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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9일
말씀; 행 9:23-31
제목: 그래도 든든히 서 가는 교회
오늘날 우한폐렴으로 인해 여러 가지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고, 예배도 거리두기로 말미암아 많은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좀 주춤해져서 다행입니다마는 아이들이 학교를 아직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예측은 가능하겠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런 상황, 교회가 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세워지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단들이 득세하는 부분이나, 교회가 거리두기에 호응하지 않은 다는 편견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대상이 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본문을 통해 좀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사회가 교회에 대한 편견은 우리가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한 것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우리가 염두에 두고 봐야할 구절은 31절입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우리가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쓰여진 배경을 알기위해서는 23-30절까지를 보시면 바울에 관한 기록인데요, 아직은 사울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바울이 회심한 초창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편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일에 바울이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보탬이 된 어떤 행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도망 다닌 이야기입니다, 다메섹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리를 타고 탈출해서 예루살렘에 오고 예루살렘에 오니까 먼저 믿는 제자들이 그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자들을 포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든 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바나바 덕분에 간신히 소개도 받고 보증도 받았지만,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다소로 도망간 애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하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해가 갑니까? 여러분 사도행전9장까지 오면서 교회 분위가나 사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 외에는 핍박을 받고 피하여 다 도망가고 흩어졌습니다. 빌립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수 많은 심령들을 주께로 이끌었지만 노골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전도하거나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엄밀하게 복음을 전했지만 성령의 강권하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스데반이 죽고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불어 닥치고 여러 명이 죽게 되고 옥에 갇히고,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예루살렘교회를 다 떠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회심했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사역이나 업적을 남길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고, 그럴만한 시간이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는 이 시점에서 초대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래도 좀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31절 하반 절에 보시면 무엇 때문에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느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나라에서 영광을 받고 그 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세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나라로 가야할 과정 속에 빚어지고 연단과 훈련을 받고 다듬어져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서 많은 사람들 앞에 복음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메시아 관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유대인의 메시아관은 이 땅에 메시야가 와서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강성대국을 만들며 열방을 향해 으뜸이 되는 나라, 이 땅에서 축복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이들에게 바라는 메시야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열정을 대단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메사야가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처녀들이 결혼도 안하고 베들레헴에 진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만큼 메시야를 갈망했다는 뜻입니다. 너무 현실이 어려우니까, 로마에서는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지요, 그러다보니 세금을 내기 위해서 땅을 팔아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종으로 팔려가는 일이 생기고, 로마로부터 간섭을 받으면서 종교적 자유도 억압을 받고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분이 오면 로마를 축출하고 이 땅에 강성대국을 세워 먹을 걱정, 경제적인 걱정, 질병의 걱정, 가난의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니 먹을 것 걱정 없고 병든 자를 고치니 병에서 시달릴 일이 없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니 그 능력으로 군사력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가 사라지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것 아닙니까?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사상과 같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든 목적과 다를 바 없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가 이 땅의 것으로 채워나가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증거가 성공이나 형통함이나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그 분을 드러내는 삶이 성도의 증거가 되어야한다는 말씀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든든함이 바울의 헌신과 능력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주를 경외함’이 초대교회의 든든함과 평안함의 유일한 근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가지는 든든함, 그 확신, 그 힘과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할 때, 성경은 언제나 형통함이나 순탄함이라 그러지 않고 절망과 실패와 난관을 그 근거로 듭니다. 왜냐하면 난관과 절망과 실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만나고 자신의 한계를 만나야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물론 그 직면이 환란과 시련 가운데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바라거나 소망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서 그렇게 직면하도록 이끌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이유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며, 돌보심과 절망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증을 들어도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요, 갑절의 축복의 이야기요, 권능으로 치유함을 받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어려움을 직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그 분만이 내 삶의 최고라고 고백하는 삶으로 이끌고 난 후의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대면하는 일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 속에, 나는 정말 무익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과정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면함이 없으면 기독교는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을 연장시키는 것, 고통을 면하는 것에서, 정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직면하는 일에 난관과 시련과 어려움을 빼놓고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어려움은 어디에 있는가하면 끊임없이 그 고통에서 면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 기도의 내용은 전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없이도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우리가 볼 때 고난과 절망을 만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욥은 범죄 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혹시 부지중에 실수 한 것이 있을 까봐 꼭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뒤에 제사를 지내며, 즉 회개기도와 거룩한 제사를 꼭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의 생애에 불행과 고통으로 그를 간섭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욥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느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신앙이 정금같이 단련되어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자리까지 갑니다.
혹시 이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으시면 분명히 없다고 욥기에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예를 들어 애들이 ‘아빠 공부 안하고 공부 잘하는 방법 없어, 혹시 공부 안하고 1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라고 물으시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운동연습 열심히 하지 않고 금메달 따는 방법이 있을 까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대면하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 한계를 보는 절망과 실패를 맛보아야한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간섭하시는 이 복된 일들에 대해서만은 우리는 눈을 돌리고 등을 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고난과 역경을 통한 방법으로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통해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원하셔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면 자유의지만 주시고 우리가 잘 하면 복을 주고 잘 못하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레위기서입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서 를 초점으로 해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이 구약입니다. 이 39권은 유기적인 상관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옛날의 약속입니다. 혼인 서약하는 것처럼 약속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옛 언약의 중심은 레위기서라고 했는데, 레위기는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거룩한 법도와 거룩한 생명과 규례의 기록입니다. 오경의 중심이며 구약의 핵심인 레위기를 빼놓고 구약을 보면 구약이 안 보입니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오경을 해석하면 신명기는 申申當付 (신신당부)할 때 쓰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썼다는 것입니다 즉 레위기를 가지고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쓴 것을 그대로 다시 쓴 것입니다. 레위기가 본문이고 신명기는 내용을 설교한 것이 됩니다.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어디서 사람의 숫자를 세는가하면 군대입니다. 훈련받기 전의 숫자와 훈련받고 난 후 숫자가 얼마가 되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훈련을 했습니까? 레위기를 가지고 광야에서 훈련을 받는 이야기가 민수입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기 전에 603550명 훈련이 다 끝나고 나서는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훈련이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대로 광야에서 훈련한 책이 바로 민수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애굽입니다. 단지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나왔는가하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는데요, 그러면 시내 산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레위기입니다. 출애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이 있고 땅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헌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온전한 나라로 세우기 위해 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언약, 율법, 즉 헌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시내산에서 맺었다는 것에 의미가 굉장히 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언약을 맺으신 분, 시내 산에서 언약을 주신 그 분이 누구시냐, 어떤 하나님이시냐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인류와 이스라엘민족의 시작과 애굽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원인과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인데요, 애굽에서 너무나 많은 다신 관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참신은 여호와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창조주하시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며, 인간이 타락을 해도 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여인의 후손을 낳게 하시며 그 후손이 번성하여 삶을 사는데 하나님을 떠나 포악한 삶을 살아도 그 중에 8명을 구원하셔서 노아의 방주를 만드시고 인류를 보증하시고 바벨탑을 쌓았을 때도 벌하시지 않으시고 언어만 흩으시고 언어가 흩어지니 나라가 흩어지고 그 중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을 고치시고 요셉을 통해 7년기근 때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는 이런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이 모세오경에서 레위기를 통해 구약이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서 다음에 이어지는 책이 역사서입니다. 역사서는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책이 많아서 복잡하게 생각되겠지만 중요한 핵심을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대로 이스라엘백성들이 잘 지키고 있는지, 지키고 있지 않은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보면 역사서는 다 보입니다. 아합왕이 언약을 지키고 있다, 못 지키고 있다, 이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 히스기야 왕이 언약을 지키고 있다 못 지키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시가서는 뭐냐 하면 역사가운데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언약의 말씀에 따라간 사람들은 복을 주시는데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데 그 복을 받은 사람들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영광 돌리고 지혜와 명철과 잠언과 인생론과 노래를 부른 것이 시가서입니다.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하는데 불순종한 자들을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데 한 번에 내리지지 않고 그릇에 담아 둔 다음에 회개하라고 예언자를 보내게 됩니다. 예언자, 선지자를 통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나 선지자는 미래를 점치려 온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언약을 근거로 잘 못 되었음을 경고해주기 위한 역할이 바로 예언자요 선지자이고 그것이 예언서입니다. 예언서가 많습니다. 그러면 말을 잘 들었다는 뜻입니까? 아니지요.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말씀을 계속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이 바로 예언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즉각적으로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예언자를 보내셔서 경고하시며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2:4-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여기서 레위와 세운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시내 산 언약입니다. 5절에 ‘레위와 세운 언약은’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라기서까지 구약이 올 때까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님은 레위기서를 통해 계속 말씀하고 계심이 무슨 뜻인지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봇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과 평강을 주기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이 생명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나기를 원하는데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끊임없이 말씀에서 떠나 죄악 된 삶을 살아가며 형식적 신앙, 껍데기신앙, 종교화 된 신앙으로 내 자신이 유익됨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위해 고난이 허락되었음을 아신다면,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이 없으면 한없이 교만한 인간의 속성을 안다면, 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셨는지를 알 것입니다.
지금이 참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초경제가 그리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한폐렴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이 우한폐렴으로 인해 패턴이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시대를 좀 더 빨리 앞당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리나라가 상당한 위기에 있습니다. 안보의 느슨함도 문제지만,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가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지 않아싶어서 참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4.15선거에서 보수가 참패를 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적으로 보자면, 황교안전도사가 전면에 나셨고, 전광훈목사가 태극기부대를 이끌었고, 기독당이 비례대표에서 국회의원을 내겠다는 도전장을 21대 국회의원선거에도 내었습니다. 물론 20대보다 표를 적게 었었습니다마는 대부분 기독교목사님들이 보수의 성향을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정치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독교지도자들이 국민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데 안타까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기성세대가 신세대의 마음을 읽지 못했고, 교수가 학생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젊은 이들의 마음,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것은 저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올바로 저들을 이끌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혹시 기독교가 하나님의 의도와 뜻대로 가고 있지 않다면 이게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우리는 사람의 노력과 애씀으로 나라를 바꿀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위기 속에서 이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을 구하고 찾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런 위기와 고난 속에서 결국 하나님이 평강과 생명을 주시고자하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믿음으로 보는 성도들이 되셔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을 일으키자 옥에 가두고 채찍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했다는 것으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어느 것도 지금 초대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해질 외적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됐느냐 초대교회성도들이 세상에서 겪는 이런 시련이 실패가 아니고 그들의 그들이 약한 것이나 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그들이 배운 것입니다.
먼저는 십자가사건을 보십시오. 주님이 처절하게 힘없이 죽은 것 같으나 실패한 것 같으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사울의 회심입니다. 누구도 사울이 회심할 줄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가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회심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져주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저들이 안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왕권을 얻고 빌라도와 로마를 몰아내는 것으로 제자들이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먼저는 온 세상 우주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공의로우심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닥치게 하는 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일로 인해 하나님 앞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 이상 우리에게 닥치는 무슨 일이라도 사망이 우리 앞에 벌어진다하더라도 겁날 것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래서 우리가 형통함이나 세상의 유익으로 우리의 힘을 삼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필요와 원리로만 힘을 갖는 것이요,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며 허송세월의 삶인지 알고 그 분을 구하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삶을 역유하며 역설적인 삶을 살며, 세상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교회가 편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러면 이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충만은 어디서 오느냐하면 고난과 어려움과 시련에서 온다는 말씀이 오늘 핵심된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한폐렴으로 인해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모습을 우리는 두 눈으로 볼 것입니다. 그것은 이 우한폐렴으로 인해, 고난으로 인해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성도들이 기도하며 주를 찾고 갈망한다면 분명히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