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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을 정벌하고 정남(征南)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波飮馬無(두만강파음마무)-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
남이(南怡)
참을성 없는 젊은 혈기로 생명을 단축시킨 남이장군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남이(南怡)장군 묘(墓) 답사기다.
조선왕조 600년 정치사에 대표적인 개혁 정치가라면
정조(正祖),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들 수 있다.
▲정조(正祖)는 술과 담배를 즐기고 성격이 불같았지만 인간미가 풍기는 왕으로 전한다.
정조는 조선왕 27명중에 최고의 개혁군주로 꼽힌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정적(政敵)인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沈煥之)와
사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고 야당 쪽의 인물도 등용하였다.
(조선일보 2009.11.20. 편지 299장 발견)
정조는 건강이 매우 나빠 “종합병원”이라 할 정도로 병치레를 많이 했다.
담배는 골초였다.
정조가 쓴 “일득록(日得錄)”이라는 문헌에 “담배 예찬론”을 남길 정도로 애연가였다.
정조는 담배 맛이 “제호탕(醍醐湯)”보다 좋고, 향기는 난초나 지초보다 뛰어나며
사람에게 유익한 점이 많다고 했다.
“제호탕(醍醐湯)”은 한방의 여름 청량음료라 생각하면 된다.
결국 49세의 젊은 나이에 개혁(改革)의 실현을 못보고 죽었다.
많은 기록에서 반대파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한 독살(毒殺)설이 있지만
필자는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조선시대 개혁(改革)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물이 바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가 민주주의 요람이라면,
우리는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사상과 조선왕조 창업의 밑그림을 그린 정도전(鄭道傳)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운다고 생각한다.
조광조(趙光祖)는 중종반정을 계기로 사림세력(士林勢力)을 영도하는 우뚝 선 거목이었다.
사림(士林)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정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너무 날카롭고 급진적이었던 개혁으로 훈구파(보수파)의 반발로 인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38세로 사형을 당한다.
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열매로 떨어진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과히 조선과 대한민국을 통해서 최고의 석학(碩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 개인 생각)
정조보다 10세 연하인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시절 탁월한 지식과 안목이
같은 개혁가인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남인(南人)인 정약용역시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으면서도 반대파 서인(西人)의 공격에 희생물이 된다.
불행하게도 다산(茶山)의 태산 같은 후원자인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약용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년간의 강진 유배기를 보내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말년을 보내며 인생의 포부를 끝낸다.
조선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국가의 발전 보다는 권력유지가 목적이 아닌가?
▲이 글의 주인공 남이(南怡) 장군 !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20대 나이에 병조판서(兵曹判書국방부장관)가 된다.
그리고 예종(睿宗)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그때 나이 28세.
남이 장군은 1441년(세종23)에 경남 의령사람 남휘(南暉)를 아버지로,
태종의 넷째 딸 종선공주를 어머니로한 왕실을 외갓집으로 태어났다.
남이 장군은 태종의 외손자다.
또 남이 장군은 세조때 실세의 한사람이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인 권람權擥) 넷째 딸과 결혼했다.
하늘을 찌르고나 남은 배경이다.
남이 장군이 27세때인 세조(世祖) 13년 “이시애(李施愛)”난(亂)이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이시애(李施愛)”난은 남이장군에게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맞게 된
사건이다.
이시애(李施愛)”난(亂)이 일어나자 남이(南怡)는 무군대장(撫軍大將)으로 출전하여
난을 토벌 평정하고 그 공훈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다.
27세에 지금의 국방부장관 !
1468년 9월 8일에 세조(世祖)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왕이 된다.
이 무렵 하늘에서는 혜성(彗星)이 나타나서 사라지지 않았다.
혜성(彗星)은 태양계의 작은 행성으로 긴 꼬리가 달려 있으며 옛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전쟁, 기근, 역병과 같은 재난과 재앙의 전조로 여겨진 혜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혜성(彗星)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에 시골 여름밤에 꼬리달린 혜성을 본적이 있다.
혜성이 나타난 어느 날 밤 궁궐에서 숙직을 하던 병조판서 남이가 말하기를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남이 장군의 반대파인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이말을 다르게 만들어
남이(南怡)가 역모한다고 예종(睿宗)에게 고발하였다.
왕 세자 시절부터 남이(南怡)가 세조의 총애를 받고 교만 방자함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예종(睿宗)은 이것을 기회로 옥사를 일으켜 남이(南怡)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남이 장군은 “반짝이다 사라진 별”이 되었다.
이상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남이(南怡)장군의 일생을 요약한 내용이다.
필자는 남이 장군의 짧은 생애를 사실적으로 알기 위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찾아 “남이(南怡)”부분만 정리하여 아래에 소개 한다.
위에 있는 남이(南怡) 장군이 쓴 시 “정남(征南)”은 일부기록에서는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을
“男兒二十未得國(男兒二十未得國)-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얻지 못 한다면”으로
해석하여 사형을 당하였다고 하지만
남이(南怡)가 태어난 세종 23년 1441년부터 남이가 죽은 1468년 사이
세종실록,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에는 위의 정남(征南) 시가 없다.
필자가 여러 고전을 찾던 중에 연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의 실학자(實學者)인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역사책(歷史冊)
“연려기술(燃藜室記述)”에 남이(南怡)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책에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이는 의산위(宜山尉) 휘(暉)의 아들이고 태종의 외증손이다.
용맹이 특별히 뛰어나서 이시애(李施愛)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 선두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1등 공으로 책정되고, 세조가 벼슬 등급을 뛰어 병조 판서로
임명하였더니, 당시 세자이던 예종(睿宗)은 그를 몹시 꺼리었다.
이때에 와서 예종(睿宗)이 새로 왕위에 올랐는데, 때마침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대궐 안에서 숙직하다가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혜성(彗星)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평소에 남이의 재능과 명성과 벼슬이 자기 위에 있는 것을 시기했는데, 이날 또한 대궐에 들어와 숙직하다가 벽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서 그 말을 엿들었다.
곧 그 말에 거짓을 꾸며 보태어,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은밀히 아뢰어
옥사가 일어나고 마침내 처형되었으니, 이때 남이의 나이는 28세였다.
“국조기사” “동각잡기”
남이(南怡) 장군에 대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읽으면서 느낀 생각은
남이(南怡) 장군이 왕을 외가(外家)로 두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고
용맹과 혈기가 대단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28세에 국방부장관이 되니
요새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남의 눈에 비췄을 것 같다.
그기에다 훗날 연산군때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켜 사림파(士林派)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간신배 유자광(柳子光)의 손에 걸렸으니 남이(南怡)가 무사할리
없었다.
아래의 남이(南怡) 장군이 출세하고 죽은 기간을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에서 남이(南怡)부분만 요점만 간추려 소개 한다.
필자의 욕심 같아서는 남이(南怡)에 관한 실록(實錄) 전부를 소개하고 싶지만
너무 내용이 방대하여 읽지 않을 것 같아서 요점만 기록한다.
※실록(實錄)에서 어려운 한자(漢字)말은 필자가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꾸었다
그러나 원전(元典)의 내용을 변경시키지 않았음을 알린다.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13년(1467년) 5월 16일
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반역을 모의하고 난을 일으켰다.
▲세조13년(1467년) 5월 19일
이시애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으므로 신숙주, 한명회를 가두게 하다
▲세조 13년 (1467년) 8월 12일
도총사 이준 등이 이시애(李施愛), 이시합(李施合)을 체포하여 문초한 후에 처형하다
이시애와 이시합의 사지(四肢)를 찢어 죽여서 5진(五鎭)에 전(傳)하여 보였다.
▲세조 13년 (1467년) 8월 24일
행호군(行護軍) 남이(南怡)가 유둔병(留屯兵) 상황을 왕께 보고하였다
세조가 유둔병(留屯兵) 대책을 유시하다
*유둔병(留屯兵)-난을 평정후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남겨둔 군인(필자 주)
행호군(行護軍) 남이(南怡)가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함길도(咸吉道)에서 오니,
임금(세조)이 집상전(集詳殿)에서 불러 보았다.
남이(南怡)가 아뢰기를,
“북방(北方)이 이미 평정되었는데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오히려 군사를 풀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므로, 단지 4천 명과 장수 5, 6인만 남겨 두고 왔습니다.
또 아뢰기를,
“북방(北方)이 날로 추워지는데, 사졸(士卒)의 옷이 없으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군사를 너무 속히 파(罷)하였고, 남아 있는 군사가 단약(單弱)하다고 하여, 속히 교대(交代)할 군사를 보내고자 하니, 남이(南怡)가 아뢰기를,
“경군(京軍)으로 교대(交代)시키면 그 폐단(弊端)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함흥(咸興) 이남 4곳에 유둔(留屯)하는 3천 명의 군사는 모두 겨울옷을 준비하고 휴식(休息)하기를 이미 오랫동안 하였으니, 이들로써 대체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
그대들의 난을 평정후 후속 처리는 잘한 일이다
▲세조 13년 (1467년) 8월 27일
남이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이(南怡)의 계급(階級)을 특진(超資)시켜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임명하다.
▲세조 13년 (1467년) 9월 21일
남이에게 두만강 국경(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을 정벌하도록 명령하다
▲세조 13년 (1467년) 12월 27일
남이(南怡)를 공조판서(工曹判書상공부장관)로 임명하다
남이 나이 27세 때다
▲세조 14년 (1468년) 3월 23일
공조 판서(工曹判書) 남이(南怡)가 무거회시(武擧會試)에 나갈 것을 청하자 세조가 윤허하다
*무거(武擧)는 무과의 시험을 말하고 회시(會試)는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두 번째 보는 시험이다. 무거회시(武擧會試)는 무과에 합격한 사람이 또 시험을 보는 것이다.
남이(南怡)는 무과(武科)에 합격했는데 자신이 있어서인지 다시 한 번 더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까 세조가 허락을 한 것이다.(필자 주)
▲세조 14년 (1468) 3월 27일
세조가 남이(南怡)를 중시(重試)에 나가지 말게 하다
헌납(獻納) 조간(曹幹)이 아뢰기를,
“판서(判書) 남이(南怡)는 경진년(庚辰年)에 처음 무거(武擧)에 등제(登第)하고,
병술년(丙戌年)에 재차 발영시(拔英試)에 등제하였는데,
이제 또 시험에 나아가기를 청하니, 초시(初試)는 다른 예(例)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세조가 전교하기를,
“내가 잘못하여 중시(重試)에 나아가려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게 하라.”
이어서 남이에게 하교하기를,
“경(卿)의 재망(才望)은 본시 나타났으니, 만약 장원(壯元)하지 못하면,
재주를 상(傷)하고 희망을 덜게 되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라.”
하니, 남이가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선언(宣言)하기를,
“성상께서 신에게 명하시기를,
‘너의 이름을 천하에 들렸으니, 용이하게 시험에 나아감은 불가하다.’고 하셨다.”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남이(南怡)가 초시(初試)에 나아가기를 청한 것은, 전일에 장원(일등)하지 못함을
한(恨)하여, 이제 다시 과거에 나아가면 장원할 것으로 여겨서이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에 성상께서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노상(路上)에 말을 세우고,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등제(登第)하려 하느냐?”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臣)은 나이가 젊고 지위가 높아 상덕(上德)이 심중(深重)한 까닭으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여, 성상께서 가상히 여겼는데,
이 말이 어찌 속마음에서 나왔겠는가?” 하였다.
▲세조 14년 (1468) 5월 1일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오자경 등에게 사후(射侯활쏘기)하게 하다.
실언(失言)한 남이(南怡)를 옥에 가두다
남이(南怡)는 활 잘 쏘는 김연근(金連根)ㆍ신정보(辛井保) 등을 천거하고
유자광(柳子光)은 최강(崔岡)을 천거하므로, 또한 명하여 불러서 쏘게 하였다.
최강이 많이 맞추어서 활 1장(張)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또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어서 다시 쏘아서 많이 맞춘 이숙기에게 주었다.
남이(南怡)는 일찍이 대장(大將)이라 자칭하며 한때 무사(武士)를 멸시하였는데,
이날은 여러 번 쏘아도 맞추지 못하므로 임금이 웃었다.
그 때에 세자(世子훗날 예종)와 아종(兒宗),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 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여 술자리를 베푸는데,
남이(南怡)가 취(醉)하여 왕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그윽이 그르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귀성(龜城)은 지친(至親)이고 또 큰 공(功)이 있으니, 귀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사랑하겠느냐?
너의 말은 반드시 정실(情實)이 있으니,
누구와 함께 의논하였느냐?”
하였다.
*구성군(龜城君)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아들이다(필자주)
남이가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끌어내다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가두게 하였다.
임금이 제장(諸將)을 불러 말하기를,
“남이(南怡)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
하니, 이숙기(李淑琦)가 대답하기를,
“심히 옳지 못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무리도 이와 같은 말을 발설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남이가 아니데 어찌 남이의 망령된 말을 발설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유자광(柳子光)을 불러 말하기를,
“남이(南怡)의 말이 옳으냐?”
하니, 유자광이 말하기를,
“심히 옳지 못합니다.”
하매, 임금이 또 승지(承旨) 어세겸(魚世謙)을 불러 말하기를,
“남이의 말이 옳으냐?”
하니, 어세겸이 잘못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세겸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하였더니,
승지가 된 이후부터는 그 옳음을 보지 못하였다.”
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세종조(世宗朝)의 승지를 겪어 보건대, 사람들이 모두 직분을 일컬었으니,
어찌 금시(今時)의 정원(政院)과 같겠느냐?”
하였다.
잠깐 있다가 명하여, 세자(世子)와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술을 올리고
일어나 춤을 추게 하며, 9기(妓)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기를,
“누가 대장군(大將軍)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
누가 천하를 평정(平定)하였는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천하(天下)의 인물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소자(少子)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대훈(大勳)인가? 귀성군이로다.”
하고, 또 한명회(韓明澮)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고,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기를,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귀성군이로다.”
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로 하여금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기를,
“누가 무훈(無勳)인가? 영순군(永順君)이로다.”
하고, 다시 부르게 하여, 한껏 즐기고는 파(罷)하였다.
*여기에서 젊은 남이(南怡)의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가 나타난다.(필자 주)
▲세조 14년 (1468년) 5월 2일
남이(南怡)를 석방하고, 겸사복장(兼司僕將)을 파직하였다.
사람이 위로를 하는데 남이(南怡)가 대답하기를,
“내 말은 진실로 옳으니, 이것은 실로 죄가 없다.”
하니, 듣는 자가 소름이 끼치고 오싹(竦然)하여 해괴하게 여기었다.
▲세조 14년 (1468년) 5월 22일
사신의 말을 듣고 활을 당긴 남이와 낭장가로를 처벌하였지만
세조가 명하여 남이(南怡)는 용서하고, 낭장가로와 말을 준 사복시(司僕寺)의
관원(官員)은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세조 14년 (1468년) 5월 25일
남이가 다시 취처(娶妻다시 장가 듬)할 것을 청하니,
세조가 임의대로 하라고 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남이(南怡)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함길도(咸吉道)에 정벌(征伐)하러 나갔을 때에 신의 어미가 질병이 있어,
신(臣)이 아내를 보려고 하여 사람을 시켜 불렀는데, 신의 아내가 대답하기를,
‘천첩(賤妾)을 내친 뒤에야 가서 보겠습니다.’ 하며, 끝내 와서 보지 않았고,
또 신이 다시 북방(北方)에 나갔을 때에도 모두 사람을 달려보내어 위문(慰問)하지
않았으니, 이미 어미에게 불효(不孝)하고 또 지아비에게 불순(不順)하여 부도(婦道)에 합당하지 못하였으니, 원컨대 다시 취처(聚妻 다시 장가들게)하게 하소서.”
하니, 어찰(御札)로 이르기를,
“의리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하니, 숙계(熟計)하여 임의대로 행하여라.”
하였다. 남이의 어미는 성품이 악독하여 자부(子婦)로 하여금 동침(同枕)하지 못하게 하여, 당시의 의논이 분분(紛紛)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세조 14년 (1468년) 7월 6일
임금(세조)이 병이나다
▲세조 14년 (1468년) 7월 17일
남이(南怡)를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임명하다
▲세조 14년 (1468년) 9월 8일
세조(태상왕)이 수강궁의 정침(正寢)에서 훙(薨죽다)하다
■예종실록(睿宗實錄)
▲예종 즉위년 (1468) 9월 7일
남이(南怡)에게 병조판서(兵曹判書) 관직을 제수하다
형조판서(刑曹判書) 강희맹(姜希孟)이
일찍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말하기를,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兵事)를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하다.”하였다.
한계희가 임금에게 아뢰어, 박중선을 다시 병조 판서로 삼고
남이를 의산군(宜山君)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 삼았다.
▲예종 즉위년 (1468) 10월 24일
유자광(柳子光)이 남이(南怡)의 역모 사실을 고하니 남이를 붙잡아 실상을 묻다
▲예종 즉위년 (1468) 10월 27일
반역을 꾀한 남이를 환열(轘裂)시키고
7일동안 효수(梟首)하다
*효수(梟首)-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음
*환열(轘裂)-사람의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임 필자 주)
이때 남이의 나이 28세였다.
아깝다 !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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