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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스크랩 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
isunamana 추천 0 조회 7 13.12.29 15: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 (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브루크너를 베토벤과 말러 사이의 가장 중요한 심포니 작

 

곡가로 간주한다. 하지만 생존시에는 동료 작가들 사이에서 그는 존경과 이해를 받

 

지 못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동시대인들에게 그의 중요성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찬란한 업적이 제대로 인정된 것은 그자 죽은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그들

 

의 시대에서 그의 작품들이 교향곡 작곡의 발전 과정의 정상에 우뚝 섰으며 새롭고

 

기념비적인 교향곡과 대담한 현대 음악 언어를 브루크너가 대두시켰다는 사실이 서

 

서히 밝혀졌다.

 

불행히도 브루크너의 올바른 인간 연구는 아직도 그 기초적인 단계에 있을 따름

 

이다. 초기에 그의 전기를 쓴 사람들은 영웅 숭배에 젖어 있었던 반면에 최근의 저

 

서들은 그의 성격의 여러 가지 양상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경향이 두드러

 

진다.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인간상이 선입견의 횡포로 인하

 

여 왜곡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관한 많은 얘기들은 확인이 가능한 사실보다는 일

 

화에 바탕을 두었다. 브루크너가 거의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격하고 독시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처음에는 성가대원이었다가 나중에는 선생으로 성 플로

 

리안 수도원에서 그가 보낸 세월은 그의 인간성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그

 

의 종교적인 관점과 신앙은 널리 알려졌다.

 

그렇지만 브루크너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표현은 없고, 순진성이나 소박함이나

 

심지어는 어린애같다는 얘기는 더욱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브루크너는 확실히

 

'세속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태도는 약간 우직했고 걸핏하면 유명한

 

예술가들이나 선배들까지도 공격했다. 그는 시골과 수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대도

 

시에서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태도가 브람스의 태도 못지

 

않게 비판적이었으며 올라운 인내와 끈기로 직업과 예술에 있어서의 목표를 추구했

 

던 사람을 놓고 어떻게 정말로 단순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치밀

 

한 태도로 그가 작곡에 임했느냐 하는 것은 그의 완성된 악보뿐만 아니라 그가 남

 

긴 기록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천재와 단순한 마음'이라는 어수룩한 공식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편지와 여러가지 다른 자료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조울증에 시달린

 

듯 하다. 때로는 고독으로 인해서 유발된 심한 좌절감을 느끼던 시기들이 그의 정

 

서 생활에서 다행증(多行症)의 시기와 교차되곤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867년 여름에 그가 과도한 정신적 긴장의 결과로 신경 쇠약을 일으켜 바트 크로이

 

첸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친구인 루돌프

 

바인부름에서 편지를 썼듯이 그는 '철저한 정신적 피로감과 지나친 긴장'으로 시달

 

리고 있었다. 그의 병은 '숫자의 광증'이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그가 회복된 다음에

 

도 그 징후가 좀 남았다. 어느 유명한 심리학자는 브루크너가 신경증을 유발한 주

 

요 원인이 자부심의 결여였다고 최근에 주장한 바 있다. 그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정말로 간단했다. 그런 반면에 그는 틀림없이 강렬한 사명 의식으로부터 추진력을

 

얻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작곡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그토록 엄청난 교향곡

 

을 절대로 탄생시키지 못했으리라.

 

여자들과의 관계는 항상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브루크너의 삶에서는 여자들이

 

별로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년에 그는 자꾸만 젊은 여자들과 사

 

랑에 빠져 잠깐 사귄 다음에 그들에게 청혼했다가 예외없이 거절을 당하곤 했다.

 

브루크너가 철저히 자신을 일에 바치고 싶기 때문에 전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끔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이가 예순 두 살이나 되

 

었던 1885년 11월 6일에도 늙은 작곡가는 그의 후견인 모리츠 폰 마이펠트에게 이

 

런 편지를 썼다. "내 결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난 지금까지 약혼을 한 적이 없는

 

데, 마음에 맞는 사랑의 불꽃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패러독스를 꼽는다면, 슈만과 브람스가 그들의 첫 걸작을 스

 

무살에 이미 작곡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브루크너는 작곡가로서 아주 늦게 기

 

반을 굳힌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델란드인'을 스물 여덟살에 작곡했

 

다. 그런 반면에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갖춘 첫 작품인 '미사 D 단조'를 완성

 

했을 때, 브루크너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뒤늦게 기반을 굳혔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떻게 훈련을 받았으며 어떤 활동 과정을 거쳤는지

 

를 알아야만 한다.

 

 

초기의 생활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에서 1824년 9월 4일에 태어났다.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교사 집안 출신이었으며 자신도 서른 한 살이 될 때까

 

지 교편을 잡았다. 그는 1841년부터 빈트하그에서 그리고 43년부터는 크론슈토르프

 

에서 보조 교사로 일했다. 1845년과 55년 사이에 그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처

 

음에는 선생으로 그리고 1850년부터는 임시 오르간 주자로 고용되었다. 그는 오르

 

간 연주와 음악 이론에 있어서 지식과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겠다는 결심으로 가르

 

치는 일 이외에도 부지런히 음악을 공부했다. 회르싱에서는 그의 종형제 요한 밥티

 

스트 바이스, 린츠에서는 요한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 엔스에서는 레오폴트 폰 제

 

네테, 그리고 빈에서는 이그나즈 아스마이르 등 여러 음악가가 그를 가르쳤다.

 

성 플로리안에서 오래 체류하는 동안 브루크너는 후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고전 주의 및 낭만파 작곡가들의 종교 음악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의 세속적인 음악

 

도 접하게 되었다. 1843년과 55년 사이의 시기에 속하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은 1849년의 A단조 레퀴엠과 54년 B flat 단조 장엄 미사곡이다. 이 작품들은 주로

 

모짜르트의 레퀴엠과 하이든의 미사곡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반영한다.

 

 

1856년에 브루크너는 린츠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상당히 존경받는 직

 

책을 확보했다. 이 새로운 활동은 어쨋든 당분간이나마 그에게 만족을 주었지만,

 

그는 음악 이론에 관한 부족한 지식이 불만이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이름난 빈의

 

선생 시몬 세흐터와 연줄이 닿아 그의 제자가 되어서 거의 6년 동안 그에게 공부를

 

했다. 그는 세흐터가 건강을 조심하라고 경고할 정도로 열심히, 하모니와 대위법

 

과, 카논과 푸가를 공부했다. 1861년 11월에 브루크너는 자발적으로 빈의 음악 동

 

우회 음악원에서 실시하는 엄격한 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관이었던

 

요한 헤르베크는 '오히려 우리들이 그 사람에게 시험을 보았어야 한다!'고 감탄했

 

다.

 

브루크너는 모든 면에서 엄격한 작곡법을 세흐터에게 배웠지만 그가 그때까지

 

받았던 음악 교육이 상당히 한 쪽으로 편중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61년

 

이 될 때까지는 바그너와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의 참된 '신음악'을 접하지 못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시립 극장의 첼로 연주자로 그리고 나중에는 지휘자로서 새로운

 

접근을 지향하던 현실적인 음악가 오토 키츨러가 1861년에 린츠로 왔을 때 브루크

 

너는 그에게 자기와 함께 형식과 관현악 편곡과 작곡 이론을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청했다. 키츨러와의 이런 공부는 브루크너의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

 

닌다. 그는 바그너의 '탄호이저'악보를 알게 되었으며, 1863년 2월13일 린츠에서의

 

'탄호이저'공연은 이 바그너 행사가 그의 창조적인 재능을 분출시켰다는 주장이 과

 

장이 아닐 정도로 그에게 영구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로 브루크너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향한 그의 길을 더듬어 찾기 시작했다. 그는 열렬한 바그너파가 되었으며

 

평생동안 이 충성을 간직했다.

 

그는 1865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을 보려고 뮌헨으로 여행을 했으며,

 

68년에는 린츠에서 프로진 합창단과 함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마지막

 

장면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또한 린츠에서 살던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또

 

다른 음악가 이그나즈 도른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했던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의 작

 

품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브루크너는 키츨러의 밑에서 공부하는 동안 행진곡,

 

관현악곡, 한 편의 서곡, 그리고 또 몇편의 교향곡 등 기악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

 

다. 그가 나중에 [습작 교향곡]이라 일컬었던 F단조 교향곡은 1863년에 작곡되었

 

다. 그는 63년과 64년 사이에 만든 D단조 교향곡을 나중에 '형편없다'고 말하고는

 

[0번 교향곡]이라고 했다. 1865년과 66년 사이에 그는 [제 1 번 교향곡 C단조]를

 

작곡했는데, 상당히 독창적인 이 작품에 그는 그 작품이 지닌 대담성을 고려해서

 

[건방지고 귀여운 녀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작품들과 더불어 그는 또한

 

여러가지 성가와, 무엇보다도 A단조(1864), E단조(66), F단조(68)로 된 세 편의 서

 

사곡을 포함한 기악이 반주하는 합창곡 여러 편을 발표해서 곧 인정을 받았으며 교

 

회 음악 작곡가로서의 브루크너의 명성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빈으로의 이주

 

 

1868년 빈으로의 이주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작고한 그

 

의 스승 시몬 세흐터의 후임으로 같은 해 6월 6일 음악원에서 화성법, 대위법, 오

 

르간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얼마후인 9월 4일에 그는 또한 처음에는 단

 

순히 명예직일 따름이었던 황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지명되었다. 빈에서 살던

 

초기에 브루크너는 빈곤한 처지에서 살아갔다. 음악원에서 생기는 수입은 아주 적

 

었고, 때때로 그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서 끊임없이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78년 상임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

 

된 다음에야 해마다 충분한 수입을 확보하게 되었다.

 

빈에서 브루크너가 창작한 작품들은 교향곡 작곡 쪽으로 심하게 편향되었다.

 

1871년부터 그가 사망하던 96년 사이에 그는 거의 쉬지 않고 계속해서 교향곡을 발

 

표했고, 때로는 동시에 몇작품에 손을 대고 있어서 새 작품을 하나 만들면서 한 편

 

으로는 전에 쓴 곡을 고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음악은 비교적 작곡하지 않아서,

 

1879년의 현악 5중주곡, 84년의 [테 데움], 92년의 [시편 150], 그리고 94년의 남

 

성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큰 작품 [헬고란트(Heloland)]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이외에 그는 몇 곡의 대수롭지 않는 종?적 세속적 합창곡을 작곡했다.

 

빈 생활의 초기에 브루크너가 알찬 교향곡을 많이 창작한 것은 그가 전혀 아무

 

런 외적인 격려도 받은 바가 없기 때문에 완전히 내적인 추진력의 소산이었다. 그

 

에게 용기를 주기는 커녕 빈 팔하모닉 관현악단은 처음에 그의 2번 교향곡 연주를

 

거부했으며, 전반적으로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92년 이전에는 빈에서 산발적으로

 

만 공연되었다. 죽을 때까지 브루크너는 그를 "그로테스크하고, 엉성하고, 지나치

 

게 야심이 많고, 음악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었고,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노예처럼

 

바그너를 숭배한다"고 거듭 거듭 표현했던 것처럼 빈의 영향력있는 많은 비평가들

 

이 퍼붓는 악의에 찬 공격의 제물이 되었다. 1886년에 구스타프 됨프케는 "브루크

 

너는 술주정뱅이처럼 음악을 작곡한다"는 흉악한 표현을 썼다.

 

[브람스파를 옹호하는]대변자 노릇을 했던 에두아르트 한슬릭이 브루크너를 적

 

으로 삼아버렸던 논쟁의 배후에는 개인적인 증오심, 음악계의 정치적인 고려 사항

 

들, 그리고 예술의 역사와 이념이 얽힌 문제들 따위의 다양한 이유들이 깔려 있다.

 

아직 린츠에서 살던 한슬릭이 처음에는 브루크너를 지지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

 

었다는 점은 지적할 가치가 있다. 빈 대학교의 음악사 교수였던 한슬릭이 그 대학

 

교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했던 브루크너가 경쟁자로 대두할까봐 두

 

려워 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는 브루크너가 그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 그의 수중에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이 적대감을 야기시킨 또 다른 이유는 브루크너가 빈에 도착했을 무렵에 그곳의

 

음악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그너를 지지하

 

는 사람들과 브람스를 찬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은 19세기의 마지막

 

25년동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음악사를 엮어나가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88년

 

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그너를 반대하는 자들이 브람스를 내세우는 것은 단순히

 

바그너에 맞서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글을 발표했을 때는 화약에 불을 당긴

 

격이었다. 바그너의 극렬한 적이었던 한슬릭은 그에 맞서기 위하여 브람스를 자주

 

들먹였으며, 바그너의 이론이 지닌 부자연스러운 특성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브람스의 음악을 이용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브루크너는 공공연히 바그너의 편을 들었고, 그래서 격렬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

 

다. 그는 1873년에 바이로이트로 바그너를 찾아가서 그가 가지고 간 두편의 교향곡

 

가운데 하나를 그에게 헌납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바그너는 제 3 번 교향곡의

 

헌납을 받아들였고, 그 작품은 곧 [바그너 교향곡]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브루크너는 1873년 10월 15일 그의 작품 선전 활동을 많이 벌인 활동적

 

인 단체 빈 아카데미 바그너 협회에 가입했다.

 

 

 

한슬릭이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뻔히 예상이 될만한 일이었지만, 그가 브루크너

 

를 오스트리아에서 바그너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비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무대 양

 

식을 교향곡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내용이었다. 한슬릭은 이것이 가장 숭고한

 

미학적인 원칙에 대한 무례를 상징하며, 교향곡의 자연스러운 표현법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굳게 믿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브루크너의 작품들에 대한 한슬릭의 평

 

론들은 그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전적인 부족과 강렬한 혐오감을 빤히 드러내지만,

 

그런 한계들 속에서도 논리성은 충분히 지닌다. 형식주의에 충실한 비평가라면 필

 

연적으로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을 해괴하다고 여겼으리라.

 

 

 

브루크너를 겨냥한 당시의 비난들이 하나같이 부당하고 근거가 없다는 점이 최

 

근의 연구에 의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이 확립되었다. 그의 교향곡들이 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괴이하거나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작품들은 엄격한 구

 

성과 의미가 담긴 분절법을 구사한다. 그것들은 비록 같은 계통의 고전적인 작품들

 

의 구조적인 논리와는 상당히 다른 내적인 논리를 갖고 있기는 해도 음악적인 일관

 

성이 결여되지는 않았다. 간단히 얘기하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당시에 어찌나

 

대담하고 독창적이고 생소했는지 그렇게 많은 당시 사람들의 이해가 그의 음악을

 

따르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한 부분을 브루크너가 발전시킨 기념

 

비적인 유형의 교향곡은 각각의 악장을 확대했다는 외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고전

 

적인 소나타 형식이 대조적인 두 주제를 병립시키는 수법에 의존하는 반면에 브루

 

크너는 그의 교향곡 들에서 양쪽 바깥 악장들을 세개의 큰 주제 집단을 바탕으로

 

삼아 꾸며 놓았으며 그 가운데 두번째 주제집단이 두드러지게 서정적인 양상을 띄

 

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악장들의 코다도 확대시켜서, 한 교향곡의 맨 처음 주제

 

가 제 1 악장의 끝에서 다시 등장하고, 그것이 [찬미]의 과정을 거치는 피날레에서

 

또 한번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브루크너는 아다지오와 피날레의 대가였다. 어느

 

다른 작곡가들도 완서 악장의 깊이와 화려함과 웅장함에서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피날레들은 무게와 내용만으로도 제 1 악장과 맞먹는다.

 

 

 

그의 화성법이 보여주는 현대적인 특징과 대담성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브루크너는 자주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변조를 구사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같은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당혹

 

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호의적인 비평가들까지도 때로는 [지극히

 

모험성이 강한 음조의 오딧세이]라는 언급을 했다.

 

 

 

요즈음 사람들이 브루크너를 흔히 대담한 주제, 강조하는 표현법, 힘찬 금관 악

 

기의 악절과 화려한 합창과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가 지닌 특징적인 양상

 

의 겨우 몇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력이 풍

 

부하다. 그의 음악은 종교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요소, 친밀한 요소와 예식적인 요

 

소, 서정적인 요소와 극적인 요소, 전쟁같은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 렌틀러와 성가

 

를 모두 포괄한다. 브루크너의 작품 전체에서는 엄격함과 풍요함, 소박함과 황홀,

 

외경 의식과 축제적인 정신이 숨가쁘게 서로 이어진다.

 

 

 

 

 

 

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 (2)

 

바그너의 영향

 

 

 

브루크너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우선 그와 바그너의 유사성부

 

터 생각한다. 그 공통성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까? 브루크너가 바그

 

너를 우상화했으며, 바그너로부터 생겨난 음악극의 여러 가지 요소를 그의 작품에

 

도입한 19세기 최초의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라는 사실은 물론 부정할 수 없다.

 

 

 

바그너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뚜렷하다. 반복되는 악상과 되울림

 

의 사용, 화음과 빈번한 신호와 팡파르, 오케스트라의 배치와 기악곡의 편곡, 아리

 

아와 레치타티브같은 요소들에 대한 그의 편중, 강렬한 대조가 그러하고, 당시 사

 

람들 사이에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형식 개념이 그러하다. 그

 

중요성이 가장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형식의 개념은 정적이기보다는 활동적이며

 

무대음악의 원칙과 무척 유사하다. 브루크너의 음악에서 보통 긴장이 이완되리라는

 

예고노릇을 맡은 엄청나게 효과적인 크레센도, 힘차게 울려 퍼지는 클라이막스는

 

급박하게 절정으로 치솟아 오르다가(흔히 아주 갑작스럽게)무너져 내리는 감정의

 

파도를 반영한다.

 

 

 

그러나,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노예처럼 추종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바그너적인

 

요소도 브루크너의 교향곡 작품이 지닌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했

 

다. 브루크너는 바로크 형식의 엄격한 기술을 숙달했으며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

 

너, 심지어는 표제 교향곡 작곡가들인 베를리오즈와 리스트까지 포함한 여러 대상

 

으로부터 교향곡의 작곡방법을 익혔다.

 

 

 

그러나 절충주의를 놓고 브루크너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이런 면에

 

서 가장 찬양할만한 그의 자질들 가운데 하나는 비록 빌어다 쓴 형식상의 양상들이

 

라고 해도 그의 강하고도 독창적인 개성에 의해서 어찌나 철저하게 동화되었는지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연결된 매듭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순수

 

하게 브루크너적으로 사용되어 작곡가의 자취를 지니게 되었다. 브루크너의 작품

 

이외에는 흔히 얻을 수 있거나 빌어온 자료를 그토록 완벽하게 융화시킨 예가 드물

 

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브루크너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외면 당하고 이해

 

가 되지 못한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수한 편견이 그의 인격과 음악으로

 

쏠렸다. 그 편견들 가운데 가장 파괴적이었던 한 가지를 꼽는다면 그의 교향곡 작

 

품이 이른바 '천편일률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음악사에 남을 하나의 아이러니이겠

 

지만 이런 잘못된 견해를 얘기한 사람은 사실 브루크너를 지지하던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그는 1887년 9월 30일에 요제프 샬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 8번 교향곡

 

의 첫 번째 개정판을 보고 특히 걱정을 느끼게 한 것은 '거의 판에 박힌 형식처럼

 

제 7번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이었다고 했다.

 

 

 

브루크너가 '쓸만하다'고 인정했던 아홉 편의 교향곡이 서로 많은 유사점을 지

 

니고 일종의 한 가족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몇 편의 교향곡

 

은 비슷하거나 똑같은 '기본구성'을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예를 들면 제1악장의

 

제 1주제들은 힘차고 포괄적이며, 흔히 현악기의 트레몰로가 뒷받침을 한다. 제2주

 

제들은 흔히 정서적인 칸타빌레이고, 대위법 상으로 대조를 이루는 성악 부에 의해

 

서 시작된다. 제3주제들은 빈번히 유니즌으로 시작하여 놀라운 리듬의 힘으로 발전

 

한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어떤 교향곡도 다른 교향곡과 너무나 비슷하여 서로 혼동을

 

일으킬 정도라는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얘기이다. 비록 똑같은 '기본 구상'이 몇 가

 

지 다른 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작품들은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뚜

 

렷하게 서로 다르다. 저마다의 교향곡은 그 나름대로의 뚜렷하고 개별적인 특성,

 

그 나름대로의 두드러진 양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3번과 4번, 또는

 

8번과 9번 교향곡을 실질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실험해 볼 수 있는데, 그러면 그들

 

이 기본적인 처리 방법에 있어서조차 무척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주

 

장이 어떤 경우에도 타당성이 증명되지 않는 까닭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양식이 시

 

간이 흐름에 따라 예를 들면 브람스의 음악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

 

도로 변화를 거쳤지 때문이다. 1871년과 72년에 작곡한 브루크너의 제 2번 교향곡

 

과 1891년부터 96년 사이에 작곡한 미완성 제 9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본다면 스

 

타일에 있어서의 엄청난 발달 과정을 보게 된다. 사실상 이 두 작품 사이의 간격이

 

겨우 20년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 지경이다.

 

 

 

1865년과 66년 사이에 린츠에서 썼으며, 68년 그곳에서 처음 공연된 브루크너의

 

제 1번 교향곡 C장조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대담한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는 브루크

 

너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양상들이 이미 두드러질 정도로 나타나서, 세 개의 선명

 

한 주제들이 바깥 악장의 배경에서 발전하게 되고,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힘찬 음향

 

의 파도가 흔히 형식상 긴장의 이완으로 이어지며, 엄격한 대위법적인 작곡 경향

 

이 확실히 드러나고, 근본적인 리듬의 에너지 폭발이 스케르초로부터 발전된다.

 

 

 

그런가 하면 나중의 교향곡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바깥 악장들은 주제

 

에 있어서 완만하게만 새로 연결된다. 코랄 류의 주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제 2번 교향곡 이후부터는 주제 집단들을 서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그 분절법적

 

인 쉼이 하나도 없다.

 

 

 

표현의 격렬함과 대담성이라는 특성이 제 1번 교향곡에서 나타난다. 대단한 표

 

현은 예를 들어, 기호 B로 되어 있는 크레센도 악절과 제 2주제를 서정적으로 이끌

 

어 가는 행진곡 같은 주요 주제를 뒤따르는(린츠 판 악보에서 기호 C로 되어 있는)

 

트럼본의 웅장한 취주에 의한 엄격히 꾸며진 제 1악장에서 나타난다. 아다지오의

 

주요 악상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답하다. A flat 장조의 전조와 처음에는 은폐되어

 

20번째 소절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를 않는다. 비슷한 즉흥적인 양상들과 풍부한

 

극적인 요소들이 푸짐한 피날레의 표현법에서도 역시 대담성이 나타난다.

 

 

 

1872년 빈에서 완성된 제 2번 교향곡은 제 1번 교향곡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훨씬 부드럽고 그 효과에 있어서 보다 '고전적'이다. 여러 악절들 사이에 수많은

 

쉼을 주었다는 데서 당장 나타나듯이 브루크너는 이 작품에서 '명확성'을 도모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그 목적은 형식상의 패턴을 강조하고 심하게 날카로운 대조를

 

이어주려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그 결과로 이 작품에는 '쉼표 교향곡'이라는 별명

 

이 붙었다. 제 2번 교향곡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표현법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기본

 

적이 중요성을 지닌다. 이제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서, 이 교향곡은 제 1번보다

 

20분이나 길다. 주제들이 나타나서 전체적인 덩어리를 형성한다. 바깥 악장들이 처

 

음으로 공통된 주제에 의해서 연결된다. 비슷한 얘기이지만 코랄 같은 요소들이 처

 

음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아다지오에서 그렇다. 극적인 활력보다는 서사시적인 웅

 

장함을 제 2번 교향곡의 기본적인 양상이라고 간주해야 할 지도 모른다.

 

 

 

F 단조 미사곡과 주제상의 관계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서정적인 성가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악장으로서 썼던 제 2번 교향곡의 아다지오는 이 미사곡의

 

<베테딕투스>로부터 K와 O 기호로 두 차례 인용 소개한다. 브루크너는 나중에 이

 

악절을 '창조력이 돌아온 데 대한 감사의 행위'로서 골라냈다고 말했다. 피날레도

 

역시 <키리에>의 악절로부터 두 차례 인용한다. 작품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일

 

종의 열쇠 노릇을 하는 이런 인용들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제 2번 교향곡에 비하면(몇 차례 수정을 거쳐 1873년에 완성된) 제 3번 교향곡

 

은 여러 가지 '진보적인' 양상이 두드러진다. 1873년 9월 바이로이트에서 브루크너

 

가 두 작품을 내 놓았을 때 바그너가 제 3번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

 

었다. 이 작품은 베토벤,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그리고 바그너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브루크너는 또한 <발퀴레>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수없이 많이 첫째

 

원고에 인용함으로써 바그너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 얼마쯤은

 

나중에 삭제해 버렸다.

 

 

 

브루크너의 초기 교향곡들 가운데 제 3번은 아마도 가장 강렬한 대조를 보여주

 

는 지도 모른다. 제 2번보다는 저마다의 악장이 훨씬 뚜렷하게 서로 다르고, 갖가

 

지 주제들이 훨씬 유연하고 명확히 구분되어 나타난다. 끈질긴 주제의 대조와 강약

 

법의 대조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더욱 빈번하게 서로 이어진다. 이런 뚜렷한

 

본보기는(두 번째 수정된 악보에 기호 Q로 되어 있는) 모두 악장 전개부의 끝에서

 

나온다. 브루크너의 교회 음악과 강력한 유사성을 보여주는 아다지오에서는 그런

 

효과는 빠지지 않는다. 비슷한 얘기이지만 이상할 만큼 활발한 스케르초와 상당히

 

렌틀러 비슷한 트리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그런 대조는(기호 B의) 피

 

날레의 두 번째 주제 집단에서의 폴카 같은, 현악부와 합창 같은 목관부처럼 구분

 

이 잘 안 된 두 가지 음형들이 대위법적으로 서로 엮어나감으로써 제시한(세상의

 

기쁨과 슬픔처럼) 상반되는 요소라고 브루크너 자신이 서술한 피날레에서 가장 극

 

단적으로 극적인 절정에 다다른다.

 

 

 

 

 

브루크너의 표제 해설

 

 

 

그의 교향곡들에 관해서 상당히 자세하고 친절한 표제의 설명, 즉 '해석'을 말

 

이나 글로써 브루크너 자신이 제공했다. 음악학자들이 그런 말을 진지하게 다룰 준

 

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큰 이유였지만, 그 자료들은 최근까지 세밀하게 검토된

 

적이 전혀 없었다. 브루크너는 비현실적인 상상에 젖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

 

설명들이 사후에 마련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 자료들은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여겨져서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브루크너가

 

제자들의 나쁜 충고의 제물이 되었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이런 견해의 많은 부분은

 

브루크너가 순진한 작곡가여서 '절대적인' 음악만 작곡했으리라는 여러 학자들의

 

생각 때문에 생겨났다. 그의 교향곡 작품은 문학적이거나 음악 이외의 의도들로부

 

터 해방되었고 사실상 표제 음악의 정반대가 되는 음악을 대표한다고 간주되었다.

 

 

 

그가 창조한 교향곡은 어떤 면에서도 '절대적인' 음악이 아니고, 에두아르트 한

 

슬릭의 형식화한 미학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른바 '순진한' 예

 

술가라고 일컬어지던 브루크너가 바그너적인 예술의 미학적 공식들에 아주 익숙하

 

고, 표제 음악을 '절대적인' 음악보다 훨씬 더 높다고 간주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브루크너의 '해석학적' 설명들이 적어도 그의 작품 수에 관해서는 의심할 나위

 

없이 진실하다는 것도 역시 증명할 수가 있다. 그것은 과거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

 

처럼 '나중에 해설을 덧붙이려던 시도'가 아니라 그것이 언급하는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브루크너의 설명들이 그 작품들이 지닌 특정한 음악적 양상

 

들에 정확히 적용된다는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에는 흔히 사람들이 비웃거나 무시해 버렸던 제4번과 제8번에 관한 참된 표

 

제 해설들은 이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작품의 보다 깊은 이해에 도

 

움이 될 지도 모른다. 특히 베를리오즈의 그것과 비교할 때 브루크너의 표제들이

 

완전히 설명되거나 엄격히 정리되지 않아 스케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은 시인해야

 

만 한다. 오히려 그것은 꼭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발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엉성하

 

게 연결된 일련의 이미지들을 나타내는 지도 모른다.

 

 

 

1874년에 썼으며 78과 80년 사이에 대폭적으로 고쳐 썼고 <낭만적>이라는 명칭

 

이 붙게 된 제 4번은 항상 브루크너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제7번과 더불어

 

그것은 그가 평생 작곡한 모든 교향곡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었다.

 

1881년 2월 20일의 빈 첫 공연까지도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제 3번의 요란한 실패

 

를 겪은 다음이어서 그 만큼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브루크너 자신도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알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교향곡의 인기가 표현의

 

범위 못지 않게 스타일의 감촉, 그 빛깔의 강렬한 광채 못지 않게 선율의 악상이

 

지닌 직접적인 호소력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엇이 브루크너로 하여금 제 4번을 <낭만적>이라고 표현하게 만들었으며, 그

 

제목으로 그는 무엇을 이해했을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로

 

엔그린>을 낭만주의의 본질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알려졌다. 그 오페라

 

는 그에게 기적과 신비와 순수하고 종교적인 개념들을 불러 일으켰고, 이 상상의

 

세계 중에서 많은 부분이 제 4번 교향곡에 흡수되었다.

 

 

 

테오도르 헬름스의 말을 빌면, 브루크너는 <낭만적> 교향곡의 첫 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중세의 도시 - 새벽 - 도시의 탑에서 잠을 깨라고 울리는

 

소리 - 문들이 열리고 - 멋진 말을 타고 들판으로 달려나가는 기사들, 자연의 마력

 

이 그들을 집어삼키고 - 바스락거리는 숲 - 새들이 노래하고 - 그래서 낭만적인

 

장면이 더욱 펼쳐지고..." 이 표제는 나중에 알고 보니 바그너의 <로엔그린>과 <지

 

그프리트>의 어떤 무대 지시사항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브루크너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그가 작곡을 하고 있을 때, 그 오페라들에서 따온 장면들을 염

 

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교향곡의 주요 주제는 '잠을 깨우는

 

소리'로 꾸며 놓은 네 개의 호른 신호(3 - 18 소절)로 표현된다. 다음악절(19 -

 

50소절)의 진술과 답변형식은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데, '잠을 깨우는 소

 

리'는 목관부에서 울리고 호른들이 대답한다. 이것은 <로엔그린>의 연출지시를 연

 

상시킨다. - "탑에서 아침 노래가 울리고, 더 멀리 떨어진 탑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다음에 브루크너는 자연을 반영하는 '이중'주제로 넘어가서, (기

 

호 B의)주제 집단의 모두에서 제 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모티프가 새의 지저귐 소리

 

를 전달하는 반면에, 브루크너의 설명에 의하면, 비올라의 칸타빌레 선율은 '숲

 

속에서 그토록 포근하고 친근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느끼는 행복

 

감'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다.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헤롤드>의 알레그레토처럼 안단테는 밤에 행진하는

 

순례자들을 나타낸다. 이 악장의 세 가지 주제 가운데 첫 번째 주제는 애조를 띄었

 

고, 브루크너가 '기도'라고 설명한 두 번째 주제는 긴 음들로 이루어진 4행의 코랄

 

이며, 세 번째 주제는 피치카토반주를 곁들여 상당히 다르게 구성한 6행의 코랄이

 

다. 주요 주제에 의해서 이루어진 두 개의 클라이막스 가운데 두 번째 것이 첫 번

 

째 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첫 번째 원고의 스케르초와 트리오는 1878년 고쳐 쓸 때

 

완전히 새 곡들로 바뀌었다. 마지막 원고의 경쾌하고 인상적인 스케르초는 사냥의

 

음악으로 착상되어 호른 팡파르가 시작을 알린다. 브루크너 자신은 렌틀러와 같은

 

트리오를 '사냥을 나가서 식사를 할 때 반주 노릇을 하는 무용곡'이라고 표현했다.

 

 

 

최종악장은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뚜렷한 구별이 가는 원고가 존재한다. 이 악

 

장은 1880년 마지막 개정 동안에 어찌나 철저히 새로 손질했던지, 첫 번째 원고가

 

지녔던 경쾌한 성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본래의 선율 구상 대신에 새롭고 어느 정

 

도 극적인 요소들이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본래 악절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보다

 

어두운 채색을 통하여 새로운 특성을 얻었다. 이 마지막 원고에서 악장이 강렬한

 

긴장감을 지닌다.

 

 

 

 

 

제 5번 교향곡

 

 

 

1875년과 76년에 썼으며 그 후 2년 동안 고쳐 쓴 제 5번 교향곡은 흔히 문헌에

 

서 '신앙 교향곡'이라 일컬어졌다. 이 작품에는 합창 같은 요소들이 잔뜩 포함되었

 

고, 최종악장이 사실상 브루크너 자신이 설명했듯이 웅장한 합창으로 끝난다는 사

 

실을 기억한다면 그 명칭은 보다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뿐 아니라 화려한 제

 

4번에 비하면 제 5번은 그 효과에 있어서 훨씬 엄숙하고 근엄하다. 그것은 세 가지

 

대조적인 음형을 제시하는 종교적인 음악을 연상시키는 느린 전주로 시작되는 브루

 

크너의 교향곡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음형 들은 뒤에 나오는 알레그

 

로의 전개부에서 다시 나타나고, 수많은 변주의 대상이 된다. D단조 아다지오인 제

 

2악장은 두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삼았다. 목관악기에 의해서 소개되고 동일 음으

 

로 피치카토 현악부의 뒷받침을 받는 첫 번째 주제는 '음울한 분위기'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화음이 가득한 두 번째 주제는 찬송가 같은 황홀한 성격을 가지고 있

 

다. 이 악장 중에서 두 가지 주제가 함께 이룩하는 대 클라이막스들은 매우 인상적

 

이다. 아다지오와 스케르초는 D단조라는 공통된 변조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있어서

 

도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그 까닭은 첫 번째 아다지오 주제의 모티프들 대부분이

 

스케르초가 비록 새로운 악상들을 소개하기는 해도 다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스케

 

르초 악장의 두 번째 주제는 브루크너가 그 안에서 연상시키는 음형들과 함께 엮어

 

넣었으므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분적

 

으로는 반복이라는 방법을 통해 앞의 악장들로부터 악절들을 인용하는 도입부 다음

 

에 최종악장이 시작된다. 그 인용들 사이의 간격에서 최종 악장의 첫 번째 주제를

 

클라리넷 독주가 제시하고, 전체적으로 그 악장은 소나타와 푸가 형식의 아주 복잡

 

한 결합을 보여준다. 이 악장의 두 주제는 이중 푸가로 처리했다. 브루크너가 제

 

5전을 그의 '대위법의 걸작'이라고 한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어느 저명한 음악학

 

자는 더욱 나아가서 이 교향곡의 종결이 모든 음악 - 진실로 인간 정신의 가장 찬

 

란한 장작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브루크너는 제 5번 교향곡보다 몇 년 후에 현악 5중주를 작곡했다. 유명한 4중

 

주단의 단장이며 음악원의 원장이었던 요제프 헬메스베르거의 제안에 따라 작곡된

 

그 작품이 완성된 것은 1879년이었다. 역설적인 이야기라고 들릴지 모르지만 네 악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교향곡과 실내악에 다 같이 어울리는 양상들을 구사한다.

 

작품의 대부분은 아주 엄격하게 썼으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작곡에서 무척 두드러진

 

양상을 이루는 거대한 소리의 폭풍이 모자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악장들은 교향

 

곡의 악장들에 비하면 규모에 있어서 보다 많은 제약을 받았고, 다섯 가지 현악기

 

의 처리는 실내악과 아주 비슷하게 다루어졌다. 브루크너를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표현력이 무척 풍부한 아다지오 악장이 '의미가 깊은 구성과 창조성이라는 면에 있

 

어서 너무나 낯익은 현대 기악 작곡의 범주를 넘어' 전개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루크너에 대해 이름난 전문가였던 에른스트 구르트는 1879년과 81년 사이에

 

쓰여진 A장조 제 6번 교향곡의 '바탕 빛깔'이 '찬란한 광채'처럼 빛난다고 했다.

 

하지만 엄격히 이야기하면, 그 말은(악보에서 기호 W로 시작되는) 코다가 사실상

 

반짝이는 소리들의 조화를 제공하는 맨 처음 악장에만 적용된다. 내부의 악장들은

 

또 화려하고, 사실상 때로는 그 빛깔이 차분하고 어둡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매우

 

축제적인 분위기의' 아다지오 악장은 가끔 장송행진곡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처량

 

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단조로 시작되는 최종악장의 전개부에서 종결부의 A장조가

 

지닌 승리의 효과는 고통스러운 준비가 없이는 이룩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per aspera ad astre)'라는 말이 이 악장을 작곡하는

 

동안 브루크너의 염두에 있었을 것이다.

 

 

 

제 7번 교향곡 E장조(1881년과 83년 사이에 작곡된)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해를

 

못 받고 조롱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작품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것은 브루크너에게 참된 성공

 

을 가져다 준 첫 작품이었으며, 그의 다른 교향곡들이 음악회장으로 진출하는 길을

 

닦아 놓았다. 1884년 12월 30일 라이프치히에서 획기적인 첫 공연을 가진 얼마 후

 

에 제 7번 교향곡은 세계의 음악 도시들을 향해 승리의 전진을 개시했다.

 

 

 

이 교향곡에 그토록 엄청난 설득의 힘을 심어 준 것은 무엇일까? 언뜻 보기에

 

그 구성은 그가 전에 작곡했던 교향곡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맨 처음 악장

 

은 규모가 여유가 있다. 양쪽의 바깥 악장들은 둘 다 세 가지 주제 집단에 바탕을

 

두었다. 브루크너의 힘찬 기질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센 소리의 회오리 속에

 

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섬세한 면모들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형식상의 분절법을 파악하기가 보다 쉽고, 모티프가 더욱 깊

 

이 파고들며, 주제들은 브루크너의 경우에 항상 더 그렇듯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

 

면서도 어찌나 서로 잘 어울리는지 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제 7번은 그 강렬한 광채로 인해서 우뚝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은(역시 '낭만적'인 음향의 경향을 고통으로 지닌) 제 4번에 비견할 수 있

 

다.

 

 

 

C sharp단조의 애절한 아다지오 악장은 제7번의 악장들 중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것이 작곡된 과정이 틀림없이 그런 결과를 낳았으리라. 브루크너의 편지

 

가 보여주듯이 아다지오 악장은 바그너의 죽음을 예측한 가운데 1883년 1월 22일경

 

에 스케치가 모두 끝났다. 죽음의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을 때 브루크너는 코다까지

 

작곡을 마친 상태였다. 튜바와 호른을 위한(기호 X의) 악구는 틀림없이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썼으며 브루크너는 '대가의 서거를 추모하는 애도의 음

 

악'으로 이것을 작곡했다. 두 번째 원고의 한 부분으로서 1884년에야 겨우 완성된

 

<테 데움>의 종결부와 주제의 상호 관계는 "Non confundar in aeternam(영원히 부

 

끄럽지 않게 하소서)"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확인 의식이 아다지오 악장 속에도 마

 

찬가지로 깔려 있음을 나타낸다. 형식면에서 얘기하자면 이 악장은 첫 번째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여러 가지 강한 변모를 거치는 두개의 대조적인 주제가 ABABA로 이

 

어지는 론도 형식으로 쓰여졌다. (기호 S의)주요 주제의 마지막 반복과 더불어 시

 

작되어 (기호 W의) 눈부신 C장조 클라이막스로 이끌어가며 길게 이어지는 오름은

 

교향곡 작곡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순간들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브루크너는 '바그너 튜바'를 이 아다지오 악장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제 8번과 제

 

9번 교향곡에서도 다시 사용하였다.

 

 

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 (3)

 

 

 

 

 

<테 데움>

 

 

 

1884년에 완성한 <테데움>은 가장 잘 알려진 브루크너의 종교적 작품일 것이다.

 

그 작품은 네 명의 독창자와, 8부 합창단과,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해 쓰여졌고,

 

웅장한 찬양의 송가(1-19행), 기도(20-28행), 그리고 유쾌한 종결(29행) 이렇게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뉘었다. 중간 부분은 다시 세 부분으로 꾸며놓아서 음악적으

 

로 짝을 이룬 바깥 악장들 '우리가 당신에게 원하노니(Te ego quaesumus)'와 '그리

 

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소서(salvum fac populum tuum)'가 힘찬 '영원하게 하소서

 

(Aeterna fac)'를 에워싼다. 브루크너의 미사곡들에서도 그렇듯이 <테 데움>은 찬

 

란한 경건함, 영광과 매혹을 결합시킨다. 갖가지 악절들 사이의 주제에 의한 수많

 

은 연결은 이 작품에 커다란 통일성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시작 부분의 시편 같은

 

악구는 다양한 형태로 거듭거듭 다시 제시된다. 종결 부분의 강한 충격은 세밀하게

 

꾸민 푸가보다는 그가 제 7번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에서 사용했던 '나로 하여금

 

영원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의 온음계적인 견실하고 힘찬 합창 같은 악상으

 

로부터 연유한다. 1885년 5월 10일에 그가 헤르만 레비에게 쓴 편지의 내용처럼 처

 

음 그가 <테 데움>을 '빈에서 극복한 그토록 많은 고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

 

나님에게 바쳤다는 것도 역시 브루크너의 정신적 자세를 보여준다.

 

 

 

1884년 9월 4일 예순 살이 된 브루크너는 세 편의 미사곡과 일곱 편의 교향곡과

 

<테 데움>등 주요 작품들을 이미 완성해 놓았지만 아직도 빈에서 작곡가로서의 인

 

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제 7번 교향곡이 라이프치히에서 아

 

르투르 니키시에 의해서 1884년 12월 30일에, 그리고 헤르만 레비에 의해서 1885년

 

3월 10일 뮌헨에서 공연된 다음의 일이었다. 특히 뮌헨 공연이 브루크너의 명성에

 

있어 전환기를 마련했다. 그때부터 그는 외국에서 점점 더 많은 명성을 얻게 되었

 

다. 많은 지휘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친구들에게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심지어는 미국에서 공연된 그의 작품들을 자랑삼아 얘기할 수가

 

있었다. 브루크너는 더 이상 오스트리아에서 무시를 당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1886년에 그는 프란츠 오제프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ㅡ 암스테르담의 음악

 

예술 진흥협회의 회원으로 뽑혔다. 그리고 1891년 1월에 그는 음악동우회의 명예회

 

원이 되고, 같은 해 11월 7일에는 그의 가장 큰 소망이 이루어져, 그는 몇 해 동안

 

음악이론을 강의했던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에 브루크너는 1884년에 스케치를 시작한 제 8번 교향곡에 손대고 있었

 

다. 그는 1887년 9월 4일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헤르만 레비에게 편지를 썼고,

 

뮌헨에서 그가 연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9월 19일에 악보를 그에게 보냈다. 레

 

비는 작품의 규모가 커서 당황했으며, 브루크너가 아끼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세프 샬크에데 편지를 써서 제 8번을 공연할 용기가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은 스

 

승에게 듣기 좋은 말로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관현악법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최종 악장은 자기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라고 묘사했다. 레비의 비판에 브루크너는 깊은 충격을 받았고 심

 

각한 심리적 위기에 빠졌다. 그는 1889년과 90년에 제 8번을 손질해서 짧게 만들

 

고, 많은 악구들을 바꾸고, 몇 가지는 완전하게 다시 써서 두 번째 원고를 마련했

 

다. 브루크너의 제 8번 교향곡은 구성이나 의미론적 관점에 있어서 다같이 웅대한

 

작품이다. 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보낸 1891년 1월 27일자 편지에서 브루

 

크너는 세 악장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한 표제 설명을 제공했다. 브루크너는 특히

 

두 군데 악장을 언급하는데, 그는 재현부의 클라이막스를 '죽음의 알림'이라고 보

 

았다. 그리고 그는 코다를 '체념'이나 '조종'이나, '죽음의 시계'라고 서술했다.

 

두 악절 모두 상당히 보기 드문 방법으로 꾸몄다. 재현부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주요

 

주제의 점선같은 리듬을 계속해서 적어도 열 번이나 호른과 트럼펫이 함께 포르테

 

시모로 따라가는 힘찬 악구가 나온다. 그런 다음에 피아니시모로 세 차례의 북이

 

울리며 전체적으로 멈춤으로써 갑자기 끝난다. 그리고는 코다가 장송곡 비슷한 형

 

식으로 주요 주제의 으뜸 모티브를 반복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브루크너가 이 악장의 영감을 리하르트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델란드인'에 나오

 

는 아리아, 제 1막에서 네델란드인의 c단조 아리아에서 얻어왔다는 사실을 알면 이

 

해가 훨씬 쉬워진다. 교향곡의 주요 주제는 아리아의 주제와 놀랄만큼 유사한데,

 

그 아리아의 내용은 브루크너 음악이 제자리를 찾으려고 추구하는 정신적 터전을

 

묘사한다. 바그너의 아리아 내용은 '심판의 날'과 '죽은 자의 부활'에 임하는 때

 

그를 기다리고 있을 해방을 고대하는 네델란드인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는

 

반면에 브루크너는 '죽음의 알림'과 '체념'을 이야기 한다.

 

 

 

한편 8번 교향곡의 스케르초 악장은 현대 역사에 입각하여 해석해야 한다. 브루

 

크너는 이 악장이 소박하고 평범한 시민을 상징하는 대중적인 인물이었던 전통적인

 

'독일인 미헬'의 초상화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19 세기 동안 그 인물은 독일 제국

 

의 건설과 더불어 생겨난 희망, 독일의 정치적 무기력함에 대한 실망, 세계 강국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요약하고

 

상징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는 '독일인 미헬'이 국민에게 정치적 각성

 

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브루크너의 말과 다른 암시들로 미루어보아 제

 

8번 교향곡의 스케르초와 트리오에서 그가 '독일인 미헬'의 영웅적인 면모 뿐만 아

 

니라 몽롱하고 꿈에 젖은 면모도 묘사하려했던 의도가 확실히 있었다. 브루크너의

 

동시대인들은 거기 등장하는 상징주의를 잘 알았고, 사실상 1892년에 화가 페리 베

 

라톤은 브루크너를 '독일인 미헬'로 묘사하였다.

 

 

 

브루크너는 또한 최종 악장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도 제공했다. 그는 이 악장

 

의 주요 주제를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러시아 황제의 만남이라는 세계적인 사건과

 

관련지었다. 이 표제 주석에 있어서는 아무런 환상적 요소가 없고, 단만 트럼펫 팡

 

파르가 특별히 두드러진 금관악기의 취주로 군대음악의 느낌을 전한다. 브루크너는

 

최종 악장에서 다른 두 악구에 '죽음의 행진'과 '엑스타시'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

 

리고 세 번째 주제 집단에서 '죽음의 알림'의 리듬을 인용하기도 하는 화려한 행진

 

곡 같은 부분이 뒤따른다.

 

 

 

1892년 12월 18일 빈에서의 첫 공연 이후, 제 8번 교향곡은 대부분 신문으로부

 

터 '우리 시대 최고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한슬릭은 변함없이 브루

 

크너의 적으로 남아있었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교향곡이 '어설프고 역겨움을 느

 

끼게 한다'고 평했다.

 

 

 

브루크너는 1892년에 시편 150편을 바탕으로 삼아 그의 마지막 종교적인 작품을

 

작곡했다. 하느님의 찬양은 그로 하여금 어두운 빛깔들이 사라진 찬란하고 생동감

 

넘치는 뛰어난 곡을 만들게끔 마음을 움직여 주었다. 바로크 양식에 따라 작품은

 

힘찬 다섯 음의 도입부와 교묘한 푸가로 이루어져 활기찬 주제의 구성에 크게 힘입

 

어 기념비적인 효과를 거둔다.

 

 

 

 

 

최후의 교향곡

 

 

 

브루크너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제 9번을 위해서 죽기 전까지 10년이

 

나 일했다. 그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어서 뿐 아니라, '훌륭하신 주님'에게 바

 

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영기를 지닌다. 따라서 브루크너를 신비주의자

 

라고 간주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제 9번 교향곡을 많이 거론하려고 하는 현상은 놀

 

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음악적 조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끼는 반응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브루크너는 나중에

 

초기 표현주의 음악에서나 자리가 잡히는 소리의 영역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음악

 

이 그 문 앞까지 도달한 새로운 세계의 첫 징후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풍부한 화성

 

에는 바그너적 반음계법이 침투하며, 음의 장대한 흐름에 그 보기드문 급격한 면모

 

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표현력이 풍부한 미스테리오소 맨 처음 악장은 예리한 대조들이 두드러진다. 브

 

루크너는 어둡고 신비한 개시부 다음에 길게 이어지며 상승하는 고양부에 의해서

 

힘찬 주요 주제의 등장을 위한 준비를 멋지게 갖춘다. 전개부와 재현부는 압도적인

 

클라이막스로 절정에 이르는데, 마지막 클라이막스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소리의 덩어리이다.

 

 

 

스케르초는 이 분야에서 브루크너가 작곡했던 것들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인 것

 

이다. 소리는 피치카토로 대화하는 목관악기와 현악부의 부드럽고 실질적으로 인상

 

파적인 면모로부터 투티의 웅장한 흐느낌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실내악과 거

 

의 구별이 가지 않는 섬세한 트리오는 브루크너 작품에서 보기 드분 경쾌한 감각을

 

지녔다.

 

 

아다지오 악장을 우선 자서전적인 각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1894년 4월에 작

 

곡가가 그 윤곽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2 년째 앓고 있던 몸이었다.

 

그는 심장과 신장의 기능 약화, 호흡 곤란과 수종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상태

 

는 잠깐 좋아지다가 다시 악화되고는 했다. 그의 머리 속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아다지오 악장의 튜바이 애절한 악절이 '삶에 대한 고별'이

 

라고 이해되기를 바랐다. 아다지오 악장에 들어있는 음악의 인용들도 그에 못지않

 

게 중요하였다. f 단조 미사곡의 글로리아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소서' 악절은 부

 

주제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를 제공한다. 그뿐 아니라 f 단조 미사곡의 '베네딕투

 

스', 제 8번의 아다지오 악장, 제 7 번 교향곡의 모두 악장에서도 인용되었다.

 

 

 

제 9번의 최종 악장을 위한 세밀한 스케치들이 남아있는데, 코다까지 진전된 상

 

태이다. 이때쯤에는 병이 심해졌으므로 작곡가는 이 악장을 끝내지 못할 운명이었

 

다. 그래서 그는 <테 데움>이 교향곡의 끝에서 연주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했

 

다.

 

 

 

브루크너는 1896년 10월 11일 오후 3시 경, 제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가

 

지고 오전에 조금 일한 다음에 숨을 거두었다. 이튿날인 10월 12일에 후고 볼프는

 

그의 친구 의사 하인리히 포트페슈니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아마 신문

 

을 봐서 브루크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례식은 내일 거행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내일 그의 마지막 안식처로 옮기게 될 사람의 중요

 

성을 아직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1997. 5. 14. 드라큐니...

 

 

 

 

 

추신: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에 대한 일련의 세개의 글은 제가 전에 스터디를

 

하다 찾아낸 자료로서 '음악의 유산'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오래된 자료지만 참 유

 

익한 자료입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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