뒷받침되었다.
2004년 광안 성당은 성지에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14처, 8위 순교자의 위패를 안치한 후 새 성물 축복식을 가졌다.
이에 광안 성당은 1987년 6월 신자들의 성지 조성 헌금으로 이곳의 땅 1백 60여 평을 확보하고 이듬해 7월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성역화에 착수하여 공사를 완공하고 그 해 9월 30일 순교 기념비 제막식 및 현양미사가 교구장 이갑수 주교에 의해 거행되었다. 성지 개발을 맡고 있는 광안 성당은 2004년 7월 5일 성지에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이정식 등 8위의 위패를 안치한 후 교구장 정명조 주교의 집전으로 새 성물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6일)]
복자, 이정식 요한(5.29) 기본정보
이정식(李廷植) 요한(Joannes)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 요한 회장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이삼근 베드로는 이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이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림으로써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당시 이정식 요한의 나이는 73세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이정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5.29) 기본정보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며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양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