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呪術)”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어 재앙을 물러가게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점치는 행위’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주(呪)”입니다. 입 ‘구(口)’와 맏 ‘형(兄)’이 합쳐진 글자인데 ‘입을 통해 바라는 대로 해달라고 빌다’로 씁니다. 주술(呪術), 주문(呪文)을 통해 신에게 도와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주술’에서 파생된 말이 “저주(咀呪)”입니다. ‘저(咀)’는 씹다. ‘씹어서 맛을 보다’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저주’는 ‘몹시 미워하는 상대에게 재앙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록 빌며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술이나 저주는 다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즉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흑주술’이라는 말은 어학사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흑마법黑魔法), 흑주술(黑魔術)은 서양에서 나온 말 같은데 ‘흑마법사’라는 사람들이 쓰는 수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무당이나 풍수지리를 본다는 지관을 직업이라고 딱 찍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직업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무당이나 지관이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남의 묘소를 훼손하는 일이 있는 일인지는 제가 알 수가 없지만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조상 묘를 훼손하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북 봉화군의 부모 묘소가 훼손됐다고 세상에 알린 건 이재명 대표 본인이었다.
3월 12일 새벽 3시53분 페이스북에 “무덤 봉분과 사방에 구멍을 내고 돌을 묻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며 사진 2장을 올렸다. 사진 속 돌에는 세 글자의 한자가 적혀 있었는데, ‘생명(生明)'은 명확했지만 마지막 한자는 흐릿했다.
네 시간쯤 지나 이 대표는 “일종의 흑주술(黑呪術ㆍ위해를 가하는 주술)로 후손의 절멸과 패가망신을 저주하는 흉매”라고 했다. “나로 인해 저승의 부모님까지 능욕당하시니…”라고도 했다.
민주당이 득달같이 가세했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판독이 어려운 한자를 ‘살(殺)'로 단정하며 “이 대표가 얼마나 두려우면 저주의 글자까지 써놓았겠냐. 배후 세력을 밝혀내야 한다“고 했다. 임오경 대변인은 “테러에 주술적 수단까지 동원됐다”고 했으며, 친야 성향의 황교익씨도 “‘무당의 나라’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누가 봐도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정치 공세였다.
하지만 20여 일 만에 상황은 반전된다. 경찰 조사 등에서 문중(경주 이씨) 인사의 요청을 받은 풍수전문가 이모(85)씨가 이 대표를 돕는다는 취지의 기(氣) 보충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흐릿한 한자는 국과수 감정 결과 살(殺)이 아니라 기(氣)로 판독됐다. 생명살(生明殺)이 아닌 생명기(生明氣)였다. 난감한 결과에도 이 대표는 논란을 자초한 것을 사과하지 않고 대신 훼손자의 선처를 요청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대목이 적지 않다.
①이 대표는 진정 몰랐나=문중 인사 등이 돌을 묻은 건 지난해 6ㆍ1 지방선거 사흘 전(5월 29일)이라고 한다. ‘이 대표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도와주자’는 취지였다. 결과적으로 지난 10개월간 이 대표는 물론 가족ㆍ친지도 해당 묘소를 찾지 않아 훼손을 몰랐다는 얘기다.
추석도 있었고, 설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곳은 1986년 12월 아버님을 모시고, 2020년 3월 어머님을 합장한 묘소”라고 썼다. 부친 기일도 지나친 셈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대선 유세 중 돌아가신 부모 얘기를 하다 울먹였다. 애틋함이 각별해 보였다. 이런 탓에 일각에선 “묘소 훼손은 알고 있었는데, 공개를 뒤늦게 한 거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한다. 3월 12일은 이 대표 전 비서실장이 극단적 선택(9일)을 한 직후로 친명-비명 갈등이 극심한 때였다.
②문중 인사는 왜 연락 안 했나=분묘 발굴죄는 반의사 불벌죄가 아니다.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다. 벌금형이 없고 5년 이하 징역형이다. 이런 중범죄를, 그것도 대선에 출마한 유력 정치인의 부모 묘소를, 돕겠다는 의도의 문중 인사가 이 대표 측과 아무런 상의 없이 함부로 건드렸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풍수전문가 이씨는 “선거가 임박했고, 함께 간 문중들도 이 대표와 연락할 방법을 몰랐다”며 “나중에 이 대표에게 알려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논란이 불거진 뒤에라도 이 대표에게 사정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③제거 의식은 왜 하나=이 대표는 페이스북에 묘소 훼손을 알리면서 “흉매지만 함부로 치워서도 안 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수일 내 제거하기로 했다”고 썼다. 이상하지 않나. ‘흑주술’로 칭한 흉매를 없애기 위한 별도의 의식이라니. 통상 부적을 믿지 않으면 그냥 떼어 버린다. 부적을 떼기 위한 의식을 행한다는 것은 그걸 중시한다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도 조상 묘가 훼손됐었다. 정치에 입문하기 직전인 2021년 5월 세종시 조부 묘 위에 인분이 버려졌고, 구덩이엔 식칼과 머리카락 등이 묻혀 있었다. 당시 윤 대통령 측은 “친척들이 발견해 치웠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술 정권'이라고 하기엔 너무 쿨하지 않은가.>중앙일보. 최민우 중앙일보 정치부장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시각각, 문중에선 상의 없이 묘 건드렸나…이재명 흑주술 미스터리
제가 앞에서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했던 것은 이재명 대표가 스스로 밝힌 부모 묘소의 훼손 얘기가 바로 이 대표의 경기도지사시절 비서실장이 목숨을 버린 시점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처음부터 상당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해서 그것을 언론에 공개했거나, 아니면 누구의 제보에 의해 가서 확인했다거나 하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궁지에 빠진 사람이 자기 폰에 있는 사진을 올려놓고 누군가 자신을 저주했다는 식의 얘기를 하고, 거기에 민주당 사람들이 야단을 떨었는데 그 덕에 비서실장이 남긴 얘기가 어느 정도 묻히는 효과를 가져오기는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 묘소의 상황이 밝혀졌는데도 교묘한 거짓말로 국민을 기만한 이재명 대표나 거기에 부화뇌동해서 음모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왜 대국민 사과 한 마디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