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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강론 33 세상을 비추는 두 빛의 충돌과 조화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러셨는데, 우리가 세상을 비추는 빛은 두 가지 빛이 있다. 하나는 평화의 빛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빛이다.
평화의 빛은 우리의 활용의 현장에서 우리가 비추게 되는 빛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래서 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 평화의 빛이다. 진리의 빛은 좋은 진주로 여겨지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복음의 진리를,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의 진리를 설명하고 또 우리의 관계를 증거물로 제시하면서 진리의 빛을 비추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 두 가지 빛이 서로 충돌해서 혼란이 일어날 수가 있고, 또 조화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굉장히 현실적인 주제인 것이다. 그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가 보도록 하겠다.
A. 평화의 빛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평화의 빛의 현장이다.
눅 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이 평화의 빛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인데 친절을 베풀어서 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결핍된 부분을 우리가 힘 닿는 데까지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친절인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우리의 친절에 고마워하면서 마음 문을 열게 되면서 우리와 화목한 관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 평화의 빛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환자들과 또 심지어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들까지 모여들었는데 다 치료를 해 주신다. 그 사람들의 갈급한 상황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평화의 빛은 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탐욕과 공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친절이다. 따라서 그 사람들의 요구, 그 사람들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이 우리가 베푸는 친절인데 이런 문제가 생긴다. 즉 그 사람들의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각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진리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B. 진리의 빛
눅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똑같은 상황인데 예수님의 반응이 180도 다르다. 그러니까 평화의 빛의 현장에서는 사람들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주시는데 이 누가복음 5장에서는 똑같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인데 냉정하게 외면을 하고 한적한 곳에 기도를 하러 가버리신 것이다. 똑같이 절박한 사람들인데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상반된 행동이 어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평화의 빛과 진리의 빛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을 우리가 보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자.
C. 두 빛의 충돌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4: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4: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가르치시는 말씀도 사람들의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우리가 추론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송을 하는 것이다(15절).
그런데 이제 갈릴리의 나사렛 고향으로 가신다. “나를 보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전파하면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는 말씀도 고향 사람들에게는 문자 그대로는 사람들의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예언으로 그렇게 독해가 되고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 성서에 엘리아와 엘리사 때의 기사를 인용을 하시면서,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뭐 하나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만 해줬다, 마찬가지로 고향 사람들이요, 기대를 접으시오 꿈 깨십시오 라고 하니까 고향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끝까지 치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이것이 충돌의 현장이다. 평화의 빛을 비추는 이유는 진리의 빛을 비추시기 위함인데 고향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평화의 빛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너희들의 절박한 상황을 내가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평화의 빛도 비추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 사람들이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다.
여기 이 장면에서는 그냥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시는 것으로 끝나고 이 고향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는 모습까지는 전개가 안 된다.
D. 두 빛의 조화
눅 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주님께서 평화의 빛을 비추실 것을 기대했는데 자기만 혼자 고생하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 밑에 앉아서 말씀만 들으니까 마르다가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 것이다. 마리아의 저 싸가지 없는 행동을 꾸짖던가 해서 올바른 길로 이끄셔야지 저걸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을 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마르다는 평화의 빛을 기대하는 사람인데, 마리아는 진리의 빛을 사모하게 된 건지 뭔지는 우리가 아직 잘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마르다이다.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곳이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에게 들어가서 우리가 비출 빛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평화의 빛과 진리의 빚 두 가지가 있는데 평화의 빛을 비춘다는 것은 한 개인의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지만 집단적으로 보면 사람의 길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즉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가르는 것이 집단 차원에서의 평화의 빛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르다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내 동생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메시아라면 이 사회 질서를 똑바로 세우셔야 될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질서 문제이다. 그러니까 내 동생은 지금 언니에게 할 합당한 행동을 안 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는 피해를 보고 있으니 이 질서를 바로잡아주세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집단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의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즉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마르다의 사고의 흐름이 휴머니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진보 기독교의 흐름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기에 동의를 안 하신다. 마르다가 생각하는 사회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평화의 빛은 개인에게는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고, 집단적으로는 그 사회의 질서를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다 인간의 기준이다. 개인의 욕망과 집단적인 욕망을 가진 인간의 기준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것이, 개인의 욕망이 제각각 이듯이, 집단적인 욕망도 진보 진영의 욕망이 있고 보수 진영의 욕망이 있어서 집단적으로도 제각각이다. 그러면 평화의 빛을 비춘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고향 사람들의 반응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에게서 평화의 빛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배신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과 결정과 행동이 불의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반응인 것이다.
그럴 때 고향 사람들 경우에는 해결을 안 하시고 그냥 일단 자리를 피하시는 일 까지만 하셨지만 여기서는 마르다를 바로잡으신다.
마르다는 세상 이치를 기준으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한다.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세상 이치에는 맞다. 예수님 일행을 대접해야 되니까 음식도 만들어야 하고 하는 것이 세상 이치로 맞는 것인데 마리아가 여기에 참여를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답을 제시하신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네가 너무 많은 것을 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지금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길에서 올바른 삶이라는 것이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다의 판단은 예수님 일행이 우리 집에 오셨으니까 10가지 일을 해야 되는데 마리아가 다섯 가지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정의로운 거 아니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네가 한 두세 가지만 하면 되잖아? 왜 10가지를 하려고 달려들어서 마리아가 다섯 개를 안 한다고 원망하니? 그건 좀 생각을 잘못한 거다 라고 현실적인 그 이야기를 하시고, 그 다음 두 번째는 마르다가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래야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그 10가지 일 전체가 마리아가 택한 것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 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마르다가 왜 예수님 일행이 손님으로 오셨을 때 왜 10가지 일을 해야 된다고 계산을 했느냐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칭찬을 받게 되고 스스로 뿌듯하게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러니까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치켜 올리기 위해서 열 가지를 해야 된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그냥 몇 가지만 하면 마리아에게 불만을 털어놓을 일이 없을 거 아니냐? 그러면 마리아 원망할 일이 없을 거 아니냐,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좀 지혜롭게 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현실적인 답을 제시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계획하고 있는 그 열 가지 일보다 마리아가 선택한 전혀 다른 길이 그게 올바른 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평화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우리의 사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이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세상 이치를 내세우면서 시시비비를 걸고 있는 마르다를 마리아가 선택한 여호와의 길로 이끄는 기회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마르다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르다를 위해서 이 기회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첫 번째 답은 세상의 이치 속에서 살아갈 때도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 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되고, 세상 질서를 유지하는데 지혜롭게 판단하고 행동해라 하는 세상 이치에서의 지혜로운 판단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결론은 아니다. 두 번째는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마르다에게 기회를 주시면서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수님의 반응이 두 빛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두 가지 방법이다.
사람들은 세상 질서가 잘 자리를 잡으면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아름다운 사회가 될 거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망상인 이유는 질서라는 것은 항상 파괴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질서보다 더 나은 질서를 제시하면서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고 하는 혁명 세력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개혁이 진행된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질서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을 하면, 보수 진영이 바라는 세상 질서와 진보 진영이 바라는 세상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서 또는 가치관에 따라서 질서라는 것은 항상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 속해 있는 마르다에게 마리아의 경우를 들어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여호와의 길로 오라고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가 그 사람의 길로 들어가서 평화의 빛과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평화의 빛을 비추어서 그 사람들의 어려움을 우리가 가능한 한 해결해 주고 친절을 베풀고 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중요하다. 그런데 평화로운 관계는 그 사람들의 실존적인 문제나 존재론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진리의 빛을 비출 수밖에 없다. 진리의 빛을 비춰야만 한다. 진리의 빛이 어둠을 몰아냈을 때 그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가 그때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의 빛을 비추다가 진리의 빛을 비추는 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애타는 심정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쪽 동네에서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다 고쳐줬는데 우리 동네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왜 안 하는 거야? 이러고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빛과 진리의 빛의 현장에서의 충돌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빛을 비추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운 세상 질서 속에서 나름 현명하게 살 수 있도록 advise를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평화의 빛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지혜롭게 평화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우리와 가까워진 사람이, 우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사람이 현실 문제로 막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우리가 그 문제를 좀 덜어주려고 advise를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답은 아니다. 답은 그 사람에게 결국은 진리의 빛을 비춰야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답인 것이지 그 외에는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평생 수행 정진을 하든 해탈을 하든 달관을 하든 각 도생하는 자들에게는 답이 없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는 마르다의 원망하는 모습이 정상적인 옛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각자도생하는 삶에서 빠져나와서 하나가 되는 삶으로까지 옮겨가는 여호와의 길로 옮겨가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사람의 길밖에 모르는 옛 사람들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는 군중 속에서 마리아는 괜찮은 사람으로, 마르다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보니까 결국 도덕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성서 66권의 계시를 전체적으로 우리가 논지를 파악할 때 눅 4:18-19의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인데, 나중에 메시아가 오시고 성령이 오시면 택하신 자들을 순서대로 우물 밖으로 꺼내신다는 말씀을 예언으로 주셨구나 하는 것이 우리 눈에는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 같은 쪽의 눈에서 볼 때는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 자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더 크게는 우리 공동체의 문제, 우리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 나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길을 완벽하게 해 주러 오신 분, 인간의 길을 진선미가 가득한 길로 만들어주러 오신 분, 이렇게 독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인간의 길에서 뜯어내서 여호와의 길로 옮기신다는 말씀이구나 라는 것이 우리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1. 사람의 길(코스모스의 스토이케이온)
2. 사람의 길에 비추는 평화의 빛
3. 사람의 길에 비추는 진리의 빛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엄숙 자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