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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말년(末年)의 천주교박해(迫害)
<부분적인 박해 ― 이도기(李道起) 박취득(朴取得) 프란치스꼬 등의 殉敎 ― 국왕의 승하(昇遐)
4. 원(元) 야고보, 정(鄭) 베드로, 방(方) 프란치스꼬의 순교
※ 朴(取得) 라우렌시오에게는 원(元) 야고보, 정(鄭) 베드로, 방(方) 프란치꼬라는 절친(切親)한 친구 셋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네 사람은 분별 없는 열심(熱心)에 이끌려, 함께 순교(殉敎)하기 위하여 서로를 밀고(密告)하기 로 약속(約束)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착한 뜻을 상(賞)주시기 위하여, 비록 고을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시기(時期)에 차례차례로 수령(首領)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許諾)하셨다. 필자(筆者)는 여기에다 그때의 수기(手記)와 지방구전(地方口傳)에 보존(保存)되어 내려오는 그들의 행적(行蹟)을 수집하여 놓는 바이다.
그들이 같은 해, 즉 1799년에 고통(苦痛)을 당한 것이 매우 있음직한 일이어어서, 필자(筆者)는 이 날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事實)은 절대적으로 확실(確實)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초대(初代)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순교자(殉敎者)들이 죽은 날을 그들의 주년(周年)을 지내기 위하여, 정확(正確) 하게 기록(記錄)하도록 매우 조심하였다. 그러나 해(年)를 기록하는 데에는 이같은 정확성(正確性)을 기하지 아니하여, 이 때문에 가장 정확(正確)한 사건(事件)들도, 그 순서(順序)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혼동(混同)이 생기는 수가 종종 있다.
1) 원(元) 야고보의 순교(殉敎)
① 원(元) 야고보는 1793년에 순교(殉敎)한 원(元)베드로의 사촌 형이었다. 그들은 홍주(洪州) 고을 옹정리에서 같이 살았었고, 둘이 같은 시기(時期)에 천주교(天主敎)를 배웠다.
② 원(元) 야고보는 성질(性質)이 어질고 순하며 곧고 활달하였는데, 이같이 좋은 바탕에 신앙(信仰)은 이내 온갖 덕행(德行)의 삯을 트게 하였다. 천주교(天主敎)에 들어오자 그는 적지 않은 자기의 재산(財産)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쓰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의 일과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희사(喜捨)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날의 식탐죄(食貪罪)를 기워 갚기 위하여 금요일마다 금식(禁食)을 하였다.
③ 외교인(外敎人)들 사이에 천주교(天主敎)를 펴겠다는 열성(熱性)으로, 그는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전교(傳敎)하였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일(主日)과 축일(祝日)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하여 먹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나면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ꡒ오늘은 주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 날을 지내야 하고, 또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분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ꡓ
그렇게 하여 그는 천주교(天主敎)의 여러 가지 교리(敎理)를 설명(說明)할 기회(機會)를 만드는 것이었다.
④ 오래지 않아 그의 명성(名聲)이 퍼져서, 1792년에는 관장(官長)이 그를 잡아 오라고 포졸(捕卒)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숨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그때에는 체포(逮捕)를 모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사촌(四寸)의 순교소식(殉敎消息)을 듣자 그의 열심은 배가(倍加)하여, 그와 같이 순교(殉敎)하지 못한 것을 후회(後悔)하며,
내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실천하면, 사또가 그 소문을 듣고 나를 잡아오라고 할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도(祈禱)와 신심행사(信心行事)를, 외교인(外敎人)들 가운데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하기 시작하여, 여러 해를 계속(繼續)하였다. 그는 큰 길에 가서 자리를 잡기까지 하였다. 포졸(捕卒)들은 그 사정(事情)을 알고, 또 몇 번인가 그를 보기까지 하였으나,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⑤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곧 신부를 만나러 가서, 성사(聖事) 받을 원(願)을 피력하였다. 신부는 그에게 말하였다.
교회에서는 여자 둘을 데리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배척하나, 즉시 여기서 나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원(元) 야고보는 나와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울며 탄식(歎息)하기만 하고, 음식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신부(神父)에게 가서 알리니, 신부는 그를 들어오게 허락(許諾)한 뒤 그에게 말하였다.
집에 돌아가면 곧 첩을 내보내겠는가? 그대가 분명히 약속을 하면 그대에게 성사를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보지도 못하리라!
원(元) 야고보는 대답하였다.
참말이지 저는 천주교의 법으로 아내와 첩을 가지는 것이 금지됨을 몰랐습니다. 신부님의 명령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제가 돌아가면 즉시 첩을 내보낼것을 약속드립니다. 제발 성사를 주십시오.
그는 성사(聖事)를 받고 집에 돌아가 첩(妾)인 여자에게,
천주교인은 첩을 둘 수 없고, 또 첩이 될 수도 없다.
고 말하고 곧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다.
⑥ 원(元) 야고보는 위에서 말한 바와ㅣ 같이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와 절친(切親)한 사이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 만나 덕행(德行)을 닦으며, 순교(殉敎)할 것을 서로 격려(激勵)하였다. 원(元) 야고보가 이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가 1798년에 덕산(德山) 포졸(捕卒)들에게 붙잡혀 옥으로 끌려가, 신문(訊問)을 받지 않은 채 한 달 이상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포졸(捕卒)들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관장(官長)에게 출두(出頭)시키든지, 아니면 석방(釋放)하든지 하라고 심하게 독촉하였다.
마침내 관아에 호출되어가서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말이 참말이냐?
하고 묻는 관장에게 그는 대답하였다.
예, 과연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합니다.
너의 공범을 대라.
저와 같이 천주를 섬기고 그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마음이 간절한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원(元) 야고보는 자기와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와 방(方)프란치스꼬와 정(鄭) 베드로가 같이 순교(殉敎)하기 위하여, 서로 고발(告發)하자고 한 약속(約束)에 따라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元) 야고보가 아주 적극적인 밀고(密告)를 한 사실(事實)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 분명히 말 하여라!
만 번 죽는다 해도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관장(官長)은 주리를 틀고 주장(朱杖)질을 하고 매를 때리는 등 여러 가지 형벌(刑罰)을 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원(元) 야고보는 홍주(洪州)의 진영(鎭營)으로 이송되어 갔다. 그는거기서 여러 차례 천주교(天主敎)의 진리(眞理)를 설명하였고, 두세 번 무서운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그는 다시 덕산(德山)으로 환송(還送)되어, 거기서 또 몹시 맞아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⑦ 마침내 감사(監司)의 특별한 명령(命令)으로 원(元) 야고보는 충청도(忠淸道)의 병사(兵使) 주재지인 청주(淸州)로 압송(押送)되었다. 그가 떠나는 날, 그의 아내와 자식(子息)들과 몇몇 친구(親舊)들이 울면서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고서 말하였다.
천주를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인간 본성의 정을 따르지 않아야 하네. 모든 고생과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에, 천주와 착하신 마리아 곁에서 서로 만나게 되네. 자네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을 흔들고, 내게 해로울 수밖에 없네. 그러니 제발 이성을 따라 내 눈앞에는 나타 나지 말게.
이렇게 말한 다음 그들을 돌려보냈다. 전에 그의 첩(妾)이었던 여자도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왜 대사를 그르치게 하려는가?
하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⑧ 청주(淸州)에 이르러 그는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영장(營將)은 그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며 배교(背敎)시키려고 하였으나, 원(元) 야고보는
저는 9년째나 천주를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영장(營將)은 성이 나서 하루 종일 그에게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가하게 하였다. 이튿날 다시 시작하여 거의 한 달 동안을 매일 그렇게 하였다. 태장(笞杖), 주장(朱杖), 곤장(棍杖), 주리 등 온갖 종류의 형벌(刑罰)이 가해져, 마침내 원(元) 야고보는 기미(己未)(1799)년 3월 13일 매를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⑨ 그가 죽은 후 그의 육체(肉體)는 이상한 광채(光彩)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이 이 기적(奇蹟)을 목격(目擊)하고, 거의 50가까운 가족(家族)이 입교(入敎)하는 기회가 되었다.
2) 정(鄭) 베드로의 순교
① 정(鄭) 베드로는 덕산(德山) 고을의 양민(良民) 집안 출신인데, 입교(入敎)하기 전에는 성격(性格)이 격렬(激烈)하고, 힘이 비상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무서워하였다.
② 그는 천주교인이 되어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손으로부터 세례(洗禮)를 받는 행복(幸福)을 누렸다. 그대부터 그는 겸손(謙遜)하고 온순(溫順)하며 친절(親切)하여졌다.
③ 얼마 동안 신부(神父)를 돕기 위하여 같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내포지방(內浦地方) 회장(會長)으로 임명되어, 기도(祈禱)와 신심독서(信心讀書)를 부지런히 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激勵)하는 데 전념(專念)하였다.
④ 1798년인가 1799년에 붙잡혀 덕산(德山) 읍내로 끌려가, 많은 신문(訊問)과 고문(拷問)을 당해야 했다. 그는 용감(勇敢)하게 천주(天主)를 증거(證據)하고, 얼굴에 조그마한 동요(動搖)도 나타내지 않은 채, 선고문(宣告文)에 서명하였다. 옥(獄)에서 그는 함께 갇혀있는 동료교우(同僚敎友)들을 격려(激勵)하였고, 사형집행일(死刑執行日)에 사형수(死刑囚)들에게 주는 식사(食事)를 받고서,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먹 어야 하오. 그런 다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거요.
그는 참수(斬首)를 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0~60세였다.
3) 방(方) 프란치스꼬의 순교
① 방(方) 프란치스꼬는 면천(沔川) 여 고을에서 난 사람인데 감사(監司)의 비장(裨將)이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하였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는 비상한 열심(熱心)이 교우(敎友)들 중에서도 뛰어났으며, 순교(殉敎)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② 1798년에 홍주(洪州)에서 잡혀 6개월 동안 매우 많은 형벌(刑罰)을 당해야 했지만, 그 자세한 내용(內容)은 우리에게 전하여지지 않았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 그와 같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교우(敎友) 둘이 옥(獄)에 있었는데, 관례(慣例)에 따라 사형수(死刑囚)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食事)를 그들에게 갖다 주었을 때, 그 두 교우(敎友)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방(方) 프란치스꼬는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천주(天主)와 동정(童貞) 마리아께 감사(感謝)를 드리고, 동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지만, 사또가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재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는 것이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약에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③ 천주(天主)께서는 그의 권고(勸告)와 격려(激勵)에 효력(效力)을 주셨으니, 그의 두 동료는 자기들의 나약(懦弱)함을 뉘우치고, 오래지 않아 그의 마음에 있는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셋이 다 같은 홍주(洪州) 읍내(邑內)에서 순교(殉敎)하였다. 방(方) 프란치스꼬는 매를 맞아 죽었는지, 아니면 목을 졸려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때는 12월 16일(1799년 1월) 이었다.
4) 배(裵)「관겸」프란치스꼬의 순교
※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와 그의 세 친구 다음으로, 같은 시기(時期)에 같은 도(道)에서 고통(苦痛)을 당한 다른 순교자(殉敎者) 한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다.
① 배(裵)「관겸」프란치스꼬는 당진(唐津) 고을 진목 마을 출신으로, 이벽(李檗)이 천주교를 전하자마자 입교(入敎)하였다. 1791년에 첫 번째로 체포(逮捕)되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관장(官長) 앞에서 배교(背敎)하는 나약(懦弱)함을 보였었다(본고 50쪽 참조). 그러나 이내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② 그는 자기 고을을 떠날 수밖에 없어, 처음에는 서산(瑞山) 고을로 갔다가 그 후 다른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같이, 면천(沔川) 고을 양제(揚堤)로 가서 자리를 잡았으며, 1898년 그곳에 신부(神父)를 모실 희망(希望)으로,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강당(講堂)을 한 채 마련하였었다.
③ 얼마 후에 조화진(趙和鎭)이라는 배교자(背敎者)가 본관(本官)에게 그들을 밀고 하고, 직접 포졸(捕卒)들을 데리고 동네로 왔었다. 배(裵)「관겸」프란치스꼬는 10월 3일에 체포(逮捕)되어 홍주(洪州)로 압송되었다.
④ 다른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을 대고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强要)하려 하였으나, 가장 혹독(酷毒)한 형벌(刑罰)로도, 그에게로부터 어떠한 고발(告發)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자주 신문(訊問)을 당하였고, 그 다음에는 병사(兵使) 주재지이며 병영(兵營)이 있는 청주(淸州)로 이송(移送)되어, 원(元) 야고보와 다른 교우수인(敎友囚人) 들과 고통을 같이 하였다.
⑤ 그가 옥에서 보낸 마지막 몇 달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fj나 그가 영웅적(英雄的)인 인내(忍耐)로, 고문(拷問)을 견디어냈다는 것만은 알려져 있다. 그의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뼈가 드러났었다. 마침내 그는매를 맞아 죽으니, 나이는 약 60세였다. 그의 집안에서 그의 순교일(殉敎日)이라고 전하여 내려오는 날짜는 기미(己未)(1799)년 12월 13일이다.
※12월 15일에 매를 맞아 죽은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와 인(印)「은민」마르띠노의 순교(殉敎)도 같은 해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와 인(印)「은민」 마르띠노의 순교
①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덕산(德山) 고을 황토실의 부유한 양민(良民) 집안의 자손(子孫)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꿋꿋하고 약간 고집스러운 성격(性格)으로, 동무들 가운데서 특히 눈에 띄었었다. 아직 어렸을 때에 아버지를 잃어, 제멋대로 행동(行動)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는 모든 정욕(情慾)을 마음껏 만족시키게 되었고, 어떻게나 난폭(亂暴)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抑制)할 수가 없었다.
② 그러나 24세 때에 황심(黃沁) 토마스에게서 천주교(天主敎)를 배워 입교(入敎)하여, 잠간 사이에 어떻게나 소행(所行)을 고치고 본성(本性)을 억제(抑制)하였던지, 그의 조용하고 단정(端正)한 처신(處身)이 오래지 않아 모든 이를 감화(感化)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는 비록 결혼(結婚)할 마음이조금도 없었으나, 자기 어머니에게 순종(順從)하기 위하여 결혼을 했다.
③ 그의 열심(熱心)은 날로 더하여졌고, 보속(補贖)과 고행(苦行)에 열중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故鄕)을 떠나 산 중에 들어갔었다는 말까지 있다. 거기서 그는 나물만 먹고 살며,
천주(天主)를 섬기고 자기 영혼(靈魂)을 구하기 위해서는, 금욕(禁慾)을 실천하든가 순교(殉敎)함으로써 목숨을 바치든가 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천주의 진정한 자녀(子女)가 되는 방법이다. 하고 되뇌었다고 한다.
④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迫害)가 시작되었을 때,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그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 가족(家族)과 동네 교우(敎友)들을 격려(激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예수의 수난(受難)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고 천국(天國)을 얻을 수 있는 이렇게도 좋은 기회(機會)를 놓치지 말라고 권하였다. 자기가 오랫동안 무사(無事)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하루는 술을 많이 담그라고 이르며,
이것은 마지막 잔치를 차려서 온 동네를 대접하려는 것이니 빨리 해야 한
다. 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捕卒)들이 나타나 그에게
네가 천주교인이냐? 고 물었다. 그는
나는 천주교인일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당신들이 나를 잡으러 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포졸(捕卒)들을 후히 대접(待接)하고 나서 체포(逮捕)되어 관장에게 끌려갔다. 관장(官長)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천주교인이냐? 그리고 고향이 어디냐?
저는 분명 천주교인입니다. 고향은 덕산(德山)입니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
제 선생님과 동교인(同敎人)들은 제 고향에 있습니다. 책으로 말씀드리면, 몇권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모두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사또께 바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기에 그 책을 내게 보일 수 없단 말이냐?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께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관장(官長)은 이 대답을 듣고 기분이 상하여, 혹독(酷毒)한 매질을 시킨 후에 옥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⑤ 그러나 감사(監司)가 이 사건에 대한 통지(通知)를 받고,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를 그의 출생지(出生地)로 넘기라고 명령하였으므로, 그는 해미(海美)로 이송되었는데, 그때의 해미(海美) 영장(營將)은 두 고을을 함께 맡아서 담당(擔當)하고 있었다. 이 영장(營將)이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네 부모와 조상들의 산소를 버리고, 5백리나 되는 다른 고을에 가서 살았으며, 또 어찌하여 그 고약한 도(道)를 따름으로써, 국왕(國王)이 금하시는 것을 하느냐?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대답하였다.
임금님과 관장들이 알지 못하는 성교(聖敎)를 어찌하여 그렇게 모욕적(侮辱 的)으로 규정하십니까? 사람의 기원(起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시라면, 어떻게 우리의 대군대부(大君代父)이신 천주를 공경(恭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국왕과 관장들이 무식하다고 하니 그래 그분들이 너만 못하는 말이냐? 그리 고 무엇 때문에 외국의 도를 따른단 말이냐? 그 도리(道理)가 좋은 것이라면, 너만 못지않은 국왕(國王)과 관장(官長)들이 그것을 신봉(信奉)할 것이다. 너 는 근본을 무시하는 대역죄인(大逆罪人)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 형리(刑吏)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여, 갖가지 형틀을 준비시키며, 성난 말투로 거듭 말하였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하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가 거절하자 주장(朱杖)질을 시켰다. 이보현(李步
玄) 프란치스꼬는
어디나 선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면 저와 같이 다루실 것 이니, 제가 죽을지라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성이 잔뜩 난 영장(營將)의 부추김을 받아 형리(刑吏)들이, 잔인성(殘忍性)을 배가(倍加)하여 여러 번 주리를 틀었으나 헛일이었으니,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꿋꿋하게 버티며 뇌었다.
안됩니다. 십만 번 안됩니다. 저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고문(拷問)을 한나절 이상이나 가하여,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여러 번 까무라쳤지만 굴복(屈伏)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에게 큰칼을 씌워 옥(獄)으로 도로 데려갔다. 비록 그의 온 몸은 상처(傷處)투성이였으나, 마음은 만족(滿足)스럽고 기뻐서 기도(祈禱)를 드리고, 함께 갇힌 다른 사람들을 격려(激勵)한 다음, 그가 늘 하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의 신비(神秘)를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⑥ 둘째 번 신문에 영장(營將)은 무서운 형구(形具)를 늘어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번에는 네가 피할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을 고백하고 천주교인들의 천주를 배반하라!
그러자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민이 자기의 임금님을 배반하면 그에게 벌을 주십니까? 상을 주십니까?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녹을 받으시니 저를 법대로 다스리십시오
이렇게도 끈기가 있는 데에 몹시 놀란 영장(營將)은 감사(監司)에게 보고(報告)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감사(監司)는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가 아무것도 고백(告白)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답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증거자(證據者)는 다시 진영(鎭營)에 끌려 나가 또 한번 갖은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마침내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게 되어 영장(營將)이 그에게 선고문(宣告文)을 내주니,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어떻게나 기쁜 표정(表情)으로 그것에 서명(署名)을 하였던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⑦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갔고, 다음날 사형수(死刑囚)에게 주는 음식(飮食)을 갖다 주었더니 아주 기쁘게 먹었다. 그런 다음 장터에서 조리를 돌리고 나서, 치기 시작하였다. 망나니들은 각기 거적을 앞치마 모양으로 앞에 두르고, 오랫동안 힘을 다하여 매를 쳤다. 그러다가 그 희생물(犧牲物)이 이내 마지막 숨을 거두지 않으므로, 그를 자빠뜨려 놓고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후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었는데, 그의 얼굴은 아주 싱싱하고 웃음을 띠고 있음을 동네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러 외교인(外敎人)들이 입교(入敎)하였다고 한다.
⑧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꼬는 인(印)「은민」마르띠노를 자기 승리(勝利)의 당당한 동료(同僚)로 얻었다. 인(印)「은민」마르띠노는 덕산(德山) 고을 주래(지금의 예산군 삽교면 용동리)에사는 젊은 양반이었는데, 성격이 꿋꿋하고 온순하였으며 괘 많은 공부를 하였다.그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 진사(進士)와 친교가 있어, 그에게서 천주교(天主敎)를 배웠다.
⑨ 입교(入敎)하자마자 그는 조상(祖上)들의 신주(神主)를 단지에 넣어 강물에 던졌다. 그런 다음 그는 서울로 올라가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洗禮)를 받았다. 그는 요셉이라는 자기 맏아들을 신부(神父) 곁에 남겨 두고, 둘째 아들은 그때 교우(敎友)들 중에 명성(名聲)이 높던 집안에 장가를 들였다. 그리고 나서는 집과 재산(財産)을 버리고 공주(公州) 고을로 이사를 갔다. 외교인(外敎人)인 그의 친척(親戚)들은 그가 왜 그렇게 괴상한 짓을 하는지 이해(理解)하지 못하였으므로, 인(印)「은민」마르띠노는 그들에게 그 이유(理由)를솔직히 말하여 주며 천주교(天主敎)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끌지는 못하였다.
⑩ 공주영문(公州營門)의 포졸(捕卒)들에게 체포(逮捕)되어 자기가 천주교인(天主敎人)임과 천주(天主)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명백(明白)히 말하였다. 청주(淸州)로 보내져서 어떻게나 심한 고문(拷問)을 당하였던지,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의 출생지(出生地), 진영(鎭營)이 있는 해미(海美)로 송환(送還)될 때에는 역참(驛站)에서 역참으로 정부의 역마(驛馬)를 타고 가야만 하였다. 그의 끈기가 한 순간도 변하지 않자 영장(營將)은 어쩔 수가 없어, 이보 현(李步玄) 프란치스꼬 모양으로 때려죽이라는 판결(判決)을 받았다.
⑪ 관례(慣例)의 식사(食事)를 그에게 갖다 준 다음, 포졸(捕卒) 20명가량이 그를 붙들고 사형선고(死刑宣告)의 집행(執行)에 나섰다. 형을 받는 동안 인(印)「은민」마르띠노는
그렇구 말구!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하고 여러 번 되뇌었다.
마침내 망나니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가 부서졌다. 거룩한 증거자(證據者)는 이런 형벌(刑罰)로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주여! 이 영혼을 위로하소서! -Gabriel)
※ 정조(正祖)의 승하(昇遐) 직전의 상황(狀況)
① 위에서 보아온 사형(死刑)의 집행(執行)과, 또 다른 도(道)에서의 여러 천주교인(天主敎人) 집단(集團)의 피를 흘리게 한, 또 다른 사형(死刑)의 집행(執行)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 재위(在位) 중에는, 조선에서 전반적(全般的)인 공식적(公式的) 박해(迫害)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임금은 성격(性格)이 꽤 온건(穩健)하여 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王은 남인에 속하는 유명(有名)한 몇몇 천주교인(天主敎人)을 매우 존중(尊重)하였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이 새 종교(宗敎)를 따르는 것을 알고, 사실(事實)을 조용하게 몸소 검토(檢討)하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 번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의 신문(訊問)을 주관(主管)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신대보(申大甫) 베드로는 그의 편지(便紙)에 이런 신문(訊問) 중 하나의 진기(珍奇)한 부분을 남겨 주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최필공(崔必恭) 토마스가 기미(己未)(1799)년 3월에 당해야 했던 신문(訊問)인 것 같다. 그것을 여기에 그대로 번역(飜譯)하여 놓는 바이다.
②『국왕(國王) : 나도 천주교 서적을 읽어 보았다만, 네 생각에는를 불도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교우(敎友) :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 되옵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이 천주의 은혜에 의해야만 생겼사옵고, 보존되는 것도 또한 다른 은혜, 즉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시며, 우주의 어버이시며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구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원리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나이까? 여기에는 참된 길과 참된 지식이 있나이다.
국왕(國王) :그러나 네가, 만물의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이가,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악한 자들에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교우(敎友) : 중국 역사를 읽사오면 성탕(成湯) 임금께서 당신의 온 백성이 7 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사 손톱을 깎으시고 머리를 자르시고, 초석(草席)을 두르시고 상림(桑林) 빈들로 나가셨다. 울으시며 고행(고행)을 하시고, 당신이 친히 지으신 기도문을 읊으시며 당신을 제물(祭物)과 희생(犧牲)으로 드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풍족한 비가 2천리가 넘는 지역에 내렸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백성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임금님을 성왕이라 불렀다. 하옵니다. 그러하온데 구속의 은혜는 얼마나 더 크옵나이까?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세상 만물이 이 구속(救贖)에 젖어 있사옵고, 그것으로 보존되나이다. 전하(殿下), 그러하오므로 전하께옵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하옵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국왕(國王) : 그러나 불도(佛道) 또한 가볍게 다룰 것이 아니다.「佛」이라는 이름만도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다는 뜻이어서 비길 데 없는 이름이거늘, 어떻게 너는 감히 그것을 경멸하여 말하느냐?
교우(敎友) : 그 이름이 아니었던들 그가 무엇으로 자기를 방어할 수 있었
겠나이까? 그러므로 그 이름을 도용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사실은 전하께서「佛」이라고 부르시는 석가여래는 정반왕(淨飯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아들로 인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나 홀로 위대하다’ 고 말하였사오니, 그것은 가소로운 교만(驕慢)이 아니오니까? 그가 어떤 덕행(德行)과 어떤 성덕(聖德)을 가졌기에 그를 경멸하는 것이 죄악이 되나이까?
국왕(國王) :ꡒ진리는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니, 매사가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 보자.
그런 다음 王은 아무런 결정(決定)도 내리지 않고, 교우(敎友)를 옥(獄)으로돌려보냈습니다. 형조(刑曹)에서 이 증거자(證據者)는 그의 솔직함을 심한 매질로 보상(報償)하고, 어쩌면 사형(死刑)으로 보상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王은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고자 하는 대신(大臣)들의 요청(要請)을 물리치고, 얼마 후에 그를 석방(釋放)케 하였습니다.』
③ 같은 해 1799년 여름에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와 정약종(丁若鍾) 아우스띠노를,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고 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王은 상소(上疏)를 올린 사람에게 화가 나서, 그의 품계(品階)를 박탈(剝奪)하고 그 사건(事件)을 거론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런 사실(事實)과 그와 비슷한 여러 가지 사실(事實)이, 천주교인(天主敎人)들에게 마침내 진리(眞理)가 승리(勝利)하도록 할 수 있다는 희망(希望)을 안겨주었다.
④ 대신(大臣)들의 은밀한 반대(反對)와 몇몇 감사(監司)의 잔인한 탄압(彈壓)에도 불구하고, 복음(福音)은 외교인(外敎人)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입교(入敎)하는 사람이 특히 서울에서 늘어났다. 그러나 王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래지 않아 박해자(迫害者)들에게 행동(行動)할 여지를 주었으니, 이 임금은 등창으로 승하(昇遐)하였다. 때맞게 약간 절개수술(切開手術)만 하였던들 임금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나, 조선예법(朝鮮禮法)의 철칙(鐵則)은, 王이 병(病)이 든 경우에도 또 그를 고치기 위해서도, 王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금하였다. 그 종기는 악화(惡化)되어 큰 상처(傷處)가 되었고, 마침내 왕은 재위(在位) 24년(1800년) 6월 28일에 승하(昇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