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잘사는 세상이란 동서고금에 없다. 누구 하나 그런 세상을 꿈꾸지 않을 자가 있을까.
이승원이 보기에 이 노인은 순진한 이상주의자일 뿐 현실성은 없어 보였다.
해방 후의 정국이 민주주의다, 사회주의다 하고 날이 갈수록 이념논쟁이
더해가는 때 부르조아라는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오는 데 대해
이승원은 솔직히 놀라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승원은 아버지가 그 동안 독립운동가를 돕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자랑스럽고 잘한 일이라 여겼다.
이승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충남 논산에 있는 금융조합이사로 직장을 잡으면서
이사를 하였다. 논산의 중심지는 부창동이었다.
금융조합은 금융계의 대표적 기관이다. 금융조합에 근무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사하던 날은 날씨도 화창했다. 배웅 나온 동네 사람들은
대처로 이사 가니 얼마나 좋으냐고 자기 일같이 기뻐했다.
그들은 날씨가 화창한 걸 보니 이사 가면 부자가 될 것이며,
고향을 절대 잊지 말고 가끔씩은 놀러 오라면서 섭섭함을 대신하여
한마디씩 덕담을 던졌다.
이제 겨우 여덟 살 먹은 현지는 란도셀(어깨에 메는 책가방)
하나만을 등에 메고 이삿짐 뒤에 붙었다. 이사 가기 전날
나름대로 멋을 내려고 이발소에 가서 깎은 단발머리가 신바람
나는 발걸음에 맞추어 바람에 나풀거렸다.
그 시절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 아이들은 반에서 서너 명에 불과했다.
이발소에 못 가는 아이들은 집에서 잘 들지도 않는 가위로 머리를 잘랐다.
그러다 보니 가위가 지나간 자리마다 표시가 나서 어떤 자리는
큰 밭고랑 같고, 어떤 자리는 움푹 파진 늪 같아서 보기가 민망할 지경 이었다.
부창동이라는 데로 이사 가면 어떤 친구들이 있을까?
시계방을 하는 막내고모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자연 더 설레었다.
고모의 아들 정수는 지금쯤은 얼마나 컸을까도 궁금했다.
현우와 현지는 부창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전학이래야 전 학교에서
한 학년도 제대로 다닌 것이 아니어서 입학이나 다름없었다.
아래로 여동생 현숙이는 학교에 가려면 아직 더 자라야 했다.
이사를 했으니 집도 달라졌고 모든 환경이 이전보다 더 좋은 쪽으로 변했다.
집은 금융조합에 딸린 관사였는데 비록 단층이었지만 꽤 넓은 편이어서
일본식인 다다미방 세 개와 그 안쪽으로 온돌방이 두 개나 더 딸려 있었다.
관사의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면 커다란 창고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창고 크기에 걸맞게 비행기 한 대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늘을 날아야 할 비행기가 왜 이곳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비행기가 왜 창고 안에 있어요. 하늘을 날아야지요?”
현지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왜놈들이 전쟁에 패하면 그걸 타고 도망가려고 그랬던가 보다.”
“도망가려고요? 그런데 패하는 게 뭐여요?”
“아, 패하는 거 말이냐? 그건 싸움에서 진다는 뜻이란다.”
‘그렇구나. 싸움에서 지면 도망가야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지는 지지 않기 위하여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현지는 책가방을 열고 먼저 구리인형을 꺼냈다. 첼로를 안고 있는 인형이었다.
책상 앞에 세워놓고 보니 한 개는 너무 쓸쓸해 보였다.
공연히 성질을 부리다가 망가뜨린 바이올린 인형을 생각하니 후회가 되었다.
잠깐 사이 기다나 선생님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곧 지워 버렸다.
이다음 커서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지는 다시 공책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
아이우에오 마미무메모 사시스세소’를 일본어로 열심히 썼다.
글씨가 여전히 삐뜰빼뚤하여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지는 지우개로 지우면서 새로 쓰기를 거듭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승원이 혀를 끌끌 찼다.
“현지야, 아직도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을 모르고 있느냐.
해방이 되었단 말이야.”
“해방이 되었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지요.”-다음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