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을 훑어보면 '신광수'란 이름이 나온다.
1980년 일본인 조리사 하라를 납치한 북한 간첩이다.
한국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된 것은 1985년. 한국 당국에 의해 범죄 사실이 밝혀졌다.
당국은 이 사실을 일본에 알렸고, 당시 한국 신문도 범죄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4년 뒤인 1989년 불가사의한 장면이 시작된다.
일본 사회당 국회의원들이 한국에 수감된 범죄자 29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 중 한 명이 자기 국민을 납치한 신광수였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특사를 통해 그를 석방한 것은 10년 후인 1999년. 이듬해엔 북한으로 보냈다.
그는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우표가 발행됐다.
당시 석방 성명서에 서명한 지바 게이코 의원은 1997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작년 법무장관이 됐을 때 "물정에 어두웠다. 대단히 죄송한 마음"이라고 반성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5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보고를 못 받았다. 받았다면 다른 조치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인 납치를 재확인한 것은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가 일본어 교사 '이은혜'의 존재를 알린 1987년이다.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에 제공한 정보는 '이은혜'의 출신지, 직업, 특기, 특별활동 등 구체적이었다.
일본 당국은 정보를 토대로 초상화 15만장, 전단 130만장을 전국에 배포했다.
일본이 '이은혜'가 납치피해자 다구치(음식점 점원)란 사실을 밝혀낸 것은 1991년이다.
그래도 사회당은 "수사 당국 발표만으론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며 버텼다
. 당시 사회당은 진실에 가장 접근해 있었다.
1988년 피해자 가족들이 가장 먼저 호소한 정치인이 도이 다카코 사회당 서기장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김일성을 잘 알기 때문에 문제를 더 빨리 해결 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1997년 일본 가고시마현 해안에 북한 승무원을 태운 화물선이 좌초했다.
당시 취재를 위해 그곳에 갔을 때 텅 빈 밤거리에서 일본인의 공포를 짐작했다.
아이들은 낮에도 밖에 나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화물선에 납치당할까 무섭다"고 말했다.
북한의 납치 범죄는 모든 국민이 인정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사회당(1996년 이후 사민당)은 2002년까지 납치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광수 사건이 밝혀진 이후 17년, 김현희 증언이 나온 이후 15년 동안 진실에 눈을 감은 것이다.
2002년은 북한 김정일이 제 입으로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해였다.
도이는 "납치피해자에게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려 했다.
사회당은 '조선노동당의 유일한 우당(友黨)'임을 자랑했다.
북한과의 파이프를 정당의 존립 근거로 삼고 막강한 압력단체였던 조총련의 지원을 받았다.
국민의 납치와 죽음에 눈을 감고 조선노동당의 이중대 노릇을 한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사민당은 지금도 북한을 공공연히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념이요, 존재 이유라는데 누가 그들을 말리겠는가.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을 조용히 고사(枯死)시키는 유권자를 말리지 못했다.
한때 중의원 166명을 거느렸던 이 정당의 현재 의원 수는 7명.
거대 야당에서 군소정당 처지로 전락한 것은 진실을 외면한 지난 20년 동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