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 알제!
유교 사상에서 효는 인륜으로써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덕목이라고 배웠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셔와 ‘융릉’이라 칭하고 인근에 용주사를 지어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빈 지극한 효자였으며 그 원천은 사랑이다.
이번 주간 인간극장은 요즘 보기 드문 효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늙은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장면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기에 자식으로서 돌보는 일이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기꺼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살아생전 어머니께 효도를 다 하지 못함의 자책으로 반성의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치매 부모를 모신다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요즘 세태에 누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돌보는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맡기는 게 보편적이지 않은가. 요즘도 효자·효녀 상이 있기는 하나 귀히 여기지 않으며, 세인들이 귀감(龜鑑)으로 삼지도 않는다.
인간극장 그는 자기의 삶도 중요할 텐데 항상 어머니를 먼저 생각했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이곳저곳 가고 싶은 곳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눈살 찌푸리지 않고 표정은 밝았다. 동네에는 이미 효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네 어른들이 ‘효자’라고 부르는 그 명칭에 먹칠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한다고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중풍으로 몸져누워 삼 년을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한이 서려 인간극장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가끔 가기는 했지만, 손발 한번 제재로 씻어드리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 묘를 고향 아버지가 계시는 쪽으로 이장했음이 다행한 일이었다.
효의 근본은 사랑이다. 십계명에도 부모에게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 경전에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이 말씀은 한 마리의 양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인 아흔아홉도 중요하지만, 죄를 짓고 회개할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이 쑥스러워 잘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한마디는 말 안 해도 ‘알제(너도 알고 있다)’이다. 누가 어렵고 힘들 때 바투 다가가 따뜻하게 등을 어루만져주면서 말 안 해도 ‘알제’ 한 마디에 그 고통이 봄눈 녹듯 사라지지 않는가. 이처럼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힘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몸짓이 평화를 일으킨다. 그 사랑, 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