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대한제국기 문신, 일제강점기 항일애국운동가, 교육자인 홍필주(洪弼周, 1857년~1917년)의 유사. 인쇄본. 1책(126장). 서강대학교 도서관 소장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량(士良), 호는 자은(紫隱). 거주지는 아산(牙山).
고조부는 청하현감 홍옥보(洪沃輔), 증조부는 통덕랑 홍덕호(洪德浩), 조부는 홍희락(洪羲洛), 부는 생원 홍가모(洪可謀), 생부는 홍재모(洪宰謀), 모는 진사 권철전(權喆銓)의 따님이다.
1896년 1월 안동 군수(安東郡守)겸 안동부사, 안동부 참서관(安東府參書官),1896년 3월 안동 재판소 검사(安東裁判所檢事)를 겸임하였다.
1896년 8월에 현풍 군수(玄風郡守)로 부임하였고, 현풍 군수 시절에 농상(農桑)을 권하고 수리(水利)를 잘 다스려, 1896년 8월에 현풍에 사는 백성들이 만인산(万人傘)을 지어 올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8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2년간 역임하였다.
1900년 1월 대구관찰사겸 대구 군수(大邱郡守)를 역임하였다.
1901년 중추원 칙임 참의관,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나철. 오기호. 이기등 3명과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렸다.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 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 개척권 위임 계약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전 비서승(前秘書丞) 윤병(尹秉), 전 승지(前承旨) 이범창(李範昌), 전 주사(前主事) 이기(李沂)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 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민들에게 각성을 호소하였다.
1905년 5월 24일 이준(李儁), 윤효정(尹孝定), 양한묵(梁漢黙), 심의승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헌정 연구회에도 참여하였다.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 이후 깊어지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평의원을 맡았다.
1907년 2월에 나철, 오기호, 서창보, 이홍래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계몽 성격을 띤 항일단체 자신회를 결성하고 매국노 처단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25일 을사5적중 권중현을 처단하기 위해 을사5적암살단을 조직하고 권중현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 사살을 기획하였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하였다.
1907년 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해배되었다.
1908년 사립초등교육기관인 훈도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이홍장이 특파한 양계초를 만나 일본제국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함.
1910년 4월 16일부터 열린 국채 보상금 처리회 대총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현재 중앙고등학교인 기호흥학원의 초대 학무부장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85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에서 편집하여 탐구당에서 간행하였다.
1904년 5월 30일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고 일본이 황무지개척권(荒蕪地開拓權)을 요구하자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등 3명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국민에게 발표하고, 1905년 6월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같이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이등박문(伊藤博文) 등 일본의 침략원흉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일황과 이등박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1906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실시되자 장지연(張志淵)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평의원이 되어 동회의 회보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국민정신을 계몽하며 선도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나철・이기 등과 같이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 5적을 주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09년 3월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장지연・권동진(權東鎭)과 같이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으며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1910년 6월 일본 동경(東京)에 재차 건너가 대외중신・두산만(頭山滿)등 일본인을 만나 한국침략을 통렬히 논박하였으며,
그곳에서 이홍장(李鴻章)이 특파한 양계초(梁啓超)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하면서 항일투쟁정신을 나타내었다.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현재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기호흥학원(畿湖興學院)의 초대 학무부장(學務部長)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앞장서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되었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548~549.
大韓協會報(第1號~第12號)・大韓自强會月報(第1號~第13號) 參照・
大韓自强會報 第2號(1906. 8. 25 發行) 151面 參照・
紫隱先生遺事(大韓民國殉國先烈遺族會) 參照・
牙山郡誌(下) 541・542面 參照・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7卷 2面(畵報 : 東京에서 撮影한 寫眞)
<동경에서 촬영한 왼쪽부터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심한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