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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교회] 성찬례의 ‘제정 요소’란 무엇인가요?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빵과 포도주를 들고 성부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신 후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잔을 건네주시며 그것이 당신의 몸과 피이니 받아먹고 당신을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1코린 11,23-25)
이후 교회는, 주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이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본질적인 요소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해석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도로 정하신 성찬례의 핵심 요소라고 해석되는 것을 ‘성찬 제정 요소’라고 합니다. 이 해석 작업은 신약 성경이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을 따르려면,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하셨던 본질적인 행위를 모두 그대로 거행하여야 합니다.
■성찬 제정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빵을 드시고,
2) 감사를 드리시고,
3) 쪼개어,
4) 나누어주시고,
5) … 라고 말씀하셨다.
6) 잔을 드시고,
7) 감사를 드리시고,
8) 건네주시고,
9) … 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미사에서,
‘빵과 잔을 드는 것’은 예물 준비에,
‘감사를 드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은 감사 기도에
‘쪼개는 행위’는 빵 나눔에,
‘나누어주고 건네주는 것’은 영성체에 배정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성찬례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최후 만찬을 ‘모방’(imitatio)하는 것이며, 이 모방을 통하여 사제가 거행하는 성찬례는 주님의 성찬례가 되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주님의 명에 따라 최후 만찬을 모방하는 것을 ‘신비의 전수’(traditio mysterii), ‘유형의 거행’(celebratio typi)이라고 불렀으며, 이 때문에 성찬례는 ‘신비’(mysterium)라고 일컬어졌고, 다시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말로 ‘성사’(sacramentum)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4. 미사 해설 – 성찬 전례 (28) 영성체 예식 – 빵 나눔 (1)
■빵 나눔
129. 그다음에 사제는 축성된 빵을 들어 성반에서 쪼개고,
작은 조각을 떼어 성작 안에 넣으며 속으로 기도한다.
✚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빵을 쪼개는 동작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직접 행하신 것으로, 큰 빵을 서로 나누어 먹기 위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하나의 생명을 같은 빵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거룩한 일치라는 은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러한 전례적 상징성은 구체적으로 미사 안에서 “빵 나눔”으로 재현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3항에는 빵 나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제는 성찬의 빵을 쪼갠다. 사정에 따라 부제나 공동 집전자의 도움을 받는다. 빵을 나누는 동작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행하신 것으로, 사도시대에는 성찬례 거행 전체를 ‘빵 나눔’이라고 불렀다. 이 예식은 하나인 생명의 빵,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영성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는(1코린 10,17 참조) 사실을 드러낸다. 빵 나눔은 평화 예식 다음에 시작하며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다. 불필요하게 길게 끌어서는 안 되며 어울리지 않게 과장해서도 안 된다. 이 예식은 사제와 부제만 할 수 있다.”
사제는 빵을 쪼개어 한 조각을 성혈에 섞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따로 축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섞는 행위는 부활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따라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재결합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 분리된 성체와 성혈을 하나로 합치는 이 예식은 우리가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전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사제가 빵을 쪼개는 동안 교우들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기도문을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빵 나눔과 하느님의 어린양을 다른 예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지만, 사제가 조용히 빵을 쪼개는 동안 신자들은 “빵 나눔”에 대한 찬미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빵 나눔이라는 예식 안에 하느님의 어린양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도 “빵 나눔-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2023년 12월 3일(나해) 대림 제1주일 대전주보 4면,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사목국 차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5. 미사 해설 – 성찬 전례 (29) 영성체 예식 – 빵 나눔 (2)
■하느님의 어린양
130. 그동안 아래 기도를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위의 기도는 축성된 빵을 쪼개는 동안 되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소서로 한다.
사제가 빵 나눔을 하는 동안 교우들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이 기도문은 7세기경 동방교회의 예식에서 도입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기도문에서 드러나듯, 하느님께 자비와 평화를 비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 번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신학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칭호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어린양’으로 묘사했고(이사 53,5-10), 세례자 요한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외쳤으며, 요한 묵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 26번이나 부르고 있습니다(묵시 5,6; 12,11). 곧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례적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가대가 노래로 할 수도 있습니다. 축성된 빵을 쪼개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반복해서 할 수 있지만(“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은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는 언제나 끝 절인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내야 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3항을 살펴봅시다.
“성가대나 선창자는 교우들과 화답하며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한다. 노래하지 않을 때는 적어도 큰 소리로 낭송한다. 이 간청은 빵 나눔 예식 때 함께 바치는 것이므로 예식을 마칠 때까지 필요한 만큼 되풀이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소서라는 말로 끝낸다.”
미사 안에서 성가대가 봉사할 경우, 성가대가 중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시작하지만, 평일미사 때 해설자가 “하느님의 어린양”을 인도해야 할 때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예식서에 의하면, “그동안 아래 기도를 노래하거나 낭송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사제가 빵 나눔을 시작할 때 노래나 낭송이 시작됨이 합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영성체 전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돌아보고 헤아리고] 위령 성월에는 꼭 식사 후 기도를…
한 해를 마감하는 위령 성월입니다. 위령 성월이 11월, 곧 전례력의 마지막 달에 온 것은 ‘위령의 날’이 11월 2일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순교자 공경과 성인 공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점차 많은 성인이 생겨나자, 11월 1일이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해져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수도원 개혁으로 유명한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998년에 제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가 그다음 날인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령하였고, 그 이후로 점차 정착되어 11월 한 달 위령 기도가 바쳐지고 위령 성월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첫날 11월 1일에 ‘모든 성인의 날’ 전구 기도를 통해서 성인들의 은덕을 받고, 아직 보속이 남은 연옥 영혼들을 위해 다음 날 ‘위령의 날’에 기도해 드리는 것은 매우 좋은 전통인 듯합니다.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교회의 시작부터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옛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에는 곳곳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먼저 저녁기도인 만과(晩課)에는 시편 129편과 함께 두 가지 기도문이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녀 교우 중에 새로운 죽은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남녀 교우 중에 새로 죽은 이 있거든 그들을 위해 이 아래 경을 염하라.)
“성모께 간절히 비나니 전차로(전구 기도로) 천주께 구하사, 새로 죽은 (아무)의 영혼이 연옥 형벌을 면하고, 길이 평안함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경, 성모경 각 한 번)
교우촌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음에 이른 교우들을 위해 이렇게 짧은 전구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어서 성영(聖詠, 시편) 129편 기도를 바칩니다.
“주여 나ㅣ 깊고 그윽한 곳에서 네게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굽어 들으소서. 네 귀를 기울이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주여 너ㅣ 만일 죄악을 살피시면, 주여 뉘 능히 당하리잇가. [중략] 주여 망자들에게 길이 평안함을 주소서. 영원한 빛이 저희에게 비추어지이다. 망자들이 평안함에 쉬여지이다. 아멘.”
그러고 나서 두 번째 기도문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모든 믿는 자를 조성하시고 구원하신 천주여, 너를 섬기던 남녀 영혼들에게 모든 죄를 풀어주사 그 평생에 원하던바 사하심을 우리 정성된 기도로 얻게 하소서. 아멘.”
이렇게 매일 저녁기도 때마다 우리 신자들은 최근에 선종하신 분을 위해 기도드리고, 동시에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미사를 대신하는 「첨례경」에는 ‘칠기구(七祈求)’라는 일곱 가지 보편 지향 기도가 있었습니다. 교황님, 주교님과 사제들, 임금과 관리들, 신자들, 병들고 가난한 이들, 이단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매주 기도했습니다. “죄벌을 용서하사 길이 평안케 하소서.”라는 매우 짧은 화살기도 형식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천주성교공과』 기도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천주성교예규』라는 상장례 예식서를 만들어서 임종 및 입관, 하관 등 예식과 기도를 함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시편 기도를 외우는 연도(煉禱)가 생겨났습니다.
“상장례 예식서 출간 이래로 그 남쪽의 모든 지역에서 외교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그것을 실행하는데, 그것이 많은 고장에서 성공하여 입교자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했습니다. … 구경하는 외교인들은 아랑곳없이 선두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저마다 손에는 촛불을 들고서 큰 소리로 시편을 암송하며 열을 지어 지나가는 천주교인들의 장례 행렬은 조선에서는 보기에도 참으로 야릇한 광경이지요. 그 먼 지방의 외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우리 천주교의 장례의식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보았으며, 천주교인들의 장례가 자기네들의 그것보다 훨씬 낫게 치러지고 있다는 말까지 합니다”(1863년 9월 13일, 다블뤼 주교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 중에서).
다블뤼 주교의 이 편지는 천주교 장례 예식과 연도가 이미 그 시기에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옛 신자들은 삶에서 죽음을 매우 가까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목적이 본래 온 곳으로 되돌아가고, 본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요리 문답의 첫 문항입니다.
문 :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 :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식사 후 기도를 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혼 영혼을 위한 기도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후 축문(飯後祝文, 식사 후 기도문)
전능하신 천주여, 네 모든 은혜를 위하여 우리들이 네게 감사하나이다. 아멘.
계 : 주의 이름을 찬송함이여!
응 : 이제로부터 무궁세에 이어지이다.
죽은 믿는 자들의 영혼이 천주의 인자하심으로 편안함에 쉬여지이다. 아멘.
[신심 생활] 성모 호칭들 : 고통의 성모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십자가의 길을 봉헌하며 자주 부르는 이 성가의 노랫말은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어머니가 서 계셨다)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중세 시대부터 전해온 이 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십자가 아래 서 있었다는 성경 말씀(요한 19,25 참조)을 토대로, 성자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 중에 성모님께서 감수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을 바라보고, 그 고난의 여정에 함께 동참하기를 바라며 죽음의 순간을 위해 성모님께 전구하며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겪으셨던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고통의 성모’라는 특별한 호칭을 봉헌했다. 이런 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은 오랜 역사를 지니는데, 특히 13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설립된 ‘성모의 종’ 수도회에서 본격화된다. 수도 생활의 역사 안에서도 특이하게 일곱 명의 공동 창립자를 둔 이 수도회에서는,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고백했던 창립자들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성모님께 의지하며 봉헌의 삶을 살고자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동정 마리아의 일곱 가지 슬픔에 대한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성모의 종’이라 자처하며 시작된 봉헌 생활과 이들의 사도직을 통해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대중적 신심이 널리 퍼지게 된다.
전례 안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하는 축일이 있는데, 교회는 9월 15일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봉헌하며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고통을 위로하고 공경하도록 권고한다. 특히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은, 9월 14일에 거행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을 이 기념일로 고정하며, 성모님이 겪은 모든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구원을 위해 그분이 짊어지셔야만 했던 십자가의 신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교회의 음악과 미술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은 많은 예술적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 성음악에서는 앞서 말한 ‘스타바트 마테르’란 작품이 그 신심적 내용과 함께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인해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사랑받는 음악적 소재가 되었고, 성화와 성상 중에서는 ‘피에타’(Pietà), 즉 성모님의 일곱 고통 중 하나인 돌아가신 예수를 품에 앉으신 성모님의 비통과 슬픔이 수많은 창작에서 주제가 되었다.
이처럼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신심은 성모님의 삶이 늘 예수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기초로, 성모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삶의 기쁨이자 은총으로 삼으셨고, 동시에 그분을 통한 모든 슬픔과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하셨음을 묵상케 한다. 이에 ‘고통의 성모’께 대한 신심 행위는 모든 신앙인의 삶에서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내적 일치에 있음을 전하는 동시에 그러한 삶을 살도록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기도하는 교회] 예물 준비 예식에서 사제가 손을 씻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제는 예물 준비 예식을 끝내면서 제대 옆에서 손을 씻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식 때 사용할 빵이나 포도주를 비롯해 식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봉헌했습니다. 이렇게 봉헌된 물품들은 성직자 생활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봉헌하는 여러 종류의 예물은 사제의 손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였는데, 그다음에 성찬 전례를 계속하기 위하여 사제의 손을 깨끗하게 씻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성체를 영하는 신자가 크게 늘자, 미사 때 쓰이는 빵은 지금의 제병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고, 신자들이 봉헌하는 현물도 11세기 이후 화폐의 발달로 현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사제가 손을 씻어야 했던 실용적 이유가 사라지자, 거기에 신학적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이제 사제가 손을 씻는 예식은 ‘공동체가 내적인 정화를 통해 성찬 전례를 합당하게 거행하려는 열망’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76항)
사제는 정화된 마음으로 성찬 전례를 거행하겠다는 의미로 손을 씻으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미사통상문 28항) 이 기도는 시편 51편 4절 “하느님,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물로 씻는 행위는 정화의 의미를 지녔고,(민수 19,1-22) 거룩한 만남의 장막 앞뜰에는 제사장의 정화 의식을 위해 물을 담아두는 놋으로 만든 큰 가마가 놓여 있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손발을 물로 씻어야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탈출 30,20-21)
초대 교회에도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어 정화하는 관습이 있어서 큰 성당 앞뜰에는 반드시 우물이나 수반이 있었습니다. 이 관습은 현재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전례력 돋보기] 라테라노 대성전과 성 대 레오 교황, 그리고 우리 영혼의 성전 가꾸기
대구대교구의 첫 성당은 1885년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세운 대구 본당이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첫 성당은 어디일까? 바로 11월 9일 봉헌 축일을 지내는 로마의 성 라테라노 대성전이다.
‘로마와 그밖의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
로마의 다른 대성전, 가령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성 바오로 대성전, 성모 대성전의 봉헌 기념일은 선택이지만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일은 모든 교회의 의무 기념일이다. 그만큼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에 앞서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바로 로마 교회가 첫 번째로 봉헌한 성당이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박해를 멈추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성 실베스트로 교황(재위 314-335)에게 본래 라테라노 가문의 소유였던 궁전을 내어 주어 교황이 머물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첫 성당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성당 입구에는 ‘로마와 그밖의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다. 이후 로마 주교인 교황들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머물렀고, 14세기 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잠시 이전할 때까지 교황청의 역할을 했다. 현재 교황은 바티칸 시국 안에 머무르지만 로마의 주교좌는 라테라노 대성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첫 성당은 예나 지금이나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그 권위와 중요성을 이어가고 있다.
로마 교회를 지켜낸 성 대 레오 교황 강론
성전 봉헌 기념일은 단순히 역사적인 의미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머무시는 살아있는 성전, 곧 우리 자신의 영혼을 다시금 들여다보고 가꾸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일 다음날인 11월 10일에 기념하는 성 대 레오 교황(재위 440~461)의 강론은 거룩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교회 역사 안에서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분은 레오 교황과 그레고리오 교황(+604)뿐이며 레오 교황은 이단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이민족의 침입에서 로마를 구한 놀라운 업적을 남기셨다. 레오 교황은 칼체돈 공의회(451)에 서한을 보내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과 강생의 신비를 부정하던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배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이듬해인 452년에는 로마로 진격해 온 훈족의 장수 아틸라와 담판을 벌여 돌려보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의 위엄을 크게 떨친 레오 교황 뒤로 그가 특별히 공경한 로마의 두 사도,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나타나 이민족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또한 레오 교황은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협상에 나서 살인과 방화를 피하게 하셨다. 레오 교황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라테라노 대성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자들에게 정통 교리와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가르친 레오 교황은 수많은 강론집을 남겨 교회 박사의 칭호도 얻으셨다. 특별히 큰 축일을 앞두고 성전을 청소하듯 영혼의 정화없이 부활 축제를 준비할 수 없다고 가르친 레오 교황의 사순 강론을 통해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영혼까지 단장하는 11월 위령 성월과 대림 시기의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경축해야 할 축일이 크면 클수록 이를 경축하는 사람도 그만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축제의 날에 옷을 더 화려하게 차려 입고 마음의 기쁨을 육체의 옷으로 표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종교적 태도로 여겨집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여 성당 자체를 할 수 있는 한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살아있는 진짜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지혜롭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에게 구원을 주는 성사를 경축하기에 앞서 어떤 죄의 때가 자기를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또는 이중적인 마음의 주름이 자기를 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사람의 내면이 악습들로 오염되어 더럽혀져 있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잘 꾸며 말끔한 모습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혼의 순결과 마음의 거울을 가리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벗겨내야 하며, 그 광채를 되찾기 위해서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각자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엄한 심판대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 죄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 『레오 대종, 사순시기 강론집』 사순시기 제3강론 중에서(128~13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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