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미국 영화의 획일성과 보편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사람이다. 그는 [파이]나 [레퀴엠] 같은 영화를 통해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의 영화들은 주류 상업영화와 일정한 거리가 있는 소재였으며 실험적인 형식으로 기존 체제 내의 낯익은 관습들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빌로우]에 이은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천년을 흐르는 사랑]을 보면,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타협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제목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천년을 이어지는 사랑을 다룬 환타지 영화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 대런 애러노프스키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철저하게 비주류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와 결별하고 상업적 공식들과 악수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상업영화로서의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실험성이 가치를 발휘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쩡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환타지는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한 소재적 가치 이상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나는 그에게 충고하고 싶다.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해야 할 것은 오히려 자신이 마주친 현실과 정직하게 싸워가는 것이다.
16세기, 21세기, 26세기 이렇게 서로 다른 시공간이 영화에 등장한다.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초점은 현재다. 과거는 현재를 낳고 현재는 미래로 이어진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남녀 주인공은 모두 휴 잭맨과 레이첼 와이즈가 맡고 있다. 그렇다고 불교의 연기설과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천년을 이어가는 끈질긴 남녀의 사랑을 보여줄 뿐이다.
16세기의 스페인에서 남자는 충실한 기사 토마스(휴 잭맨 분)으로 여자는 아름다운 여왕 이자벨(레이첼 와이즈 분)로 나온다. 적의 수중으로부터 여왕을 구출하기 위해 기사는 온 힘을 다해 싸운다. 적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여왕은 기사에게 영생의 나무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사는 신비의 나무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난다.
21세기에서 의사 토미으로 나오는 남자는 암 치료를 위한 신약을 계발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첫눈이 내린다고 자신을 찾아온 부인 이지를 매몰차게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약을 연구하는 이유는 암에 걸린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다.
26세기의 우주에서 우주인 톰은 생명의 나무와 함께 우주여행을 하고 있다. 과연 그는 영생의 나무를 찾은 것일까? 천년동안 이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천년을 흐르는 사랑] 속에서 극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나무는 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생명나무다. 이자벨 여왕의 의상 가운데 수놓아진 나무나, 이지의 담요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우주인 톰이 함께 여행하는 나무 등 각각 다른 3개의 시공간에 반드시 등장하는 게 나무다.
16세기의 기사 토마스가 생명의 나무의 액을 마시자 그의 온몸에서 가지가 자라나고 싹이 트고 잎이 자라는 모습이 보여진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천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지는 남녀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우주 운행의 중심에 놓여 있는 생명나무에 대한 상징적 탐구로 읽힌다.
그러나 내런 애러노프스키는 소재의 신화성을 내러티브 안에 적절히 풀어내지 못했고 [레퀴엠]에서 보여준 놀라운 독창성과 에너지 넘치는 역동적 상상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금색과 흰색으로 신비로움을 강조한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 환타지 영화의 범작에 머물고 만 것은 그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서 주류 영화로 진입하려고 하지 않고 주류 영화의 상업적 요소들과 자신이 만나는 접점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