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흑심(黑心)을 숨긴 산
오 센티 하얀 융단 십사 문(文) 검은 족적(足跡)
바위길 실루엣은 먹구름의 허상인데
천연덕 숨은 암노루 케른만이 아는가
* 거문산(巨文山 1,175m); 강원 평창. 산은 전체적으로 검게 보이며, 정상부는 한 평 남짓한 바위 위에 케른이 있다. 한강의 지류인 평창강의 발원지다. 산꼭대기에 검은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린다는 속설 ‘거문간이‘가 변한 말이다.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금방 사라졌는데, 제법 쌓인 눈길(약5 cm) 위인데도, 검은 바위무더기의 실루엣 때문에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 문(文); 신발의 길이를 재는 단위로, 1문은 약 2.4cm. 14문(24.96cm)은 필자의 등산화 크기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61쪽.
12. 착각(錯覺)의 묘미
잔털이 스멀거려 송충이로 여겼더니
옛 추억 감아올린 수객(水客)으로 보인다나
신나게 비단 두드린 다듬이면 몰라도
* 금당산(錦塘山 1,173m); 강원 평창. 거문산 북쪽 30분 거리에 있어 함께 등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평창강이 흐른 서쪽은 아찔한 절벽 위 소나무가 자라 송충이 머리를 연상시키나, 남쪽에서 보면 다듬잇돌이나 도마같이 생겼다. 정상은 펑퍼짐한 육산으로 조망이 트여 시원하다. 비단 같은 청정계류 금당계곡을 품고 있으며, 산 위에 오르면 “궁당궁당 금당금당” 소리가 난다는, 혹은 산삼 그림자가 비친다는 전설이 있다.
* 수객; 마름꽃의 딴 이름. 익어 단단해진 두 뿔 달린 열매는 물밑에 있어 장대로 감아올려 채취한다. 녹말과 지방이 많아 ‘물밤’이라 부른다. 소년기에 가끔 따먹어 봤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97면.
13. 와불(臥佛)을 깨운 산
옥경(玉莖)을 벌떡 세워 새벽과 간음하다
바위손 윽박질러 종불알을 간질이고
운주사(雲住寺) 와불을 깨워 눈 비비게 만들고
* 종괘산(鍾掛山 375m); 전남 화순. 야트막한 산이나, 촛대바위가 남근마냥 우뚝하고, 종처럼 생긴 봉우리 주변 바위에 바위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머잖아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유명한 운주사의 돌부처를 흔들어 깨울 태세다.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운 이 부처(몸길이 13m 짜리 한 쌍)가 일어나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한다. 능선에 춘란이 지천이다.
* 옥경; 남자의 성기를 우아하게 부르는 말.
* 졸저 정격 단시조집 『鶴鳴』 제 68쪽 ‘운주사 돌부처’ 시조 참조.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76면.
14. 능선의 마술사
갯버들 가지 꺾어 호드기 불어보련
능선은 코브란양 흔들대다 주저앉고
뱀 다룬 굴참 마술사 동냥 손을 내밀걸
* 백양봉(白楊峰 492m); 강원 춘천 남면. 원래 무명봉이나, 백양리 안뱅골 주민들이 그렇게 부른다. 능선은 꼬불꼬불하고 정상 직전 커다란 굴참나무가 우스꽝스럽게 버텨 있다. 두릅이 많아 봄 산행지로 추천하고 싶으며, 경춘선 간이역 경강(京江)역 근처에 먹을거리도 있어 열차등산으로 적합하다.
* 홍랑(紅娘)의 시조 한 수;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기생이라 하여 사랑의 선택권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199면.
15. 상원사(上院寺) 전설
산꿩은 머리 부숴 종소리 울렸나니
암뱀은 원수 풀어 살생(殺生) 보은(報恩) 비겼다네
애증(愛憎)은 뿌리가 같아 집착일랑 버리세
* 치악산 남대봉(1,181.5m);강원 원주. 뱀과 나그네와 꿩의 전설을 간직한 상원사는 남대봉에서 0.7km 떨어져 있다.
* 우리는 사랑했던 까닭에 배신당하면 미워한다. 어쩌면 미워하기 때문에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미워할 까닭이 존재할까? 그래서 집착하면 더욱 미움의 불길이 타오른다.
* 《해동문학》 시선집 제8호 5수 중. 2004년.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부제 산음가 산영 1-561(412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16. 꺼져버린 열정(熱情)
실비는 간지럽고 낙엽은 발을 적셔
십리바위 풀이 죽어 서왕모(西王母)를 마다하이
정화(情火)를 지피려 해도 부싯돌이 없으니
* 봉수산(烽燧山 366.4m); 충남 공주 천안, 금북정맥. 삼남(三南) 대로 중 가장 크고 높은 고개인 교통요충지 차령고개 서쪽 1km 지점이다.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봉수대가 있다. 옛날에 길이가 십리까지 뻗었다는 전설이 담긴 남근석 ‘십리바위’는 풍화작용과 벼락 등으로 5m 정도로 왜소해졌다. 쌍령산(雙嶺山) 팔풍정(八風亭)의 정취를 지닌 고개였으나, 거대한 송전탑이 설치된 기간임도(基幹林道)가 마루금을 차지했고, 밑은 여느 도로와 마찬가지로 현대식터널이 지나가 나그네만 쓸쓸하다.
* 서왕모;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선(女仙)으로, 곤륜산에 살며 불사약을 지녔다 함.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210면.
17. 혓바늘이 돋은 산
한티재 조금 지나 맥 훑기는 반타작
산불 난 관목(灌木) 능선 심곡(深谷)마저 메말라
혓바늘 돋았음에도 푸른 솔샘 까마득
* 침곡산(針谷山 725m); 경북 포항, 낙동정맥. 한티재는 낙동정맥의 절반 쯤 되는 곳. 산불이 난 덕에 산나물과 야생화가 많으며, 터가 좋은지 몰라도 무덤 또한 많다. 산불감시초소 676봉 지나면 키 작은 나무지대인데, 탄 나무의 검댕이가 옷을 다 버려 놓는다. 송림이 무성한 청송은 아직도 멀다. 대동여지도에 사감산(士甘山)으로 표기했으며, 동남쪽 용전지와 뾰족한 계곡이 좋다 함.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17면.
18. 설무도(雪舞圖)
북풍이 가른 대관(大關) 켜켜이 쌓인 돌책
적송에 피는 눈꽃 산객 넋 사로잡나
흩어진 꿈의 편린(片鱗)들 부나방이 되고야
* 제왕산(帝王山 841m); 강원 강릉. 대관령과 능경봉 사이의 백두대간길에서 동쪽으로 빠진 지능선의 최고봉이다. 산길이 비교적 완만한데다, 붉은 소나무가 좋고, 간혹 만나는 바위는 책을 쌓은 듯하다. 눈이 춤추는 아름다운 산이다. 탐욕 쫓는 부나방이 되지 말고, 백설 같은 제왕이 되라!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부제 산음가 산영 제1-496(370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19. 불치의 관음증(觀淫症)
서책을 포개 논듯 겹비늘 아슬아슬
참성단(塹城壇) 일곱 선녀 채화무(採火舞)는 너울너울
배꼽을 훔쳐보다니 관음증은 못 말려
* 마리산(摩利山 469.4m); 인천광역시 강화의 최고봉, 마니산(摩尼山)으로 통한다. 참성단(사적 제136호 465m) 안, 수백 년 풍상을 겪은 쇠처럼 단단한 영목(靈木) 소사나무(천연기념물 제502호) 모습은 분재보다 더 아름답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암릉구간에는 책을 쌓은 바위들이 용비늘처럼 겹쳐있고, 겨울철에는 디디면 곧 무너질 듯 긴장감을 준다. 참성단에 펄펄 내리는 함박눈 장면을, 전국체전용 성화(聖火)를 채취하는 칠선녀(七仙女)로 의인화(擬人化) 했다. 또 이 산은 해풍의 영향을 받아 생기(生氣)가 전국 제일인 신령한 산으로, 자주 찾아 싱싱한 기운을 듬뿍 받도록 하자! 한편 강화는 강화학파(양명학파)를 탄생 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하곡 정제두 한시 한 수를 소개한다.(2017.10. 25)
山溪(산계)-산의 계곡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涓涓流出愛無情(연연유출애무정); 졸졸 새어나오니 정 없음도 사랑해
好看纖源一脈淸(호간섬원일맥청); 보기 좋아라 실낱같은 근원에서 한 줄기 맑은 물
去會江湖千萬里(거회강호천만리); 흘러가다 강과 호수 천만리로 모이나니
洪波誰識此中生(홍파수식차중생); 누가 알겠는가 큰 물결도 여기에서 생긴 것을
歷盡千巖萬壑艱(역진천암만학간); 수천 바위와 많은 골짜기 험한 곳 다 지나지만
如何日夜不曾閑(여하일야불증한); 어찌하여 밤낮으로 한가하지 못 하는가
滔滔萬里奔歸意(도도만리분귀의); 도도히 수만 리를 바삐 돌아가는 뜻은
只在滄波大海間(지재창파대해간); 단지 푸른 파도 일렁이는 큰 바다에 있고 싶어서라오
*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읊었다. 하곡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명징(明澄)한 서정시다.
*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조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다. 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졸저『 名勝譜』 ‘강화8경’ 중 제5경 ‘마니산’ 시조 참조(93면). 2017. 7. 7 도서출판 수서원.
* 빛고을동인 사화집 5수 2004년.
* 졸저 『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산영 제1-161번(155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20. 혈구송(穴口頌)
맹호는 호시탐탐 요혈(要穴)은 꿈틀꿈틀
반도의 생기 담긴 명치뼈를 바짝 조여
황해로 용솟음치니 노도(怒濤)마저 잠든다
* 혈구산(穴口山 466m);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리산 다음 높은 산이다. 용이 머리를 쳐든 형국으로, 정기(精氣)가 충만해, 이름에 걸맞은 요지(要地)이다. 봄 진달래, 가을에 억새가 좋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보면, 강화도는 명치에 해당하는데, 이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쯤 된다고 한다. 보통 퇴모산(退毛山 338.9m)과 같이 등산하며, 진달래의 명산 고려산(高麗山 436m)까지 종주하기도 한다.
* 빛고을동인 사화집 5수 2004년.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4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