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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원(所願) 이루어지는 중추절(仲秋節)이 되시길 소망(所望)합니다.
한당(漢唐)의 텃밭은, 중앙(中央)과 서남(西南)아세아(亞世亞)
천산【天山 : 意邈 = 醫巫閭山】아래에 현토(玄菟)를 두다.
○ 「현토(玄菟)」는 현토군(玄菟郡)을 말하고,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한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토벌(討伐)하고 두었다는 한사군(漢四郡)으로부터 시원(始源)하는 것일 게다.【기원전(紀元前), BC 107년】 곧 한사군(漢四郡)이란,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토(玄菟)〉등의 4개 군(郡)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무제(漢武帝)란 걸출(傑出)한 황제(皇帝)가 있어, 조선(朝鮮)을 격파(擊破)하고, 그 땅에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토(玄菟)〉등의 4 군(郡)을 설치해 지들이 다스렸다고, 소위(所謂) 정사(正史)에서 설명(說明)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말이다. 패현(沛縣)의 농사꾼 출신(出身) “유방(劉邦)”이, 초왕(楚王) 항우(項羽)와 패권(覇權)경쟁(競爭)에서 승리한 뒤, 건국(建國)했다는 “한(漢)”나라가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중차대(重且大)한 문제(問題)도, 현토군(玄菟郡)이 어디에 있었느냐? 따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例)를 들자면, 〈현토(玄菟)가 어디에 있었느냐? 에 따라 “한(漢)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건 분명 중차대(重且大)한 일일 것이다.
(1) 後漢書 卷85 東夷 列傳 第75 / 東沃沮 편을 보면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夫余,南與濊貊接.其地東西夾,南北長,可折方千里.注[一]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注[二]夾音狹.》이라고 하였는데,
➊ 곧 후한서(後漢書) 원전(原典)본문(本文)을 번역(飜譯)해보자.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夫余,南與濊貊接.其地東西夾,南北長,可折方千里.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는데, 동(東)쪽은 대해(大海)의 물가이고 : 북(北)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余)이고, 남(南)쪽은 예맥(濊貊)과 접(接)하였다. 그 땅은 동서(東西)는 좁고, 남북(南北)은 긴데, 가히 천리(千里)의 절반가량 된다.》
➋ 원전(原典) 본문(本文) 주석(注釋) 번역(飜譯) / 《注[一]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注[二]夾音狹. : [1]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인데, 현토군(玄菟郡)에 속해 있다. 그 산(山) 곧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성(平壤城)은 즉(卽) 왕험성(王險城)이다. [2] 협(夾)의 음(音)은 협(狹)이다.》라고 하였다.
(2) 이로 보면 :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해 있었다.’고 하니,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바로는, 현토군(玄菟郡) 역시(亦是), ‘평양성(平壤城) 곧 왕험성(王險城) 서(西)쪽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고구려(高駒驪)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해 있고, 이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는 것이 주(主)된 내용(內容)이다.
또 개마(蓋馬)에는 개마국(蓋馬國)이 있었는데, 고구려(高駒驪) 세 번째 왕으로 알려진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서력(西曆AD) 26년, 개마국(蓋馬國)을 토벌(討伐)하고는, 군현(郡縣)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3) 한서(漢書)는 말하기를 : “현토군(玄菟郡) 서(西)쪽 개마현(蓋馬縣)에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하였다.【당서(唐書)에는 마자수(馬訾水)를 압록강(鴨綠江)이라 하였다.】그런데 개마(蓋馬)는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였고,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는, “고구려(高句驪)·상은대(上殷臺)·서개마(西蓋馬)”가 현토군(玄菟郡)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4)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 “수양제(隋煬帝)가 고려(高驪)를 칠 때, 좌(左) 12군(軍)이 개마(蓋馬)등의 12길로 나와 압록수(鴨綠水) 서(西)편에 모이도록 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개마(蓋馬)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하였고, 【資治通鑑.隋紀.煬皇帝上之下大業八年.壬申,公元六一二年: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於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右翊衛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右御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御衛虎賁郎將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5)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도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고 하였고,
(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 /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 개마대산(蓋馬大山) 설명(說明)에서도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인용(引用)하여,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 서(西)쪽에 있는데, 그 동(東)편은 곧 옛날 동옥저국(東沃沮國)땅이다.” 했다.〉고 말하고 있다.
● 여러 원전(原典)을 비교(比較)해 보면 :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족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고, 그 동(東)쪽에 평양성(平壤城)=왕험성(王險城)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평양성(平壤城)=왕험성(王險城)’을 기준(基準)해 보면 : 평양성(平壤城) 서(西)쪽 멀리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으며, 동옥저(東沃沮) 서(西)쪽 멀리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또 이 산(山)의 서(西)쪽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는데, 마자수(馬訾水)가 발원(發源)한다. 이 모두는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했다.〉는 얘기다.
①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이고,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② 개마현(蓋馬縣)에서 마자수(馬訾水)가 흐르는데, 이는 곧 압록강(鴨綠江)이다.
③ 현토군(玄菟郡)에 속한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④ 전한(前漢)때 현토군(玄菟郡)은, 3 현 / 45,000여호(餘戶), 220.000 여명(餘名)이 살았다.
●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변하지 않는 것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는 문구(文句)다. 후한서(後漢書)를 편찬(編纂)한 범엽(范曄)【398 ~ 445】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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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 범엽[范曄]【398 ~ 445】 :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역사가로서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였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역사가로서 자(字)는 위종(蔚宗)이고, 산음(山陰, 지금의 浙江省 紹興)에서 태어났다.
송(宋) 문제(文帝, 424~453) 때인 432년(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어 있으면서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등을 참고하여 기전체(紀傳體)의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였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으뜸인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은 순양(順陽, 지금의 河南省 淅川) 출신의 강남(江南) 사족(士族) 명가(名家)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진(晋)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조부인 범녕(范寧)이 12권의 <춘추곡량전집해(春秋榖梁傳集解)>를 저술하는 등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420년, 송(宋)이 건국된 뒤 범엽(范曄)은 벼슬을 하여 상서외병랑(尚書外兵郎), 신채태수(新蔡太守), 상서이부랑(尚書吏部郎), 비서감(秘書監)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성격이 오만(傲慢)하여 관직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432년, 범엽은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10권의 본기(本紀)와 80권의 열전(列傳)으로 된 <후한서(後漢書)>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그 뒤 좌위장군(左衛將軍), 태자첨사(太子詹事) 등을 역임하면서 10여 년 동안 <후한서(後漢書)>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436년(元嘉 13년), 문제(文帝)가 중병(重病)에 빠지자 그의 동생인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이 집정(執政)하였다. 유의강(劉義康)은 북벌(北伐)에 큰 공을 세운 단도제(檀道済, ?~436)의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을 잡았지만, 440년(元嘉 17년) 문제(文帝)는 그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내쫓았다. 범엽(范曄)은 유의강(劉義康)을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445년(元嘉 22년) 서담지(徐湛之)의 밀고(密告)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범엽(范曄)이 죽었을 때, <후한서(後漢書)>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남조(南朝)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體裁)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다.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의 주석(註釋)을 덧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범엽(范曄)은 문장(文章)이 자유롭고 수려(秀麗)해 이름이 높았고, <쌍학시서(雙鶴詩序)>, <락유응조시(樂游應詔詩)>, <화향방(和香方)>, <잡향고방(雜香膏方)>, <백관계차(百官階次)> 등의 시문(詩文)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쌍학시서>와 <락유응조시>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엽 [范曄] (두산백과)/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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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인물(人物)들에게 있어서, 후한서(後漢書)를 편찬(編纂)하고, 주석(注釋)하기 까지, 수많은 참고(參考)서적(書籍)과 이전(以前)의 역사서(歷史書)들을 참고(參考)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은, 상식(常識)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1,500여 년 전(前)의 범엽(范曄)이 찬하고, 1,300여 년 전(前)의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에, 그 위치(位置)가 틀렸다거나 방향(方向)이 틀렸다고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후한서(後漢書)에 주(注)를 붙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은, 고구려(高駒驪)를 토벌한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아들이란 점이다. 누구보다도 고구려(高駒驪)의 중요(重要)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人物)이었다는 거다.
이러한 그가 주(注)를 붙여 설명(說明)하기를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인데, 현토군(玄菟郡)에 속해 있다. 그 산(山) 곧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성(平壤城)은 곧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를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카드가 있느냐? 하는 거다.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아버지(高宗)와 할아버지(太宗)는, 수십(數十)년에 걸쳐 고구려(高駒驪)와의 패권(覇權)투쟁(鬪爭)에, 나라의 운명(運命)을 걸었던 시기(時期)였음을 생각하면, 이때 고구려(高駒驪) 땅의 주요(主要)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인물(人物)에 속해 있었다고 할만하다.
○ 현토군(玄菟郡) 또는 현토(玄菟)에 대해서, 사전(事前) 지식(知識)을 쌓았으니, 아래의 조선사(朝鮮史)에 포함(包含)될 수 있는 문집(文集)속의 내용(內容)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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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記言)」 :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년(선조28)∼1682년(숙종8)】의 저서(著書)로, 허목(許穆)은, 17세기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의 인물(人物)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朝鮮王朝)’라는 봉건왕조(封建王朝)는, 군주(君主)를 제외(除外)한 지배계층(支配階層)은, 단 「5% 이내(以內)」로 좁혀질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답(田畓)【오늘날로 치면 수천(數千)평에서 수만(數萬)평∼수십만(數十萬)평을 가진 자(者)들이다.】과 노비(奴婢)【평균(平均) 남녀(男女) 노비(奴婢) 수십(數十)∼수백(數百)명 정도】등을 재산(財産)으로, 또 자손(子孫)들에게 물려주었을 것이다. 이런 분야(分野)를 연구(硏究)한 학자(學者)들의 견해(見解)를 보면,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超越)한다.
소위(所謂) 양반가(兩班家)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태어나, 귀여움을 받으며, 어려움 없이 자라면서, 학문(學問)에 전진(前進)했던 젊은이들은, 오늘날의 속된 말로 「금(金)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선택(選擇)된 아주 소수(小數)인들이었다.
이들은 학문(學問)의 성과(成果)에 따라, 20 전후(前後)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기도 하고, 오직 학문(學問)연구(硏究)에 평생(平生)을 보낸 이들도 있다.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조정(朝庭)의 관리(官吏)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거나, 또는 평생(平生)을 강호(江湖)에서 학문(學問)에 전심했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사대부(士大夫)들과 그 자손(子孫)들!
이러한 자(者)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이라고 한다. 특히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는 후손(後孫)들의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은, 대부분(大部分) 사대부가(士大夫家) 출신(出身)으로 양반가(兩班家)에 속했다고 하면서, 그 근거(根據)나 고증(考證)으로 족보(族譜)나 가계도(家系圖) 및 임금(君主)으로부터 하사(下賜)받았다는 교지(敎旨)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당시(當時)의 지배(支配)계층(階層)은, 십분 지일(十分之一)도 되지 않는, 소수(小數)의 선택(選擇)된 자(者)들이었다. 통상적(通常的)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 씬 작은 숫자이다.
○ 이런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조정(朝庭)의 관리(官吏)가 되기도 하고, 강호(江湖)에서 학문(學問)연구(硏究)에 전념(專念)한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있다. 이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많은 문집(文集)속에는, 역사서(歷史書)를 뛰어넘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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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회(前回)의 연행록(燕行錄) / 북원록(北轅錄)【著者 李義鳳】제5권에서는 :
【1,761년(영조37, 신사) : 6일(병자) 맑다. 북경에 머물렀다. : 중략(中略). 또 “중국 북(北)쪽에서 서(西)쪽으로 뻗은 일대는, 구라파(歐羅巴 유럽)의 동쪽 경계와 바로 맞닿아 있는데, 이 일대를 모두 ‘달이단(韃而靼 타타르)’이라 부른다.” 이 지역에는 강이 거의 없고 편평한 땅에 모래가 많으며 대부분 모두 산이다. 큰 산은 의막(意邈 : 천산(天山)산맥)으로, 아시아의 남과 북을 중간에 가르고 있고, 그 북쪽은 모두 달이단(韃而靼)의 종자이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의막(意邈)이고,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해 주고 있다. 또한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북(北)쪽, 그 서(西)쪽 지방을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타타르(Tatar)”라고 했다.」는 것을 전해준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事實)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高麗) 말, 원(元)이 망(亡)하고 난 뒤, 막북(漠北)으로 도주한 원(元)의 잔당(殘黨)들은, 북원(北元)이라고 하면서 고려(高麗)와 통하는데, 이때 고려(高麗)는 북원(北元)과 경계(境界)하며, 이들과 통(通)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傳)한다.
➊ 高麗史節要) 28권 / 공민왕 3(恭愍王三) 기유 18년(1369), 대명 홍무 2년 : [北元中書省,及太尉丞相奇平章,遣使來聘. : 북원(北元) 중서성(中書省)태위(太尉) 승상 기평장(奇平章)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➋ 成宗實錄 12년 신축(1481)10월 17일(무오) /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 [且皇明定都金陵,而本國與北元連境,勢不得不如是也. : 옛적에 황명(皇明)이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본국(本國)이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것은,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라고 상소(上訴)하였다.
이럴 때에 〈고려(高麗)가 막북(漠北)으로 도주(逃走)한 원(元) 잔당(殘黨)과 경계(境界)하며, 통(通)할 수 있었다면, 고려(高麗) 땅은 막북(漠北)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고, 〈명(明)이란 나라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위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의막(意邈)이며, 천산산맥(天山山脈)이며, 그 북(北)쪽의 서(西)쪽을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타타르:Tatar)고 했다」면 : 고려(高麗)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과 그 서(西)쪽 일부(一部) 땅을 다스렸다.”는 것이 가능(可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동(東)쪽 땅에는, “고려(高麗) 이외(以外)의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가능(可能)토록 하는 것이 바로 위의 “기록(記錄)” 때문이다.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 역시 하나의 예(例)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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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언(記言)【〈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년(선조28)∼1682년(숙종8)】 제47권 속집 / 사방(四方) 1 / 贈李侍郞奉使如燕序(이시랑(李侍郞)이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에 갈 때 주는 서(序))
《漠南諸國.古北戎遺種.周時.爲獫狁,葷粥,犬戎.至秦.漢時.爲凶奴.善彎弓射獵.食肉衣皮.以攻伐爲能. : 막남(漠南)의 여러 나라는, 옛 북융(北戎)의 유족(遺族)이다. 주(周)때에는 험윤(獫狁)ㆍ훈육(葷粥)ㆍ견융(犬戎)이라 하였고, 진한(秦漢)때에 와서는, 흉노(凶奴)라 하였다. 그들은 활쏘기와 사냥을 잘하여,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가죽옷을 입었으며, 공격과 침벌(侵伐)을 능사로 삼았다. 중략(中略). 周官職方.東北爲幽州之地.其山鎭曰醫巫閭.玄菟在醫巫閭下.朝鮮檀君,箕子之治.今平壤有箕子畎. :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동북(東北)이 유주(幽州)의 땅인데, 그곳 산진(山鎭)은 의무려(醫巫閭)이다.” 라고 하였다. 현도(玄菟)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으며, 조선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통치한 곳으로, 아직도 평양에 기자견(箕子畎)이 있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➊〈현토(玄菟)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下)에 있다.〉 고 하였다. 위 본문 글 (1)의 「북원록(北轅錄)【著者 李義鳳】제5권」에서 말하기를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의막(意邈)이고,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따지고 지지고 붉고 할 것 없이, 천산(天山) 주변(周邊)에 현토(玄菟)를 두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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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晉書 卷 101. 載記 第一 : 진서(晉書)란 어떤 역사서(歷史書)이며, 누구에 의해 편찬(編纂)했을까?
《두산백과 / 진서[晉書] : 당(唐) 태종(太宗)의 지시로 644년에 방현령(房玄齡) 등 21인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 130권. 644년 편찬.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 처음으로 재기라는 양식이 정사에 나타난 것이며, 5호16국(五胡十六國)에 관한 기록으로서 진나라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로 장영서(臧榮緖)의 《진서(晉書)》에 의존하였고, 기타 진시대사(晉時代史)도 참고로 하여 많은 사관(史官)이 집필하였다. 현존하는 유일한 '진대사'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서 [晉書] (두산백과)》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당(唐) 태종(太宗)과 방현령(房玄齡)은, 고구려(高駒驪)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위치(位置)에 있었던 자(者)들이다. 이런 자(者)들이 편찬(編纂)했다는 진서(晉書)에 “현토(玄菟)는 천산(天山)과 하(河) 주변(周邊)에 있다”고 하였다. 곧
晉書 卷 101. 載記 第一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中略. : 그리하여 연(燕)에서는 조양(造陽)의 밖으로 성(城)을 쌓았고, 진(秦)나라는 임조(臨洮)의 험함을 이용하여 해자(垓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둘러싸고, 황하(黃河)에 도달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적(夷狄)의 난(亂)으로부터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인 바, 미리 대비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는데, 【이미 오래전에 우리 카페(Cafe)에서 주장했던 내용 그대로이다.】
➋ 「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 : 진(秦)나라는 임조(臨洮)의 험함을 이용하여 해자(垓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둘러싸고, 황하(黃河)에 도달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천산에 올라(登 天 山), 지맥(地脈)을 끊고(絶 地 脈), 현토를 둘러싸고(苞 玄 菟), 황하에 이르게 하였다.(款 黃 河)〉하였는데, 「천산(天山)과 현토(玄菟)와 황하(黃河)」가 함께 등장(登場)한다. 이게 아주 중요(重要)한 구절(句節)인 바, 「이곳에 장성(長城)을 쌓고 지키는 것은, 곧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현토(玄菟)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함경남도(咸鏡南道)에, 또는 요녕성(遼寧省) 또는 길림성(吉林省)에 있었다고 설명(說明)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
임조(臨洮)가 어디에 있었으며,
천산(天山)이 어디에 있던 산(山)이며,
황하(黃河)는 어디를 흐르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자(者)들의 말대로라면,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서(西)쪽과 신강성(新疆省) 땅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可能)한 일인가?
➌ 「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 : 이는 이적(夷狄)의 난(亂)으로부터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인 바, 미리 대비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정말 중요(重要)한 대목이랄 수 있다.
곧 〈천산에 올라(登 天 山), 지맥(地脈)을 끊고(絶 地 脈), 현토를 둘러싸고(苞 玄 菟), 황하에 이르게 하였다.(款 黃 河)〉는 것은, 곧 “중화(中華)를 이적(夷狄)의 난동(亂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전(淮南子傳)에서는,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의 동(東)쪽이 중화(中華)이다.” 라고 한 것이나, “천산(天山)의 동(東)쪽이 중화(中華)”라고 한 것이나, 거기가 거기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 설명(說明)은, 누구도 이를 부인(否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이동(移動)시킬 수 없고, 조작(造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或者)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천산에 올라(登天山), 지맥(地脈)을 끊고(絶地脈)〉라는 구절(句節)에서, 〈登 天 山 : 높은 산에 올라〉 하고 설명(說明)한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理由)는, 그 다음에 현토(玄菟)와 황하(黃河)가 이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➍ 「현토(玄菟)」는 고구려(高駒驪)의 핵심(核心) 3군(郡)중의 하나다. 아래를 보자. 전한서(前漢書)에 의하면 :
요동군(遼東郡) - 18 현 - 56,000 호 – 270,000여 인
낙랑군(樂浪郡) - 25 현 - 62,812 호 - 406,748 인
현토군(玄菟郡) - 3 현 - 45,000 여호 - 220,000여 인
3개 군 합계 46현 - 163,812 여호 - 896,748 여인
‘서한(西漢)=전한(前漢)’은 서력(西曆) 8년에 망(亡)한 나라이다. 전한(前漢)시기라는 것에 비춰볼 때, 기원전(紀元前)에 이미 고구려(高駒驪)가 존재(存在)했고, 그 핵심(核心) 세(3) 개 군(郡)의 인구(人口)만 하더라도 “백만(百萬) 가까이 되었다.”는 거다. 그 나머지 군(郡)과 현(縣)까지 합친다면 도대체 당시(當時) 고구려(高駒驪)의 인구(人口)는 얼마나 되었을까?
또 3 개 군의 호수(戶數)가 “163,812 호 이상(以上)이었다.”하였고, 이후 600년 이상(以上)이 흘러 수(隋)나라 때에 “고구려(高駒驪)가 동서(東西) 6천리를 가졌던 나라였다”라고 했으니, 그때의 호수(戶數)는 과연(果然) 어느 정도(程度)였을까?
당서(唐書)에서는 “69만5천여 호(餘戶)”라고 하였으나, 이는 이미 당(唐)의 수십(數十)년 침탈(侵奪)로 인해, 많은 백성(百姓)들이 ‘말갈(靺鞨)과 돌궐(突厥)’등의 주변나라로 숨어들어가고, 본토(本土)에 남아있던 숫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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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과 당(唐)으로 대표(代表)되는 중원(中原)왕조(王朝)는 없었다. 이게 사실(史實)이고, 팩트(Fact)라고 본다.
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말하는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으뜸인 ‘4사(四史)’로 꼽히고 있는, 1천6백년(百年) 전(前)의 기록(記錄)이나 또는 1천 3백 여년(餘年)전에 주석(註釋)을 한 것에 대해, “맞다 또는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者)가 있기는 한가? 하는 거다
〈평양성(平壤城) 서(西)쪽 멀리에 동옥저(東沃沮)가 있고, 그 멀리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으며, 그 산 아래에 현토(玄菟)를 두었다〉는 것이고,
〈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 : 진(秦)나라는 임조(臨洮)의 험함을 이용하여 해자(垓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둘러싸고, 황하(黃河)에 도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의 주체(主體)가 되는 왕조(王朝)들인 「진(秦)이나 한(漢)과 당(唐)등의 나라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서(西)과 서남(西南)쪽에 있었고, 천산(天山)과 현토(玄菟)와 하(河)로 연결되는 장성(長城)의 서(西)쪽과 서남(西南)쪽에 있었다.」는 것이 고전(古典)의 원전(原典)과 문집(文集)속의 내용(內容)이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 대략(大略) 오늘날의 경계(境界)와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漢)이니, 당(唐)이니 하는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이란(Iran)” 쯤에 있었다.〉고 추정(推定)된다.
〈이들 나라【이란(Iran)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등지에 있었던 한(漢)과 당(唐)으로 대표(代表)되는 옛 왕조(王朝)】의 동북(東北)지방에 있는 ‘파미르고원(Pamir高原=葱嶺=崑崙山)과 천산(天山 : 汗騰格里峰 6,995m)’지대가 접경지방(接境地方)이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시대에는, 이 접경지대(接境地帶)가 서(西)쪽으로 넓혀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건너, 동구라파(東歐羅巴)까지 확대(擴大)되었다.〉는 것이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매국사학(賣國史學)에 귀 기울일 필요(必要)는 없다. 우린 “조선(朝鮮)의 자존심(自尊心)”을 지킬 때다.
2018년 09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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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티즌들은 '중국'이라는 단어보다도 '대륙'이라는 단어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중국'이란 지들이 사는 곳의 중심지역도 '중국'이 될 수 있지만 "大陸(대륙)"이란 유라시아를 뜻하며, 이곳이 조선(朝鮮)의 땅이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분들이 대륙 땅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것은 증거 또는 고증이 확실한 유물유적이 대륙의 땅에서 나와줘야 하는데......그러나 이런 일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나 밝혀질까, 현재와 같은 시진핑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기회가 오겠지요!
이란 , 아프가니스탄이 漢 , 唐이라면 어떻게 그많은 병력으로 總嶺을 넘거나 아니면 힌두쿠시산맥을넘어야 할텐데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總嶺 , 곤륜산맥(힌두쿠시산맥) , 天山은 中華와 夷敵을 가르는 중요한곳인데 물론 天山 北路 , 天山南路라는 실크로드라는 길이 있긴 있습니다. 근데 天山남쪽에 玄莵군이 있었다면 결국 漢四郡은 遼東郡을 四分轄해서 통치했다는 말일까요 ? 鴨綠水 , 또는 遼河 동쪽으로는 漢軍이 침략하지 못했고 , 이때 高句麗가 建國된후 요동태수 공손도, 공손술등 漢兵과 高麗軍이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하면서 결국 추모大帝때 燕太守를 임명하면서 한사군을 되찾은것같은데, 추모경에그런 記錄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한당(漢唐)이 흥성할때, 북방지대의 중앙아세아 지방까지 토벌하면서, 오늘날의 카자흐영역까지 진출했다고 보아집니다. 이곳으로부터 그 동쪽의 조선(총칭)과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현토군은 천산남쪽이 아니라 천산아래(下)에 두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역사해설은 우선적으로 조선의 선인(先人)들이 기록한 것을 참고로 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한사군이란 고구려사군이란 말도 있듯이 역사왜곡일 뿐 실체는 없다고 봅니다.
반도사관=식민사관의 한사군이란 요동과 압록강과 개마대산 지역을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때 한무제 사군(四郡)을 둔것이라고 하죠. 이때 조선을 멸했다고 하죠
현토군속현으로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조작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현토군은 소위 중국역사라고 하는 지들의 역사원전속에서도 천산과 황하사이에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주절도사가 있었던 범양(范陽)이 아랄해 주변에,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장잠(長岑)이 오늘날의 신강성과 중앙아세아 접경지대에 있었다는 것등이 이를 증거한다고 봅니다.
이런 여러가지를 하나 하나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심과 성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