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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이기 보다 언어적입니다. 복음이라는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εύαγγέλιον(good news, tidings, word)”의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십니다(마가복음 1:14). 예수님의 하나님의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이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나타납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따라,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세상 곳곳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출현은 복음의 출현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복음의 출현은 예수님으로 임한 것이지 종교성과 같은 세상의 속성으로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2. 신약에 나오는 처음 4권은 예수님의 이야기지만 복음서로 불러집니다. 구약에 나오는 처음 5권, 모세5경에 견주어집니다. 모세5경은 창조, 언약, 출애굽과 율법을 담아 창조된 세상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근간이 됩니다. 율법은 창조된 세상에 출애굽 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사는 지침입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율법으로 집약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산다고 확신합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율법의 삶으로 규정되게 됩니다. 이 경우 율법은 단순히 지금의 법과 같지 않습니다. 창조, 언약, 그리고 출애굽을 반영한 지혜의 내용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산다고 여겼습니다. 율법은 지금의 법과 같이 사람이 지키는 행위를 요구하지만, 율법의 지킴은 법의 지킴과 다릅니다. 법의 지킴은 공동의 삶을 위한 기본 규범을 유지하기 위함이지만, 율법의 지킴은 율법을 지키는 속성을 장려하기 위함임입니다. 따라서 법은 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보이게 하지만, 율법은 지키는 이들을 보이게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사람들 가운데서 판단되고 모범으로 칭송되게 됩니다. 즉 율법은 율법을 지키는 이들을 의나 지혜로 돋보이게 합니다. 이 때문에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인과 죄인으로 가르게 됩니다.
4. 율법은 지켜야 될 사항을 규정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이들과 지키지 않는 이들을 분명히 보이게 합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율법으로 보장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율법 외적 조건을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함께는 율법에 내포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지킴에 부여되는 내용으로 언급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지키는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율법을 지킨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율법에 내포되지 않고 율법을 지킴에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을 온전히 담을 수 없음을 보입니다.
5. 구약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산다고 주장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망하고, 그들의 삶은 붕괴되고, 그들은 종살이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예언의 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에 대한 예언은 메시아의 도래로 집약됩니다. 메시아의 예언은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심을 시사합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언약으로 출발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끝맺습니다. 즉 구약은 구약에서 전개되는 언약이 온전하지 않음을 보입니다.
6. 사람이 무얼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조건적인 요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구약은 사람 편에서 무얼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것을 보입니다. 구약은 전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시는 서사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하나님의 함께 라는 언약의 근거에서 말해집니다. 율법이나 종교성은 어떻든 사람의 속성으로 표현됨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말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즉 율법이나 종교성으로 표현되는 사람의 속성은 하나님의 함께를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속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하나님의 함께가 말해져야 합니다.
7. 예수님의 서사를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함께의 언어입니다. 복음은 표면상 예수님의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내용은 하나님의 함께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세상에서 설정될 수 없음으로, 좋은 소식으로 들려옵니다. 비록 예수님이 세상에 사셨지만 예수님은 세상 인물로 서술되지 않고 하나님의 함께를 알리는 좋은 소식으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전제입니다.
8. 사람들은 자신이 무얼 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일반 종교적 명상은 이 점을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가 자신의 개시(initiation)에 대한 조건적 반응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의식하는 한 이 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개시는 하나님과 함께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율법이나 종교가 보이는 한계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함께가 사람의 개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 여기는 통념을 부정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개시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세상에 들려지는 좋은 소식입니다.
9. 사람들이 형성하는 언어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개시함으로 전개됩니다. 일상적 언어 외에도 종교, 철학, 과학 언어는 사람의 의식이 진전되면서 생성됩니다. 종교 창시자, 철학 선구자, 과학 탐구자에 의해 새로운 언어가 창출됩니다. 새로운 언어가 창출되면서 전반적 인간의 의식은 진전됩니다. 교육은 그렇게 창출된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입니다. 배움에 의한 앎은 언어 습득을 뜻합니다. 시험은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지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인공지능은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도록 프로그램 됩니다. 지능은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입니다. 언어는 공동의 언어입니다. 개인의 사적 언어가 아님으로, 교육을 통해 공동의 언어를 습득함으로 공동의 삶이 형성됩니다.
10. 성경에 나오는 복음도 어떻든 언어로 접해집니다. 종교, 철학, 또 과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복음을 종교, 철학, 혹은 과학적 시각으로 복음을 접근하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은 그렇게 읽어져왔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율법을 배경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율법의 언어에 비추어 복음이 부각되었습니다. 바울이나 요한의 서간문은 이 점을 분명히 보입니다. 율법의 언어에 담아질 수 없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내용을 복음이 내포한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언약이 온전히 표현된다고 밝힙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예수님이 세상의 예수님이 아닌 언약의 예수님으로 서사됩니다.
11.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은 속성을 다룸으로 전개됩니다. 세상에 있음은 속성으로 표현되니,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은 세상에 있거나 있을 수 있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적 시각으로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인물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은 역사적 인물,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으로 풀이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예수님으로 시각을 고정하고 복음서를 읽으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합니다. 그러면 복음은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뉴스로 읽어집니다. 일상으로 접하는 뉴스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어집니다.
12. 복음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 서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선포하십니다(proclaim). 선포는 선포된 ‘사건’의 경우(case)를 뜻합니다. 대통령의 전쟁 선포는 나라의 전쟁입니다. 판사가 “죄 있다”고 하면 피고인은 죄인입니다. 야구 심판이 “아웃”하면 선수는 아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경우가 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니 복음의 삶이 경우가 됩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니 죄가 사해집니다.
13. 선포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하면 선포된 삶으로부터 제외됩니다. 심판이 “아웃”이라고 하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버티는 선수는 경기로부터 퇴출됩니다.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 나름 대로 생각하는 이들은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물론 자기 나름의 세상 삶을 삽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선포된 점에서 언어적입니다. 거기에 풀이되거나 판단될 내용이 없습니다. 재판받는 피고인은 판사의 선고를 풀이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경우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복음을 경우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선포된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14. 복음의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 함께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선포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믿음은 종교적일 수 없습니다. 믿는 이의 재량이 아닙니다. 선포된 삶은 자신이 알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선포된 복음은 개인의 종교적 재량에 속하지 않습니다. 선포된 복음의 믿음은 복음에 내재되지, 개인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결정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복음의 선포된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포된 뜻은 선포된 말에 내재되지, 듣는 이의 능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포된 내용은 개인의 내적 체험이나 고양과 상관없습니다. 선포된 언어는 경우인 삶을 보입니다.
15. 종교적 삶과 언어적 삶은 전혀 다릅니다. 종교적 삶은 개인적입니다. 종교성이 개인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로는 개인의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개인들의 모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적 삶은 공적입니다. 언어가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언어를 습득한 개인들은 공적인 언어로 공적인 삶을 삽니다. 습득된 공적 언어는 공적 기준에 부합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약의 언어임으로 복음을 구사하는 이들은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삽니다. 초대 교회는 복음이라는 언어로 함께하는 삶을 보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이라는 언약의 언어로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보입니다.
16. 복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알리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주장하는 것과 다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함께가 전제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킴에는 하나님의 함께가 첨가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함께를 선포함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명시된 규정을 보이지만, 그 규정을 지킴이 하나님의 함께를 보장한다고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함께가 율법에 명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는 이들은 복음을 하나님의 함께로 듣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하나님의 함께로 율법을 지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만 보일 뿐입니다. 개인들의 행위로 언약의 삶은 구현될 수 없습니다.
17.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세상의 왕으로 군림해야 하니 세상 소식으로 말해집니다. 세상 왕의 출현은 세상의 소식일지라도 복음의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삶은 세상의 정치적 내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 속성으로 서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서사하는 내용은 복음서에 보듯이 세상 속성으로 서술되지 않습니다. 세상 속성을 반영하지 않는 영적 언어로 서사됩니다.
18. 교회의 설교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이어갑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함께를 선포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종교적으로 혹은 율법적으로 전개될 수 없습니다. 듣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즉 설교로 선포되는 내용은 조건적일 수 없습니다. 종교적이나 율법적인 가르침은 조건적인 움직임을 들려줍니다. 듣는 이가 어떻게 하면 좋아지리라는 교훈의 형태를 취합니다. 설교를 듣는 이들은 자신의 향상을 염두에 듣고 듣습니다. 교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함께하게 되는지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의도에 맞추어지는 설교는 복음의 선포일 수 없습니다.
19.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말씀이면 조건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얼 함으로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보이는 바입니다. 복음은 소식으로 전해오니 듣는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복음은 들으면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조건적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들음이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복음이라는 언어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복음이라는 언어의 습득입니다. 아무도 언어의 습득을 결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를 따라 살지 못합니다. 복음의 습득은 이해가 아닌 들음입니다.
20. 그리스도교가 언어적이라는 것은 복음이라는 언어의 파급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교가 언어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선교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교는 사람을 모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복음이라는 언어의 파급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선교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의 속성을 진작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언어의 파급성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라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복음이라는 언어를 의식하여, 그 언어에 준한 삶을 삽니다. 복음의 언어는 영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언어에 준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인도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으로 교회이지 교회로 복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