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운부군옥을 접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는데, 전권을 구입하지 못하고 색인 2권만 구입 하였다.
전체는 20권이라 금액이 많이 드는 것이 구입 못한 이유가 제일크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 이전의 백과사전이 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조선에 여러가지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보물 제878호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 20책이 있다.
이 책은 은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을 본 따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사실(史實)을 지리, 국호, 성씨, 효자, 열녀, 수령, 선명, 본명, 화명, 금명 등의 유목으로 총망라해 운자의 차례대로 배열됐다.
또 임진왜란이후 소실된 서적의 일면을 참고할 수 있어 서지학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고, ’수이전(殊異傳)‘ 일문(佚文) 가운데 일부가 수록되어 설화문화적인 면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예천에[ 있는 권문해 묘소
대동군부옥에도 다른 저서를 남겼는데 자호를 따온 책의 제목이다, 초간일기로서
1580년(선조 13)에서 1591년(선조 24)까지 11년간에 걸쳐 일상의 개인적인 일에서 국정의 대요(大要) 등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은 일기로, 3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이 일기는 저자인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에천 용문사로 가다보면 아름다운 정자가 보이는데 권문해 선생이 지은 정자로 정자는 용문면 원류마을 앞 굽이쳐 흐르는 계류 옆 암반 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고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만들어 사방으로 문을 달고, 그 외의 부분에는 대청마루를 깔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정자의 현판을 잃고 근심하던 종손이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떠오른 정자 앞 늪을 파보았더니 거기서 현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1582년(선조15)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12년(광해군4)에 개수하고,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려 1642년(인조20)에 후손 권봉의(權鳳儀)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고종7)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권주환은 권문해의 10세손이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祉)이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
저서로는 우리 나라의 고금문적(古今文籍)을 널리 참고하여 단군시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문집으로 『초간집』이 있다. 예천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