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이 이삿짐을 옮겨 주느라 도쿄(東京)를 간 김에, 가마쿠라(鎌倉)를 들르기로 했다(2008.2.20-21). 오자키(大崎)에서 즈시(辻子)로 가는 쇼난신쥬쿠(湘南新宿) 라인을 타고 가다가, 오후나(大船)에서 요코스카(橫須賀)선으로 갈아탔다. JR패스를 준비하여 갔으므로 다시 요금을 낼 필요는 없었다.
오후나에서 요코스카선으로 바꾸어 타면, 바로 그 다음 역이 기타가마쿠라(北鎌倉)다. 정취 있는 작은 역으로, 다치하라 세이슈(1926-80)의 소설 『겨울의 유산』 제3부 ‘건각사(建覺寺) 산문 앞’의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산문 앞은 요코스카선이 달리고 있었고, 기타가마쿠라 역이 가까웠다. 내가 임신한 아
내를 데리고 산문 앞의 어느 집 사랑채를 빌려서 옮겨온 것은 지난 해 8월이었다.(…)
내가 건각사의 산문 앞으로 옮겨 온 것은 이 절이 임제종(臨濟宗)의 절이었기 때문이
었다. 무량사에 비하면 규모는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지만 선사(禪寺)다운 그 간결한 모
습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이었다. 이 절을 처음 찾은 것은 1941년의 봄이었다. 그때 승
방의 문에 걸려있던 ‘제창벽암록건각사승당(提唱碧巖錄建覺寺僧堂)’의 문자가 쓰여있는
두꺼운 판자를 보고, 그곳 ‘제창벽암록무량사개산조당’의 석비가 자연히 겹쳐져 왔던 것
이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다 하는 안도감이 있었다. 돌아갈 곳을 본 것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이 절의 근처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김형숙 역, 『구름
꽃』, 166쪽)
기타가마쿠라 역을 바로 지나서, 요코스카선이 달리는 방향으로 왼편에 소설 속의 겐카쿠지, 아니 현실 속의 엔카쿠지(圓覺寺)가 자리하고 있다. 겐가쿠지라는 이름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임제종의 대찰 겐쵸지(建長寺)와 엔카쿠지에서 각기 한 글자를 빌어오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은 이 겐가쿠지의 거사림에서 선승 세키링(碩林)을 만난다. 기실, 소설 밖의 엔카쿠지 거사림은 작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교토학파’를 탄생시킨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 그리고 선(禪)을 서구세계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가 공안을 들고 앉았던 곳이다. 지금도 어김없이, 누군가 좌복 위에서 공안과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념들이 내 마음 속을 지나가는 동안, 요코스카선은 가마쿠라 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새벽같이 교토를 출발하여 도쿄를 거쳐서 가마쿠라까지 온 몸은 휴식을 원한다. 하세(長谷) 유스호스텔은 언제 들러도 편안한 느낌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를 알아봐주는 주인아주머니의 친절과 맛있는 저녁에 심신이 풀어진다. 일찍 잠자리에 든다.
2
이번 행보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즈이센지(瑞泉寺)다. 하세 역에서 에노덴(江ノ電)을 타고서, 가마쿠라 역으로 갔다. 즈이센지로 가는 버스는 가마쿠라 역이 기점이기 때문이다. 대탑궁(大塔宮=鎌倉宮)행 버스를 타고 가서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대탑궁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지어진 유일한 사사(寺社)라고 한다. 가마쿠라의 모든 신사나 사원 중의 막내인 셈이다. 그러니까 가마쿠라에 있는 100여개의 사찰들은 모두 다 메이지 시대 이전, 즉 에도시대에는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절이든 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이야기다.
대탑궁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길(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을 따라서 10여분 걸었다. 버스나 택시는 다닐 수 없는 오솔길이다. 여기에 다치하라 세이슈가 영면하고 있다는 정보는 오석윤 선생 번역의 『한국인 다치하라 세이슈』(원제 : 立原正秋)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서 얻었다.
언젠가 일본의 가마쿠라를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의 영령이 잠들어 있는 서천사
(瑞泉寺)에 찾아가 그의 묘소 앞에 한국어로 출판된 이 책을 놓고 싶다. 그리하여 건강 하게 불타올랐던 그의 문학적 열정으로 이 한국어 역서를 읽어주신다면 …. 그런 상 상만으로도 나는 더할 수 없는 흥분을 감출 길 없다.
어찌 내 마음이 오선생의 마음과 다르겠는가마는 아쉽게도 작년 겨울에 혼자 와서 가마쿠라를 한가롭게 거닐 때는 몰랐던 터라 찾지 못했다. 나의 이번 참배에는 오선생의 마음도 함께 한 ‘동행2인(同行二人 : 시고쿠에서 구카이/空海스님의 유적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구카이 스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의 걸음이었다.
즈이센지 매표소에서 표를 사면서, 표를 파는 할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다.
“작가 다치하라 세이슈의 묘소가 이 절에 있는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인연이 없는 분들은 참배가 안 됩니다.”
“아, 예, 우린 한국에서 일부러 왔는데 ….”
애원이 간절해 보였던 것일까, 진정성이 통한 것일까, 잠시 후 넌지시 일러주기를 “그럼, 개인적으로 하시면 ….”
그러니까, 절에 통지하지 말고 ‘슬쩍’ 들렀다 가라는 뜻일 게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묘원(墓苑)을 찾아갔다.
이 즈이센지라는 절은 참 그 지형이 특이하다. 마치 ‘은행 잎’ 모양이라 할까. 매표소를 지나서 조금 걷다가,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묘원, 오른쪽으로 가면 절이다(나중에 보니, 절에서도 작은 쪽문을 통해서 묘원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매표소에서 산을 향해서 볼 때, 마치 ‘은행잎의 왼쪽’인 묘원이나 ‘오른쪽잎’인 절은 둘 다 가려져 있듯 하다.
이렇게 은밀하게 숨어있는 묘원, 그리고 즈이센지…. 다치하라는 그가 나중에 잠들 곳이라 알았던(혹은 점지했던) 것일까? 소설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꽃의 생명(花のいのち)」의 한 부분에서인데, 거칠게나마 번역해 보기로 한다.
가마쿠라에서 자라면서, 즈이센지에 간 것은 손안에 꼽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즈이센지에 간 것이 柚木의 집에 갔던 여름의 끝머리였는데, 아버지와 함
께 가회(歌會)에 출석했을 때였다. 좁고 긴 오솔길 입구에 산문(山門)이 있고, 산문을
들어서면 한 갈래 길이 저쪽으로 나 있고, 길 양편으로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길이 끝나는 곳은 산길로 통하는데, 소나무 숲속에 볼품없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 단을 다 오른 곳에,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절이 있었다. 산문으로부터 오솔길을 거쳐서 경내를 올려다보는 풍경(風景)이랄까, 경내로부터 오솔길을 거쳐서 산문을 내려다보는 점경(點景)이랄까,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마치 정토(淨土)에 온 것 같은 환상에 드 는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장대한 칠당가람(七堂伽藍 : 선종에서는 불전, 법당, 삼문/三 門, 고원/庫院, 승당, 욕실, 동사/東司/화장실을 갖춘 사찰을 일컫는다. - 옮긴이)과는 인 연이 멀지만 마치 고요한 정토가 현세에 현현되는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묘원에는 천 기(基)는 족히 넘을 듯한 비석들이 빼곡하다. 수많은 영가(靈駕)들의 이름 속에서, ‘立原家’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혹시 ‘立原家’ 묘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성씨가 어디 없겠는가? 슬며시 걱정이 스쳐 지나간다. 묘원의 오른 편을 살펴보던, 아내가 안 보인다. 슬며시 겁이 나서 찾아보는데, 산과 면해 있는 묘원의 제일 끝자락 골짜기 위쪽에서 아내가 손짓한다. 찾았는가 보다.
‘立原家之墓’
작은 영석(影石)과 오륜탑(五輪塔 ; 일본불교의 독특한 부도양식)이 나란히 서있다. 다치하라 세이슈의 묘임이 틀림없다. 작년(2007)에 가족들이 새로 세운 ‘판오륜탑(板五輪塔 : 길쭉한 판대기에 오륜탑의 모양을 만들어서 망자의 계명을 써서, 왕생을 기원한다)’이 눈에 들어온다.
‘凌宵院梵海禪文居士’
아, 범해선문! 자전적 소설인 『겨울의 유산』속 주인공의 법명이 바로 범해선문이 아니었던가.
아내와 나는 합장을 하고 예를 올렸다. 그리고서는 당신의 작품 『겨울의 유산(冬のかたみに)』이 한국어로 두 번이나 번역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평생의 문우(文友)였던 다카이 유이치가 쓴 평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 등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다시 『겨울의 유산』이 새롭게 번역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다치하라 세이슈 당신과 『겨울의 유산』을 이야기하겠노라고.
다치하라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이나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지만, 그 유족은 알고 있었을까? 저작권법과 같은 법적 차원을 떠나서, 마땅히 유족을 통해서라도 저승에서라도 그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하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했다면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이번 걸음에, 번역된 그의 소설이나 그에 대한 평전의 사본을 갖고 오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사실, 이번 걸음은 ‘아들 이사 도우미’의 자격이어서, 가마쿠라에 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못했다. 급하게 이삿짐만 챙기느라 카메라조차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아내의 일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핸드폰은 안 되어도, 사진을 여전히 찍을 수 있다니 다행이다.
“여보, 우리 글을 써놓고 갑시다.”
아내의 제언이다. 나는 구두로 보고한 내용을 일본어로 썼는데, 아내는 무엇이라 썼는지 보여주질 않는다. 그녀도 『겨울의 유산』 애독자이니, 각별한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하세 유스호스텔의 주인아주머니가 선물로 준 분홍매화를 수놓은 하얀 수공예품으로 우리들의 편지를 싸서 묘석 밑에 놓아두고 합장하였다. 다시 찾아뵙겠다, 말하였다.
오석윤 선생이 “그런 지우(知友)를 가졌던 것은 다치하라 세이슈의 행복이라”했던, 평전의 작가 다카이 유이치(高井有一, 1932〜 . 아쿠다가와상 수상 작가)는 이 묘원에서 다치하라의 묘가 놓여있는 위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일(忌日)이 아닌데도 묘석은 아직도 싱그러운 물에 젖어 있었고, 꽃병에는 노란 국
화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묘소참배객들의 끊이지 않는 발길이 눈에 들어왔다. 양지바른
묘 앞에 서니 골짜기 일대에 드문드문 들어서는 많은 묘들을 볼 수 있다. 다치하라 세
이슈의 성격에서 생각한다면, 그 주위를 흘겨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혼자서 피식 웃었다.(『한국사람 다치하라 세이슈』, 305쪽)
“꽃절”(花の寺)로 유명한 즈이센지를 둘러보고, 돌계단을 내려오는 왼편에 죽림(竹林)이 있다.
“저 대나무들의 꼿꼿하고 푸른 모습이 딱 다치하라 닮았어요. 딱이에요.”
“철환형 성격을 닮지 않았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즈이센지 오솔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올 여름 제6차 일본불교사 강좌기행 때 여기를 다시 올 수 있을까 헤아려 본다. 이내 고개를 가로 젓는다. 나야 좋겠지만, 가마쿠라궁에서 여기까지, 무더운 여름 날 땀을 흘리면서 찾아오는 일에 동의하고 좋아라 할 동참자들이 어디 계시겠는가? 자신이 없어서이다.
3
교토로 돌아와서 도서관에서 『다치하라 세이슈』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에도 소설이 많이 번역되어서 읽히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バナナ)의 글이 있었다.
자기의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가 바로 다치하라 세이슈라고 하는 점, 작가가 독자를 선별할 수는 없으나 그런 점을 간파해 주는 독자가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는 점 등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치하라의 유족들과의 인연도 말하고 있었는데, 『겨울의 유산』에서 「축하할 만한 날」이라는 시를 얻게 해 준 아들(立原 潮)가 도쿄에서 요리가(料理家)
로서 ‘懷石 立原’를 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역시 ‘미식가’로 성가가 높았던 다치하라의 자제답다 해야 할까.
“하긴, 우리도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지. 독자니까.”
인연이 없는 사람들의 참배는 사절한다, 는 원칙을 말한 매표소 할아버지의 말에 대한 나의 뒤늦은 대답이었다. 그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한, 그의 선소설(禪小說) 『겨울의 유산』이 읽혀지는 한, 작가 다치하라 세이슈는 살아있는 셈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야기로 사는 사람이므로, 살아남는 사람이므로.
(2008. 2. 16)
|
첫댓글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정우서적)에 수록한 글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