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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결코 억지로 그릇을 부수거나 끊지 않으신다. /
오히려 그 그릇의 연약함을 인정하시고 그 상태에 맞게
조절하며 인도하신다.
-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이사야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심"은
주님께서 순진한 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감각적인 신성한 진리’를 해치지 아니하실 것임을 의미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심"은
주님께서 순진한 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사랑의 작은 선함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시작하는 신성한 진리’를
파괴하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AE 627)
갈대는 감각적인 진리 또는 말단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같은 예언자 말씀에서처럼
자연인들, 심지어 악한 자들에게도 존재하는 진리이다.
또 “상한 갈대”(bruised reed)는 인간의 연약하고 상처 입은
자연성이나 감각적 상태를 상징하고
“꺼져가는 등불”(smoking flax)은 신앙이 약해져 가거나
진리의 빛이 거의 꺼져가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꺾지 아니하며… 끄지 아니하고”는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성과 감각적인 자연성을
억압하거나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시며 그들을 구하고 변화시키시는 방식, 즉
선으로 전환하고 회복하시는 섭리의 활동을 뜻한다.
이 말씀에서 보듯 주님은
선과 진리의 작은 부분이라도 지닌 사람들을 결코 내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을 그들의 상태와 수용력에 따라
선으로 구부리시고 돌이키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들어 태어나기 때문에
선을 담는 진리의 그릇들이 본래의 방향에서 벗어나
뒤틀려진 형태로 있는데
이런 상태가 바로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이다.
진리는 있지만 생명을 받기에는 너무 약하고 휘어진 상태인 것이다.
주님은 그 그릇을 꺾지 않으시고 안에서부터 부드럽게 바로잡으신다.
주님은 결코 억지로 그릇을 부수거나 끊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그릇의 연약함을 인정하시고 그 상태에 맞게 조절하신다.
이에 대해 천비 3318 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은 생명 그 자체이며,
그 생명이 흘러들어와 진리의 그릇들을 바로잡는다.(reset)’
즉, 주님의 사랑은 상한 갈대의 섬세한 결을 따라 들어와
그것을 부드럽게 펴시며
꺼져가는 등불의 약한 불씨를 살리시듯
우리 안의 진리의 형태들을 회복시키신다.
이것이 주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이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결코 침해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손길은 인간의 자유 안에서 부드럽게 역사하시며
인간의 내면 상태를 따라 구부리시되 부러뜨리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우리의 자유 안에서,
우리의 허락과 작은 반응을 따라 점진적으로 조절(modification)하신다.
이것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이 자유 안에서 그를
선으로 굽히시는 역사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선)이 인간에게 충분히 유입되기 위해서는
선을 받는 진리의 그릇들이 부드러워져야 하는데
그 그릇들을 부드럽게 하는 과정이 곧 시험과 시련이다.
천비 3318 에서 이 그릇들은
시험(temptations)을 통해 부드러워지고
그 후에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순응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즉,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험은 파괴가 아니라 조절의 과정이다.
그것은 꺾임이 아니라 굽힘이며 끊어짐이 아니라 회복의 움직임이다.
상한 갈대는 시험과 시련 속에서 부드러워지고
꺼져가는 등불은 미약한 숨결 속에서도
주님이 불어넣으시는 생기로 다시 살아난다.
그 결과 마지막에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부드러워진 그릇 안으로
주님의 선이 다시 흘러들어와 진리를 생명 있게 만든다.
그 순간 진리는 더 이상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서가 되고
그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곧 상한 갈대가 새로 일어나고
꺼져가는 등불이 다시 타오르는 순간이다.
그 불은 더 이상 인간 자신의 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타오르는 불이다.
주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이유는
진리의 그릇이 왜곡되었을지라도
여전히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주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 미약한 불씨는 여전히 주님께 응답할 수 있는
자유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은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가장 가까이 임하는 자리이다.
- 인간의 마음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기적 구조(organic substances)로 되어 있고
진리는 단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흔히 말하는 생물학적인 장기나 세포를 뜻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적 실체(spiritual structural reality)를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형태(form)와 구조(structure)를 가진 실체,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영적 차원의 수용 용기(receivers, 그릇)를 가리킨다.
(AC 4223, 3318)
이 유기적 구조가 뒤틀린 것이 바로 상한 갈대의 상태로
뒤틀렸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신앙과 사랑이
악과 거짓으로 인해 본래의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합리적인(rational) 사람과 자연적인(natural) 사람,
이 두 층으로 구성된 마음 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영적 그릇들이 있다.
그들은 ‘신체적 뇌세포’가 아니라 ‘가장 미세한 유기적 실체’들로서
영적 차원에서의 생각과 감정이 작용하는 형태적 조직을 뜻한다.
따라서 이 ‘유기적’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받기만 하는 그릇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수용체(living receptacle)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다.
즉,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때
그 안의 구조들은 형태와 상태를 바꾸며 그 생명을 지각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들이 살아 있는 이유이다.
진리는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를 때마다 반응하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형태(organic form)다. (AC 3318, 3507)
좀 더 쉽게 표현해본다면
‘유기적’이란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살아 있는 토양과 같다.
흙이 죽은 모래라면 생명이 자랄 수 없다.
그러나 유기물이 함유된 흙은
물과 빛을 흡수하여 씨앗을 자라게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적 구조 또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유기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여기서 ‘유기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올 때 거기 응답하고 반응하는
살아 있는 영적 구조를 뜻한다.
인간의 마음, 곧 합리적 영역과 자연적 영역은
기계처럼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때마다 그 빛과 열에 따라
변화하고 반응하는 그릇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은
주님의 생명을 수용하며 천국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영적 조직체,
즉 생명의 유입에 끊임없이 응답하는 천국의 통로로 존재한다.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기적 구조(organic substances)로 되어 있는 까닭에
이 유기체가 온전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자유롭게 흐르지만
악과 거짓이 들어오면 그 구조가 뒤틀리거나 상한다.
상한 갈대는 곧 진리의 수용그릇이 상한 상태,
즉 마음의 합리적, 자연적 유기체가 손상된 상태를 뜻하고
꺼져가는 등불은
선의 생명이 희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AE 627)
그런데도 주님은 그 유기체를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신다.
이는 곧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생명의 기능,
곧 미세한 유기적 반응력을 보존하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섬세한 유기적 실체들 안으로
생명을 흘려보내신다.
이 생명의 흐름은 아주 부드럽고 자유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래서 상한 영혼이라도 주님은 결코 강제로 꺾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 유기체의 흐름을 되살리신다.
주님이 유기체를 꺾지 않으신다는 것은
생명이 그릇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다시 세운다(reset)’는 의미,
즉 다시 정렬시켜(재조정) 새롭게 생명을 흐르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심”의 실상이다.
갈대는 연약하고 쉽게 부러진다.
그런데 주님은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생명의 관통로(organic passage)를 보시고
그것을 중심으로 새 생명의 흐름을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등불)는 사랑의 열이 사라져가는 상태이다.
꺼져가는 심지는 마음의 사랑,
곧 선의 뜨거움(heat of love)이 거의 사라진 상태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모든 유기적 구조 안으로 흘러들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즉, 주님은 언제나 사랑을 보내고 계시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유기체의 상태가 식었거나 막혀 있어서
그 뜨거움이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삶의 무게와 실망 속에서 신앙의 불이 식을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작은 불씨를 보시고
그것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자유 안에서 부드럽게 굽히시며 회복시키신다. (AC 5986)
비유하자면, 강한 빛을 억지로 받아들이면 눈이 멀지만
천천히 빛에 익숙해지면 시야가 열리듯
주님은 우리의 상태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생명을 조절하여 흘려보내신다.
그분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강제로 세우지 않으시고
조용히 자라도록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 안에 선을 담는 진리는
단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그때 주님이 하시는 일은 파괴가 아니라 재조정(reset)이다.
상처 입은 그릇이라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내면의 생명질서를 따라 그것을 새롭게 배열하신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
이것이 곧 주님의 섭리이다.
섭리는 때로 고통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우리의 유기체가
다시 정렬되는 은밀하고 부드러운 영적 수술이다.(AC 6481)
이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시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은 유기적 반응을 수용하는 것이다.
회복은 강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주님은 언제나 자유 안에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할은 단 하나,
주님의 유입을 막지 않는 것,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자기 안의 깨어진 그릇을 주님께 열어드리는 것,
결국 자유 안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신이 고집하는
자기 사랑과 자기 지식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즉,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요, 순복이며, 주님께 ‘상한 갈대’를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또 이것이 곧 유기적 반응인 것이다.
우리가 자기 생각과 욕망으로 굳어 있으면
그릇은 닫히고 주님의 생명은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마음을 여는 순간
그분의 사랑이 그 미세한 유기적 통로를 따라 다시 흐른다.
그때 상한 갈대는 다시 일어나고
꺼져가던 등불은 다시 빛난다.
이때 주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다만 등불 안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기름을 채우시며
불을 다시 되살리신다.
그 기름은 선이고 그 불은 진리 속에 들어온 생명의 빛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이 진리와 결합되는 순간,
곧 주님이 우리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루시는 거룩한 질서이다.
- 선이 들어와 그 그릇에 ‘형태’를 부여하고 ‘상태’를 변화시킬 때
비로소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된다.
‘.. 시험으로 어느 정도 굴복되고 부드러워지면
그 그릇들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생명에 순응하게 되고
합리적인 것 안에서 먼저, 그 다음 자연적인 것 안에서
선이 진리들과 결합하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진리들은
다름 아닌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의 변화를 지각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각들은 흘러들어오는 생명의 산물이다..’(천비 3318)
어렵지만 이 표현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의 내면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가를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구절 중 하나,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시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선은 생명 그 자체로
이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며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진리는 그 생명을 담는 그릇이다.
이 그릇은 곧 우리의 사고(thought), 이해(understanding),
개념(concept), 기억 속의 지식(memory-knowledge) 같은 것들이다.
선이 들어와 그 그릇에 형태를 부여하고 상태를 변화시킬 때
비로소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된다.
‘지각(perception)’이란 바로 그 변화의 감지이다.
이는 진리가 스스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진리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그 작용의 결과가
‘지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각의 근원은 선이고 지각의 매체가 진리인 것이다.
(AC 1616, AC 3504)
즉, 진리는 눈이고, 선은 빛이다.
눈이 스스로 빛을 내는 건 아니지만
빛이 들어올 때 비로소 사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 이해를 돕기 위한 세 편의 참고 글들은 아래)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은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대로 인간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반드시 담길 그릇을 필요로 한다.
그 그릇이 바로 진리다.
진리는 선을 받을 준비가 된 그릇이다.
같은 진리를 들어도
어떤 이는 생명을 얻고 어떤 이는 무거운 짐을 얻는다.
그런 진리에 선이 들어와 그 진리의 그릇에
형태를 부여하고 상태를 변화시킬 때
그 진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
이 경우 ‘형태’란 외형이 아니라 방향과 목적으로서,
사랑이 흘러가도록 배열된 질서이다.(AC 4104, DLW 66)
선이 들어오기 전까지 진리는 떠다닌다.
정보처럼 머물 뿐이다.
그러나 선이 들어오면 그 진리는 방향을 갖는다.
진리가 어떤 선택을 향하고 있는 순간
그때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삶을 이끄는 길이 된다.
이것이 형태가 부여된 진리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형태만 있어서는 사람이 여전히 괴롭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의 ‘상태’를 변화시키신다.
선이 들어오면 같은 진리가 부드러워진다.
상황은 변한 것 없이 여전히 어렵지만 옳다는 감각이 먼저 온다.
이때 진리는 강요가 아니라 내적 동의로 작동한다.
형태의 변화와 상태의 변화는
영적 뇌 안의 미세한 유기적 구조들의 재배열이다.
비유하자면 진리는 마치 악기의 현(絃)과 같다.
현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오직 주님의 손길이 닿아, 선의 호흡이 그 위로 흐를 때
비로소 아름다운 음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음의 울림이 바로 진리의 지각이다.
그 현들이 제각기 올바르게 조율될 때
아름다운 선율이 나온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사랑)은 연주자의 손과 같아
그분이 그 손길로 진리의 줄을 하나하나 ‘조율’하시며
그 음률(상태)을 변화시키신다.
그 결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천국적 화음으로 변한다.
‘형태의 변화’는 곧 그릇(진리)의 재조율,
즉 생각의 틀과 이해 방식이 바르게 정돈되는 것이고
‘상태의 변화’는 그릇이 생명을 받는 감응의 변동,
즉 그렇게 정돈된 틀 안에서
생명(선)이 더 잘 느껴지거나 덜 느껴지는 것을 뜻한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형태의 변화’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라보는
생각의 구조가 조정되는 것,
즉 진리라는 그릇의 모양이 바로잡히는 것이고
‘상태의 변화’란 그 그릇 안에 들어오는 생명,
곧 주님의 선이 어떤 강도로 느껴지느냐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과정이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수용(consent)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as if from himself)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 섭리의 법칙이다. (AC 2882, AC 2891)
즉,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명상해야 한다.
이것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진리 속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은 오직 주님께서 하신다.
생명을 불어넣는 일, 또는 ‘그릇을 바로잡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진리는 깨끗이 닦인 유리잔이고 선은 그 잔을 채우는 햇살과 같다.
인간이 할 일은 유리잔을 탁하게 하지 않는 것,
즉 악과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배우는 것뿐이다.
그러면 주님은 스스로 그 잔을 빛으로 채우시고
그 빛을 통해 우리 안에서 ‘지각’이 일어나게 하신다.
이를 순서로 나열해보면..
먼저 진리의 수용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기억 속에 저장함으로
선을 수용할 그릇으로 준비되는 단계다.
그 후 주님의 사랑(선)이 그 진리 안으로 흘러들고
그렇게 유입된 주님의 선이 진리의 형태와 상태를 재배열하게 되면
지각(perception)이 발생하는데
이는 선이 진리를 통해 빛나면서 그 변화가 인식되는 현상이다.
이 재배열에 의한 지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
새 생명(영적 인간)이 태어나게 된다.
선은 생명의 실체이고 진리는 그 생명의 형상이다.
선이 진리 안으로 들어올 때, 진리는 살아 있는 형태가 된다.
진리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선이 그것을 채울 때만 지각과 질서가 생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진리의 그릇을 준비하고
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AC 10109, TCR 567)
이 과정 전체는 주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조심스러운 조절과 구부림(bending and turning)의 과정이다.
인간에게 있는 진리의 그릇에
선이 들어와 거기 ‘형태’를 부여하고 ‘상태’를 변화시킬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된다는 것에
더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겠다.
형태(form)는 그 진리가 무엇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는지를 표현하고
상태(state)는 그 진리가 지금 어떤 기운, 온도,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표현한다.
즉, 선이 들어오면
진리는 방향이 바뀌고(형태) 작동 감각이 달라진다.(상태)
먼저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면..
형태란 진리가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다.
그것은 모양이 아니라 용도와 질서다.
또 형태가 사랑이 흘러가도록 배열된 질서라면
진리는 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형성된 구조다.
진리는 사랑의 흐름을 담는 그릇이다.
형태가 있다는 것은
이 진리가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 이것이 정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형태가 없는 진리는 죽은 진리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진리를 보자.
이 진리에 대해 ‘그래, 이상적인 말이지..’ ‘현실에선 불가능해..’
이런 반응은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진리로
거기 진리는 있지만 향하는 방향은 없다.
반면 선이 들어와 형태가 생긴 진리의 반응은
‘이 상황에서 분노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옳다..’
‘내 자존심보다 질서가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진리가 삶의 방향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면..
상태란 ‘느껴지는 내면의 온도’다.
따뜻함과 차가움, 살아 있음과 무감각함 등
이런 차이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상태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작동할 때의 내적 분위기,
또는 사랑의 정도에 따른 내적 감각이다.
인간의 모든 변화는 이 상태의 변화다.
동일한 진리라도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선이 없는 상태 변화의 실제 모습은
진리를 떠올리면 압박감이 몰려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해야 하는데 못 하겠어..’ 양심이 무겁고 딱딱해진다.
이렇게 선 없이 오는 진리는 무거운 짐이 된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마태복음 23:4
그러나 선이 들어온 상태에서는
진리를 떠올리면 숨이 트이고
여전히 어렵지만 옳다는 감각이 남아있으며
강요보다 내적 동의가 먼저 오게 된다.
선이 진리와 결합하면 진리는 부드러워진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30
살아 있는 진리는
설명하지 않아도 옳다고 느껴지는 진리이다.
살아 있는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지각이고
이 단계에서 진리는 생각보다 먼저 반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생각의 평면 아래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이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게 느낀다.
다시 말해 그 변화가 인간이 통제하는 층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역사는 의지의 깊은 층에서 이루어지고
중생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섭리는 인식보다 먼저 작동한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는다.
살아 있는 진리는 설명하기 어렵고 논증하기 어렵지만
삶에서 먼저 반응한다.
이것이 중생의 실제 모습이다.
형태를 얻고 상태가 바뀔 때
그 진리는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삶의 감각이 된다.
< 참고 1 ‘지각’의 근원, 매체, 주체에 대해
지각의 근원이 선이고 지각의 매체가 진리라면
지각의 주체는 당연히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영, 더 정확히는 그의 속사람이다.
스베덴보리는 지각(perception)을
결코 진리가 스스로 인식하는 작용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사람의 이성이 독립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으로도 보지 않는다.
지각은 언제나 선이 진리의 형태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 형태를 살릴 때, 그 결과로 사람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AC 1919, AC 1947 AC 13318)
그러면 이를 ‘누가 보는가?’라는 관점으로 이해해본다면..
진리는 눈이고, 선은 빛이다.
그렇다면 눈이 보는가, 사람이 보는가?
눈은 본다기보다 보게 되는 기관이고
실제로 보는 것은 그 사람 자신, 곧 그의 영이다. (AC 10569)
진리는 수용체이고 선은 생명이며
지각은 그 생명이 수용체 안에서 작동할 때
사람에게 귀속되어 느껴지는 의식 상태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는 능력의 근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이 지점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것은
지각은 사람의 것이지만 근원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게 무너지면 두 극단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본다는 쪽으로 기울면
자기 지각, 자기 의, 자기 통찰이 된다.
반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면
지각의 실재성과 책임이 사라진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항상
‘마치 사람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as if from himself)’
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진리라는 그릇 안으로 흘러들어올 때 그 작용의 결과가
사람의 영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인식’으로 느껴지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지각의 근원은 주님께 있고
‘지각의 형태’는 진리에 있고
지각의 의식적 주체는 사람에게 있다.
실천적 의미에서 이 구조는 참 중요하다.
이 이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이걸 알면 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해진다.
하나는 지각을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느낀 것이기에 이제 가볍지 않다.’ (AC 9382)
둘째로는 지각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AC 1937)
그래서 참된 지각은 항상 이런 성질을 가진다.
확신은 있으나 교만하지 않고
분명함은 있으나 공격적이지 않으며
말로 강요되지 않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선에서 나온 지각의 표지다.>
<참고 2 ‘지각의 형태’ 라는 표현에 대해..
.. 그러므로 지각의 근원은 주님께 있고
‘지각의 형태’는 진리에 있고
지각의 의식적 주체는 사람에게 있다..
여기 ‘지각의 형태’라는 말은
신학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생활 언어로는 너무 추상적이다.
‘지각의 형태’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알아차리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틀이다.
즉, 지각이 일어나는 모양, 지각이 담기는 그릇,
선이 들어와서 알아차림이 되도록 잡아주는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AC 3057 AC 1469)
이를 다시 설명하면..
선은 빛이고 진리는 눈이라면
‘지각의 형태’는 눈의 구조다.
시력이 어떻게 조절되어 있는지, 어떤 색을 잘 분별하는지,
초점이 어디에 맞는지..
빛은 동일해도 눈의 구조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보이는 방식이 바로 ‘지각의 형태’다.
예를 들어 같은 상황을 두 사람이 볼 경우
한 사람은 그 상황을 보고 회개의 기회로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상황을 보고 모욕으로 느낀다.
이 경우 빛(또는 선)은 같지만 지각의 형태가 다르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구조,
즉 이해의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태’라고 부른다.
진리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진리는 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해의 구조,
생각의 틀, 인식의 방향이다.
선은 그 자체로는
사람에게 ‘무엇인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진리라는 틀이 있을 때에만
선은 이것은 옳다, 이것은 왜곡이다,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인식으로 느껴진다.
이때 그 구체화되는 방식이
바로 지각의 형태다.
그래서 ‘지각의 형태’라는 말은
지각이 담기는 이해의 틀, 지각이 드러나는 생각의 구조,
선이 인식으로 번역되는 방식,
알아차림이 특정 모습으로 나타나는 틀 등으로 이해해도 된다.
그러므로 지각의 근원은 주님께 있고
지각이 어떤 모습으로 느껴질지는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틀에 달려 있으며
그 지각을 실제로 느끼고 아는 주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태’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지각은 갑자기 번쩍 생기는 감정도 아니고
추상적인 깨달음도 아니고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된 진리의 구조를 따라
일정한 방향과 색깔을 띠며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주님의 선이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방식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고, 반응이 다르다.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지각의 형태’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각의 형태란 선이 사람 안에서 알아차림이 될 때
그 알아차림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를 결정하는 틀이다.>
<참고 3 ‘지각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것은 감정의 존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 책임과 실제성을 말한다.
지각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것이기에 이제 가볍지 않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그것이 그냥 기분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것,
무시해도 되는 주관적 반응이나
흘려보내도 되는 우연한 생각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지각은 ‘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영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내가 느꼈기 때문에 가볍지 않다는 말의 핵심은
그 지각을 내가 만들어냈다가 아니라
그 지각이 내 의식 안에서 일어났다는 데 있다.
지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진리의 형태 안으로 들어와
사람의 의식에 ‘느껴짐’으로 나타난 결과다.
그러므로 지각은 비록 근원은 나에게 없지만
그 발생 장소는 분명히 나다.
내 안에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나의 삶과 분리된 게 아니다.
이때 오해하면 안 되는 두 극단이 등장한다.
저 표현을 오해하면 두 가지 극단으로 빠지기 쉽다.
하나는 내가 느꼈으니 무조건 옳다는 것,
이것은 자기 지각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척 경계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 지각은 쉽게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는 주관적 느낌일 뿐이니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데
이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이 나에게 접근하시는 통로를
스스로 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볍지 않다’는 말은
이 두 극단 사이에 서는 말이다.(AC 5758 AC 1937)
‘가볍지 않다’의 실제 뜻을 이렇게 바꿔 들으면 정확하다.
이 지각은 내가 꾸며낸 것도 아니고
아무 의미 없는 것도 아니며
내 삶에 책임 있게 다루어야 할 무언가다.
즉, 곧바로 결론 내리지는 않되 무시하지도 말고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뜻이다.
주님은 사람을 외부에서 밀어붙이지 않으시고
이성 안에서, 자유 안에서 인도하신다.
지각은 그 자유와 이성 안에서 주님의 선이 처음 닿는 자리다.
그것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주님의 접근을 사소한 감정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지각을 존중하라고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하자.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들었다면
‘아무 일 아니겠지’ 하고 바로 흘려보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지각도 이와 같다.
그래서 이 말의 정확한 뉘앙스는 이것이다.
내가 느꼈으니 다 맞다가 아니라
내가 느꼈으니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
즉 ‘가볍지 않다.’ 라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지각은
주님에게서 왔는지, 나에게서 왜곡되었는지
분별의 대상이지 폐기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이니 가볍지 않다.’는 말은
겸손한 책임의 언어다.>
- 주님의 사랑(선)이 유입될 때
그 사랑은 진리의 그릇을 파괴하지 않고
천국적 질서에 맞게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참고 천비 3318
창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그가 피곤하였다(지쳤다)’는 표현은
투쟁(conflict, 대립)의 상태를 의미한다.
‘피곤함’은 갈등 다음에 오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투쟁의 상태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피곤하다'는 말은 투쟁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사고의 흐름,
특히 투쟁(시험) 없이는 자연적인 인간 안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2] 이 상태의 성격을 다만 사람이 경험하는 방식으로
알게 하기 위해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기관이나 그릇에 불과하다.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흘러들어오는 생명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이 사랑, 즉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인간의 합리적 부분과
자연적 부분에 있는 그릇들에 흘러들어 적용된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적 악과 스스로 획득한 악 때문에
그 그릇들이 생명을 받기에 잘못된 방향으로 뒤집혀져 있다.
따라서 흘러들어오는 생명은 가능한 한 그 그릇들을 다시
되돌려놓아(정렬시켜) 그 유입을 받게 한다.
합리적인 인간과 자연적인 인간 안에 있는 이러한 그릇들이
진리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그릇들이 진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들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지 않으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담아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릇들은 형태의 변화와 상태 변화의 지각(perception)을 통해
끊임없이 재조정되고 새로워진다.
이 변화는 인간 스스로 일으킬 수 없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으로 그 형태가 ‘reset’ 될 때
그때 진리가 새롭게 살아난다.
인간에게 있는 이 진리의 그릇에 선이 들어와
그 그릇에 ‘형태(form)’를 부여하고 ‘상태(state)’를 변화시킬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된다.)
본질에 있어서 그것들은
단지 그 그릇들이 지닌 형태의 변화들과,
그 변화들을 여러 방식으로 일으키는 상태의 변화들에 대한
‘지각(perceptions, 인식)’일 뿐이다.
(‘살아 있는 진리’는 선이 유입될 때 진리의 그릇이
계속 여러 형태와 상태로 변화되는 것에 대한 지각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가장 섬세한(delicate) 유기적 실체들 안에서 일어나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가진 선, 곧 생명 그 자체가 흘러들어와
이 그릇들을 바로잡고(되돌려놓고) 질서 있게 만든다.
(주님은 생명을 강제로 밀어 넣지 않으신다.
흘러들어오는 생명은 가능한 한
그 그릇들을 다시 되돌려놓음으로 그 유입을 받게 한다.
‘되돌려 놓는 것(정렬)’이 주님의 일이다.
주님은 정렬하시는 분이지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악을 억지로 제거하지 않고
질서를 회복하신다.
주님의 섭리는 방향을 고칠 뿐
폭력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진리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형태(form)다.
진리는 선을 받을 준비가 된 상태로 천국의 질서를 담는 그릇이다.
합리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러한 그릇들이
진리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진리는 선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선이 들어오기 전까지 진리는 ‘비활성’이다.
선이 들어와 거기 그릇의 형태를 부여하고 상태를 변화시킬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된다.
그리고 진리는 선을 통해서만 지각으로 변한다.
이때부터 진리는 느껴지는 것이 된다.
변화의 본질은 감각이 아니라 인식이다.
본질에 있어서 그것들은
형태와 상태의 변화에 대한 지각일 뿐이다.
따라서 영적 지각이란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인식이다.
주님은 사랑이라는 생명을
진리라는 그릇에 흘려보내어 그것의 뒤집힌 방향을 바로잡고
그 진리를 ‘느끼지 않아도 옳다고 아는 상태’로
살아 있게 만드신다.)
[3] 그러므로 그 그릇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뒤집혀 있을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도록 재배치(즉 통제되게)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그 사람이 태어날 때의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스스로 만들어 온 상태에 있는 한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때 그 그릇들은 복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 그 그릇들은 천국의 질서가 작용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저항하며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을 움직이며 그들로 복종하게 만드는 선은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약하지만 그 선에 들어있는 온기 때문에
그러한 그릇들은 아직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생명을 받도록 만들려면
먼저 그들을 부드럽게(연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 연화는 시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시험은 자기영광, 증오, 복수심 등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어느 정도 굴복되고 부드러워지면
그 그릇들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생명에 순응하게 된다.
[4] 이 시점부터 선은 우선 합리적인 것 안에서,
그 다음 자연적인 것 안에서 진리들과 결합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리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의 변화들에 대한 지각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지각들은 흘러들어오는 생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 시험을 통해 중생되는 이유이며
그 결과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5] 한편 최고 의미에서 주님은
시험에 수반된 아주 심한 투쟁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모든 것에 신성한 질서를 세우셔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셨고
따라서 그분은 다른 인간들처럼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성하게 되셨다.(영광화)..>
인간의 마음에는 합리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이 있으며
이 두 차원 안에는 마치 섬세한 유기체와 같은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들은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릇으로 기능하며
이 그릇이 바로 진리라 불리는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형성된 통로이다.
선은 이 통로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 형태를 바로잡고 질서를 부여하며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이해와 사고 속에 있는 진리의 그릇들은
시험과 내적 투쟁을 거치며 점차 부드러워지고 정돈된다.
그 과정에서 주님의 선이 그 안으로 더 깊이 유입되어
인간의 이성과 마음은 서서히 천국의 질서에 맞게 재배열된다.
선은 생명 그 자체이며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이 곧 참된 생명이다.
이 선을 담는 것이 진리의 역할이고
선은 진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이다.
주님의 사랑(선)이 유입될 때
그 사랑은 그릇을 파괴하지 않고
천국적 질서에 맞게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생명이 진리의 그릇 안으로 들어올 때
그 그릇의 형태와 상태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조정된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의 수정이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재조정되는 변화이다.
(AC 9334 ― 상태의 변화)
이러한 이유로 진리는
고정된 명제나 변하지 않는 문장이 아니다.
진리는 살아 있는 질서이며
그릇의 형태와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사람이 인식하고 느끼는 지각도 함께 달라진다.
따라서 진리는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와
질서를 이루는 살아 있는 그릇이다.
우리 마음의 내부에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적, 상태적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변화가 바로 진리를 인식하고 느끼는 구조적 기반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가장 섬세한 수준의 유기적 실체들
(organic substances) 안에서 일어나며
이는 곧 영적 실체(spiritual substances)의 차원을 가리킨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영적 뇌세포와 같은 역할을 한다.(AC 4042 ― 가장 미세한 수용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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