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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경가회 월모임에서는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시는 허윤진(안드레아)신부님의 미사와
강의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미사강론과 본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미사강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을 걸려 가나안 땅으로 오는 과정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일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믿고 따라왔지만 그들은 모세처럼 하느님을 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숫 송아지는 힘 있고 믿음직한 형상으로 그들이 원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이 올바르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으나 하느님은 안 보이셨기에 자기 식의
하느님을 만든 것 -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며 이것을 깨야함을 모세를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알고, 너를 지켜본다고 하시는 말씀을 어머니이신 여러분은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독립하여 따로 사는 자식의 전화에 들려오는 음성만으로도 그 자식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과 항상 함께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아뢰면서 ‘당신 안에 쉬려고
왔습니다.’ 하며 위로 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못하실 것이 없으면서 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을까요. 그분과 함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인들이 원하는 자기 식의 하느님을 볼 수 없었기에 그들의 눈에 안 찼고
따라서 구세주의 모습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됨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가 차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이
나를 따라오셨으면 하지는 않는지요.
경가회 여러분은 만나면 반갑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모임이지요. 허나 어느 모임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흠을 더 잘 보게 됩니다. 자신이 자칫 옥에 티를 보는 사람은 아닌지, 내가 왜 봉사하려는 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미는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잎을 훑어내고 흠 있는 꽃잎을 제거해서 티 없는 꽃들만 꽂아 놓으면
오히려 조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많은 좋은 것들을 지나치면서 왜 조그만 티를 보고 있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봐야 합니다. 내 마음의 황금 송아지가 아닌, 안 보여도 좋은 마음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좋은 것을 많이 보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 강의> 다문화 가정과 교회의 역할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험과 연륜이 쌓이게 되면 학문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매사에 참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 곧
덕입니다. 성경에도 백발은 지혜의 상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나만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고집스러워지고 내 판단을 앞세우는 늙은이도 될 수가 있습니다. 후덕한 늙은이가 되는가,
아니면 잔소리꾼이 되는가가 갈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불이 뜨겁다는 것을 경험하게
지켜보면서 화상연고를 대령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불이 뜨거우니 손대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는 불의 뜨거움을 경험하면 잔소리 안 해도 조심합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상처를 입게
놔두라는 건 물론 아닙니다. 삶의 연륜과 지혜를 나눔에 있어 인내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인내는 사람의 생명도 살릴 수 있음을 감히 제 경험을 통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인내를
발휘한 제가 고맙고 무척 대견스럽습니다.
신부 초년병 시절, 보좌신부로 본당에서 청년들과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있던 밤 9시쯤에 50대의
형제분이 오셔 면담을 요청하여 할 수 없이 응했습니다. 그런데 면담은 자정까지 장장 3시간이나 걸렸고
저는 청년들이 밖에서 아우성치며 나오라고 하는 소리에 계속 안절부절 하면서도 형제님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명퇴하고 나니까 아내와 딸로부터 사랑은커녕 무시를 당한다고 느끼고 세상 살 맛을
잃고 허무와 우울증에 빠져 이야기를 토해 내셨습니다. 그리곤 그 면담 사건을 저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10년쯤 후, 어느 본당에 갔을 때, 한 형제님이 저를 얼싸 안으며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저는
기억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형제가 말하기를 그때 죽기를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신부님께 속을 털어 놓고
싶어서 성당에 갔는데 제가 3시간이나 본인의 말을 들어 주었음을 지각한 순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죽기가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제가 그날 청년들과의 소임
때문에 “내일 일찍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분에게 내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식의 하느님이 움직이시기를 바라지는 않는지요. 홍수가 났을 때, 구조대원을 보내고
마지막에는 헬리콥터까지 띄워서 생명줄을 내려 보내시는 하느님을 마다하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걱정
없다며 내 식대로 기도만 하다가 홍수에 떠내려가지는 않는지요. 또 하느님께서 황금 송아지의 모습으로
짠! 나타나시기를 바라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꿈에 예수님을 보았다,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 하는데 정신건강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다문화가정이라 함은 우리와 구별되는 가정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결혼하는
10쌍 중 1쌍은 다문화가정이며 지방은 전체보다 3배 높은 30% 이상입니다. 자녀들은 현재 10만 명이
넘습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시집 온 여자들은 한국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할 뿐입니다. 결코 이들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문화가 다르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예를 들면 태국은 항시 더운
나라이므로 그곳에선 음식을 시원하게 내놓는 것이 정성들여 대접하는 것인데 노동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찬밥을 준다고 무섭게 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을 피해서 피신 할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는
이들에게 누가 이웃이 돼 주겠습니까? 노동사목위원회에서 <베들레헴 어린이 집>을 운영하게 된 것도
피 흘리며 찾아 온 아기 엄마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들은 처자식 걱정에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저는 남의 아내, 남의 자식들을 염려하며 돌보고 사는
팔자입니다. 사람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어 내며 삽니다. 하지만, 아주 모질게 넘어지면
누가 부축해주고 어깨를 빌려줘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강도에게 당한 유대인의 생명을 살린 사람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는 자기 방어를 할 줄 모르는 무식하고 순진한 정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준비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와 동생들하고 그야말로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했을 때, 성당 빈첸시오회에서 쌀과 라면을 갖고
우리에게 왔던 기억이 제 일생 가장 고마운 도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친척들도 떨어져 나가는 판에
성당에서 저희 식구에게 다가왔으므로 그 감사함으로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였고 어머니도 성당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외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개신교나 불교 쪽에서 먼저 저희
가족을 도왔더라면 어쩜 저는 지금 목사나 스님이 되어 있었겠지요. 저의 어머니는 가끔 지금의 삶이 꿈이
아닌가? 하실 정도로 옛날의 그 어려운 시절로 돌아갈까 걱정하신답니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에선
윤진 네를 누구든지 알아봤습니다. 시장을 갈 때에도 다리를 저는 엄마 뒤에 우리 사남매가 누가 더 엄마
걸음걸이를 똑 같이 흉내 내나 시합을 하며 걸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동네의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문화가정도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으로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결혼이주 여성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의
저학력자입니다. 그렇다고 인격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국경, 인종과 그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장 헐벗고 소외된 이웃을 거두면서 감사하며 기뻐한 이유도 그들
하나하나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를 위해 여동생 내외가 아기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창세기를 다시 읽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흠뻑 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인간을 위해 해와 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마련해 주시는 것과 동생이 아기 방의 천장이며 여러 가지를 꾸미는 것이 똑같다고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인간 하나하나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효율적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방치합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는 효율성을 따질 수 없이 소중합니다. 내가 소중하니까 네가 소중하고
너라는 존재가 있으므로 내가 있게 되며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데 있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을 첫째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도 돈으로 기부하여 막연하게 좋은 곳에 쓰여 지겠지 하는 것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 다가가 만나서 각자의 어려움을 보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선행이 미래의 사제를 만들 수도 있으며 선교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나에게 알맞게 맞추면 탐욕이 됩니다. 99마리를 소유한 사람이
100마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의 한 마리를 빼앗는 경우가 그렇지요. 또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자선과 상관없는 단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웃에게 알맞게 맞춰 몇 마리라도 나누는 것이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즉, 누군가를 향해야 자선이 됩니다.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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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 다가가 만나서 각자의 어려움을 보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선행이 미래의 사제를 만들 수도 있으며 선교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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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말씀을 받아서 다시 올려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경자님 역시 아주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려주시고 후원회를 소개하실 줄 짐작했어요. 강론을 정리하고 나니 핵심이 잡히네요.
모질게 넘어진 결혼이주 여성은 우리가 어깨를 내어주고 부축해야 일어설 수 있는 바로 우리 이웃, 우리와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위한 환경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윤진 신부님의 젊은시절 성탄전야의 바쁜시간을 빼앗았던 그 형제님의 이야기가 감명깊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을 모시고 최선을 다해야 함을 진지하게 느끼게 됩니다. 너무도 정리를 잘해주신 한경자 후배님과 이미숙 님께도 큰 감사드립니다. 편안히 앉아서 그날의 강의를 들으니 너무 행복하네요. 사순절이 끝나가는게 주님께 너무죄송하지만 그래도 이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