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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4대 대통령(1953~1961년).
제2차 세계대전중 서유럽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했다.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와 아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 아이젠하워의
일곱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1년 봄 아이젠하워 일가는
캔자스 주 아빌렌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은 그의 선조들이 메노나이트교파의 일원으로 정착했던 곳이다.
아이젠하워의 아버지는 크림 공장에서 일했고, 집안 형편은 궁핍했다.
아이젠하워와 그의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심한 노동을 해야 했고, 또 강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는
운동을 좋아하는 쾌활한 청년이었으나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909년 아빌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의 대학 학비를 대주기 위해 1년간 일을 하다가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미식축구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으나
2학년 때 무릎을 다쳐 미식축구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1915년 총 졸업생 164명 중
그는 학과로는 61등, 기율로는 125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후 소위로 임관하여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로 보임되었으며,
그곳에서 덴버 주에서 정육포장업으로 성공을 거둔
사업가의 딸인 매미 제네바 듀드를 만났다.
이들은 1916년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17년에 태어난 첫아들 듀드는 1921년 성홍열로 죽었고,
둘째 아들 존은 1922년에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중
기갑훈련중대의 지휘를 맡아 대위로 승진했고, 수훈장을 받았다.
그 전쟁은 그가 해외로 파견되기 직전에 종식되었다.
1922~24년
파나마 운하 지역에 배속되어
그 지역의 위수사령관인 폭스 코너 준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으며,
코너 준장의 배려로
포트레번워스에 있는 육군지휘참모학교에 입교했다.
이어 프랑스에서 근무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격전장 안내서를 저술했고,
그뒤 워싱턴 D. C.에서 근무하다가
1933년 육군 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
2년 뒤 맥아더 장군을 따라
필리핀으로 부임하여 필리핀 군대의 재건을 지원했다.
그 공로로 필리핀 정부의 무공훈장을 받았고
또 중령으로 승진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이젠하워는 곧 미국으로 돌아와 1941년 3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3개월 뒤에 미육군 제3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곧 미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의 신임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탁월한 군사전략을 입안하여 마셜 장군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자
아이젠하워는 마셜에 의해 워싱턴에 있는 육군 작전 참모부에 배속되었으며,
그는 이곳에서 연합군의 유럽 침공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41년 9월 준장,
1942년 3월 소장이 되었고
이어 육군부의 작전참모부장이 되었다.
1942년 6월
마셜은 366명의 고위장성 중 아이젠하워를 유럽 주둔 미군사령관으로 선택했다.
비교적 음지에서 오랫동안 군생활을 해왔던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군사전략을 잘 알고
조직운영에 재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설득하고, 중재하고, 친절을 발휘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친밀감과 겸손함,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낙천성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배경과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신임과 호감을 얻었다.
1942년 7월에
아이젠하워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연합군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인
횃불작전(Operation Torch)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연합군이 최초로 전개한 대규모 침공작전인 횃불작전은
1942년 11월 8일 시작되어 1943년 5월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그 작전기간 동안
아이젠하워는 나치 독일과 협력한 바 있던
프랑스 제독 장 프랑수아 다를랑 과 공동작전을 펴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은 연합국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1944년 2월,
대장이 된 아이젠하워는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지휘하여
1944년 6월 4일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아이젠하워는 영국 해협을 횡단하여
프랑스로 진격하는 작전계획을 구상했다(노르망디 상룩작전)
1944년 6월 6일
그는 악천우가 곧 호전될 것이라는 예측하에
모험에 가까운 영국해협 횡단 명령을 내렸다.
4,000여 척의 함정에 분승한 약 100만 명의 병력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으며,
프랑스의 중심부를 향해 진격해나가기 시작했다.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해방하고
12월 아르덴 전투에서
독일군의 맹렬한 저항을 분쇄한 연합군은
1945년 3월 7일 라인 강을 도하했다.
5월 7일 독일이 항복했고,
그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1944년 12월에 5성 장군이 되었다.
1945년 6월 미국에 돌아왔을 때
아이젠하워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는 현역에서 은퇴할 예정이었으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그를 마셜 장군의 후임으로
1945년 11월 군 참모총장에 임명함으로써 은퇴는 연기되었다.
그는 2년 이상 전시에 동원된 군대의 해산을 지휘했고
중앙집권화된 지휘체계 아래 각 군의 업무를 통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5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고 존경받는 군인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출간된 〈유럽의 십자군 Crusade in Europe〉은
큰 인기를 모아 그를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대학 총장으로서의 아이젠하워는 별로 유능하지 못했다.
그가 받은 기술 위주의 교육배경과 군 경력은
총장직 수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지식인들에 대한 그의 불신은
교수들과의 원만한 관계형성을 어렵게 만들었다.
1950년 가을 트루먼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최고사령관직을 제의했고
그는 1951년초 파리에 가서 그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그후 15개월 동안 공산주의자의 침략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유럽 지역에 단일화된 군사조직을 창건하는 일에 몰두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첫 출발
1943년초부터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후보로 거명되었다.
개인적인 인품과 군인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쪽으로부터 입후보 제의를 받았다.
19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자신이 공화당원임을 천명했고,
공화당의 동부지역 세력들은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을 요구하고 나서라고
집요하게 설득작전을 폈다.
여러 주의 예비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같은 공화당의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 와 경합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후보지명전에 입후보할 결심을 굳혔다.
1952년 6월 그는 37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면서 미국으로 돌아와
적극적인 유세전에 돌입했다.
1952년 7월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는 태프트 상원의원 지지세력과 치열한 접전 끝에
1차 투표에서 공화당 후보지명을 획득했다.
그의 러닝메이트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리처드 M.닉슨
민주당은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스티븐슨 을
대통령 후보,
앨라배마 상원의원 존 스파크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지칠 줄 모르는 유세전을 펼쳤고,
온화하고 성실한 태도로 미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정직하고 경제적인 정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닉슨을 포함한 많은 공화당 인사들은
트루먼 행정부 내에 친공산주의적인 불순분자들이 있다고 비난하고
이들의 파괴적인 행위를 엄중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닉슨 팀은
39개 주를 석권하고,
442 대 89의 선거인단 투표득표와
3,300만 표 이상의 직접득표를 얻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승리했다.
공화당은 박빙(薄氷)의 차로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2년 뒤에는 양원 모두에서 소수당이 되었다.
2명의 전임 민주당 대통령들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연방정부의 강력한 행정권 발동을 주장하지 않았다.
군 경력과 행정에 대한 제한된 지식 때문에
그는 비서관과 내각의 각료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행정부처의 구체적인 실무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전 뉴햄프셔 주지사였던 비서실장 셔먼 애덤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내에서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애덤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대통령은 나에게 긴급한 업무는 골자만 잘 요약해서 보고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은 가능한 한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국내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재무장관 조지 M. 험프리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공화주의'(modern Republicanism)라고 불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내정책은
세금인하, 균형예산, 경제에 대한 정부통제의 완화,
연방정부 책임의 주정부에의 이양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임대차료·임금·물가에 대한 통제정책은
시한이 만료되어 폐지되었고,
1954년에는 소규모의 세제(稅制) 수정이 있었다.
아이젠하워의 재촉을 받아 의회는 간석지의 유전에 대한 소유권을 각 주로 이양했다.
그러나 전임 민주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정책을 급격히 변경하는 일은 없었다.
인구증가(아이젠하워 재임시 1억 5,500만 명에서 1억 7,900만 명으로 증가)와
해외원조로 인해
미국정부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8년 동안
5년이나 예산 적자를 기록했다.
최저임금은 시간당 1달러로 인상되었고,
사회보장제도는 확대되었으며,
1953년 봄에는 보건부·교육부·복지부가 신설되었다.
아이젠하워의 첫 집권기간 동안
공화당의 우파들은 민주당 집권 때보다 더 빈번히 대통령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당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행정부 내의 공산주의적 영향력을 무책임하게 매도하는
조지프 R.매카시
아이젠하워는 사석에서 매카시 의원을 싫어한다고 얘기했지만
때로는 매카시 지지파들의 맹공을 성원하는 듯 보였다.
수백 명에 달하는 연방정부 공무원들이
매카시의 충성-보안계획(loyalty-security program) 때문에 해고되었다.
매카시의 찬성 아래
미의회에서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미국 공산당).
1954년 봄 5주에 걸쳐 군인사 및 공무원에 대한
매카시의 친공(親共)인사 매도에 대한 청문회가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중계된 뒤
반공(反共) 열풍이 식어가듯이 매카시의 인기도 퇴조했다.
아이젠하워는 외교문제에 크게 신경을 썼다.
그와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는 평화를 성취하고
공산주의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집단방위 협정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아이젠하워는 취임직후 한국을 방문했다.
1953년 3월 요시프 스탈린이 죽자
이를 계기로 아이젠하워는 1953년 7월
6·25전쟁의 휴전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그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국제적 기관의 주도 아래
원자력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한데 모아 공동이용하자고 제의했다.
이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Atoms for Peace) 제의는
1957년 62개 국가가 참여하는 가운데
국제원자력기구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가 결성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1955년 7월
아이젠하워는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영국·프랑스·소련의 정상들을 만났다.
미·소 양국이 군사시설을 끊임없이 감시할 수 있게 하는
'오픈 스카이'(open skies) 제의는
세계 여론의 환영을 받았으나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1954년 9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이 기구의 참가국은
미국·프랑스·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타이·파키스탄 등이다.
NATO는 1955년 서독이 가입함으로써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비판가들은 외교분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언동(言動)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평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 [蔣介石]에게
미국의 원조 없이 장제스 임의로 행동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겠다고 위협했다가
태도를 바꾸어 1954년 12월 장 제스의 중국 침공을 금지시키는 방위조약을
타이완과 체결했다.
덜레스는 공산국가의 포로가 된 인민들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했으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동독(1953)과 헝가리(1956)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탄압하는
소련의 행위에 항의하는 정도로 그쳤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약속했으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호치민 게릴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재정적·군사적인 면으로 한정시켰다(인도차이나 전쟁)
1955년 9월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1956년 6월 회장염(回腸炎) 수술을 받게 되자
아이젠하워가 2번째 임기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회복되었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제1차 투표에서
아이젠하워와 닉슨을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민주당은 애들라이 E.스티븐슨을 다시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테네시 주 상원의원 이스테스 키포버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아이젠하워의 높은 인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1936년 이래 가장 큰 득표차를 기록한 압승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다시 한번 상원과 하원 모두를 장악했고
1958년에도 역시 양원을 장악했다.
아이젠하워는 의회가 연속 3차례에 걸쳐 야당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첫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6년의 대통령 선거전은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강제 접수하여 벌어진 중동 사태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이집트에 공격을 감행했고
소련은 이집트를 지지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아이젠하워는
1957년 1월 의회에 나가
이 독트린은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중동 국가들에 미군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이다.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의 흑인차별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미 전역, 특히 남부지역에서 논쟁과 폭동이 발생했다.
1957년 9월
고등학교에서의 흑백차별을 철폐하라는 연방법원의 지시를 철회하기 위해
오벌 E.포버스 아칸소 주지사가 취한 조치를 중지시키고자
아이젠하워는 아칸소 주의 리틀록
이 조치는
그의 대통령 임기중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아이젠하워는 인종차별에 대한 혐오를 표시했지만
내심 인종통합의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고 보았다.
1957년 민권법 은
1875년 이래 통과된 최초의 유사(類似) 법안이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지구 주위를 도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미국인들은
이같은 소련의 위업에 충격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이젠하워 정부가 군사비를 계속 삭감하여
우주개발계획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우주개발 연구를 증강하고 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한 기금 형성 조치가 취해졌다.
1958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7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지속된 경기침체로 또 한번 위기를 겪었다.
아이젠하워는
인플레이션의 촉발을 우려하여
경기부양책인 조세삭감이나 연방지출의 증가를 불허했다.
1959년 덜레스의 사망으로
아이젠하워는 미국 외교정책의 수행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1959년 12월 유럽·아프리카·아시아를 순방했고
1960년 2월과 3월에는 남아메리카를 순회했다.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니키타 S.흐루시초프
흐루시초프는
1959년 9월
미국 일부 지역을 순회했고 아이젠하워와 개별 면담을 가졌다.
또다른 미·소 정상회담이 계획되었고
개인외교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1960년 5월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흐루시초프는 정상회담을 취소하고 화가 나서
아이젠하워에게 제의했던 소련방문을 철회했다.
아이젠하워는 정찰비행이 4년간 계속되었음을 시인하고,
시의 적절지 못했던 사태에 대해 대부분의 책임을 졌다.
1961년 1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임기 만료 수주 전에
미국은 2년 동안 피델 카스트로의 지배하에 있던 쿠바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많은 비판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나자
의회는 그에게 군의 원수 계급을 다시 회복시켜주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 있는 농장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63년에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 Mandate For Change〉,
1965년에 〈평화의 유지 Waging Peace〉를 발간했다.
이보다 가벼운 내용의 저작으로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하는 얘기 At Ease:Stories I Tell to Friends〉가
1967년에 출간되었다.
노르만디상륙작전(Normandy Invasion)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D-day는 처음에는 1944년 6월 5일로 결정되었다.
D-day가 가까워지자 연합군은 더욱더 맹렬한 공중 공격을 가했고,
상륙부대가 영국 남부의 여러 항구에서 승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일기가 불순해지면서 바다에는 거친 풍랑이 몰아쳤다.
D-day를 연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고민했다.
"연기냐, 강행이냐!
연기를 한다면 노르망디 해안의 조수 조건을 고려할 때
적어도 한 달을 기다려야 할 텐데…."
계속된 고민 끝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이번 작전을 강행한다. 공격 개시는 6월 6일 내일이다."
6일 새벽 최초로 피라미드 부대가 해안에 상륙했다.
동시에 글라이더로 수송된 공병부대가 착륙했다.
이어 독일 방어부대에 대한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이 뒤를 이었고,
얼마 후 4천200여 척의 선박으로 운반된 5개 사단 병력이 상륙했다.
마지막으로 12만 명의 병사들이 프랑스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때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스탈린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처럼 넓은 구상과 웅대한 규모로 전개된 작전은
전쟁 역사상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이 작전을 취재한 신문기자 어니 파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나운 파도를 뚫고 나가는 수천의 선박을 보며 말했다.
"그것은 마치 가장 활기에 넘친 시각의 뉴욕 항이
수평선 저편까지 넓어지면서 전 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송선들은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배 주변 여기저기에 독일군의 포탄이 떨어져 높다란 물기둥들이 치솟았다.
상륙한 부대 전방에서는
혈전을 알리는 외마디 소리와 총소리, 포탄소리가 요란했다.
대기 중인 선박 안에서는
병사들이 구명대를 몸에 두르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해안을 가로지른 철조망 위에는
양쪽의 무수한 사상자들이 죽은 물고기처럼 걸렸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드러난 셈이었다.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6월 7일 셰르부르항을 점령한 이후,
생-로와 캉을 빼앗았다.
마침내 독일군이 센 강 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오랜 숙원이던 유럽 대륙의 제2전선이 형성되었다.
독일 본토를 강타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프랑스는 마치 마술처럼 해방되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이 연합군의 진격을 도왔다.
미 제1사단과 프랑스 제2기갑사단이 파리에 입성하였다.
뒤이어 칸느와 툴롱간의 프랑스 남부가 탈환되었고
서부와 북부도 캐나다군과 영국군에 의해 점령됐다.
그 결과
그해 가을에는 미군이 독일 국경에까지 도달했다.
독일군은
벨기에의 아르덴느 숲에서 최후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군이 독일 국경에 도착하였다.
이제 연합군의 승리는 시간 문제였다.
- 청아출판사의 '이야기미국사',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