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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헬기로
공중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 대한뉴스 캡처 | |
우리 나이로 올해 82세인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은 풍채가 당당했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비서관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는 ‘인간 박정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김종신씨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돌아본 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이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오나시스가 된 기분입니다”라고 하니 무척 좋아했다.
대통령은 김씨의 표현이 맘에 들었던지
주변 사람들에게 고속도로 얘기를 할 때마다 그걸 언급했다.
“고속도로 자체보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더
기뻐한 거지. 대통령은 정말 고속도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5.16 당시만 해도 수출이라곤 오징어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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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8일 이 충무공의 4백24회 생신일을 맞아 거행된 현충사 성역화작업 준공식에서
박 대통령이
유물전시관의 거북선 모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 | |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에. 박 대통령은 어릴 때
가난하게 산 것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선지 머릿속에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김종신씨가 지켜본 바로는 박정희는 결코 친미주의자가 아니었다.
경제개발과 국방력 강화에 미국의 도움이 필요해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오히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군 시절 친미사대주의에 젖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그는 영어를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김씨는 박정희가 미국에 아부하는
장교들을 비판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우리 군대는 우리 국민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우방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거다.
원조를 받더라도 배짱을 튕기며 받아야지
왜들 꼴사납게 꼬리 치는지 모르겠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516.or.kr%2Fup_fd%2Fboard%2Fnews_img%2F2010%2F01%2F06%2F2010168261788543.JPG)
▲1991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 12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정주영 명예회장. ⓒ 자료 사진
박정희는 미국의 원조 물품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양담배와 성냥개비, 양초가 우리한테 무슨 큰 도움이 되나.
원조를 제대로 하려면 비누공장을 만들어줘야지.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건가. 빨리 자급자족해야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부산을 찾았을 때다.
동래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미국인 사업가를 소개했다.
미국 총기회사인 콜트사 사장이었다.
총 팔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통역을 통해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박정희가 짧게 말했다.
“조준경만 사겠다.”
낙담한 콜트사 사장이 돌아간 후
박정희는 김종신 비서관을 비롯한 주변 참모들에게
“조준경만 있으면 우리 손으로 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1975년) 단행된 개각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된
최 규하씨가 화제에 올랐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cd%2F30%2Finman032%2Ffolder%2F26%2Fimg_26_3290_3%3F1156668659.jpg)
▲역사 앞에 ‘근대화 혁명’ 대장정의 출정을 신고하다. 6월12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재건국민운동 서울촉진대회.
1961-06-12. (KTV-국가기록영상관.
첫댓글 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근혜님을 모시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하고 또 일했다’고 말하겠다.” 고 할 것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