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박이일의 모임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방담을 나누는 중, 옆에 앉은 J의 휴대폰이 울렸다. 폰 화면을 흘깃 보니 '스토커'라고 떴다. 그녀가 전화기를 들고나간 사이, 내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누가 스토커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누구겠어? 남편이지. 오늘도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몰라.”
집 떠난 마누라가 걱정되어 전화했을 텐데 스토커라니 좀 심한 거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 친구는 폰에다 남편 이름을 '미꾸라지 소금 난리'로 저장해두었다고 했다.
미꾸라지에게 소금을 한 줌 뿌렸을 때 온몸을 비틀어대며 발버둥 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 기분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별거 아닌 일 갖고도 난리를 피워서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아내의 소심한 복수가 느껴진다.
우리 집 남자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어느 날 오전, 은행에 갔다가 손님이 많은 바람에 한 시간 더 지체되었다. 남편이 밤샘 근무를 하고 온 날이라 당연히 잠들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팔짱을 낀 채 들어오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눈알을 바꿔 끼운 것처럼 평소와 다른 눈이었다. 메모 한 장 없이 마누라가 집을 비웠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놀랐다는 게 분노의 포인트였다.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두루 인정받는 사람이 백화점 직원이나 콜 센터 직원의 작은 불친절에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지친 뇌가 엉뚱한 곳에서 과도한 분노를 터뜨리는 증상인데, 이를 '소진 증후군'이라 부른다. 이런 분노를 터뜨리기에 누가 가장 만만할까. 아마 배우자일 것이다. 이런 분노 발산은 느닷없이 일어난다. 당한 사람으로서는 황당하고 억울하다. 따져 묻고 싶지만, 그냥 참고 넘어갈 때가 많다. 참을 인의 형상을 보면 날카로운 칼날이 사람 심장을 후벼 파는 모습이다. 그러니 참을 때마다 마음 벽에 상처가 남게 된다.
중고품을 구입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보면 어딘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중고시장에서는 이걸 '생활 기스'라고 한다. 부부도 어떤 의미에서 중고 상품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에는 이런 '생활 기스'가 많이 나 있다. 미꾸라지 소금 난리를 많이 치는 사람일수록 그 배우자의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2만 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당신들은 서로 성격이 잘 맞느냐'는 문항을 넣었다. 이에 0.5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 결과를 보며 나는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다들 성격이 잘 맞아서 사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만큼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배우자로 택했지만, 어느 날은 정글 속에서 낯선 부족과 맞닥뜨린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면을 지닌 다면체일까.
미꾸라지 소금 난리도 인간이 지닌 하나의 단면이다. 그런데 이것도 길어야 15분이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호르몬 '아드레날린'도 15분이 지나면 우리 몸에서 잦아들기 때문이다. 펄펄 끓던 물도 얼마 지나면 미지근해지듯, 배우자의 난리도 15분만 참고 기다린다면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언 노인이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얘기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늑대 두 마리가 살고 있는데, 한 마리의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선한 생각만 품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그 둘 중 어느 쪽이 이기나요?"라고 손자가 물었다. 이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상대가 어떤 일로 분노를 터트릴 때 그 분노에 먹이를 대어 주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이다.
소중히 모셔야 할 VVIP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 다정한 아내가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데 쏟아부은 시간과 기운이 아깝다. 그래도 지난 세월 속에서 우리가 건진 게 있다면 서로 웃는 지점과 분노 지점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웃는 지점이 같다는 것은 우리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의미이고, 분노 지점이 같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지점들이 우리 부부에게 노란 빗금의 '안전지대'였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의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여기 좀 앉아 보세요.”라고 한다. 그동안 적지 않게 정신적 고문을 당해온 사람 같다. 나 역시 '미꾸라지 소금 난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