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신]나무를 심어 그 숲에 사는 사람
형,
그동안 참 적조(격조)했습니다. 고향에 내려온지 벌써 1년 하고도 6개월이 흘렀습니다. 엉개둥개(어영부영)하다 보니, 소식 한 자 보내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야속한 달구름(세월)이었습니다.
내일모레이 바로 경자년庚子年 세밑, 역병으로 암담했던 한 해가 지나갑니다. 악령처럼 우리의, 아니 전세계 인류의 뒤통수를 여지없이 강타한 대충격은 대체 언제나 말끔히 이 땅에 흔적을 감출는지요?
이런 마당에도(하루 확진자가 1천명이 넘어섰다지요) 대설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고 어제 새벽과 오전에 서울과 수도권에 명실공히 첫눈이 은총恩寵처럼 내려 발목이 빠지도록 쌓였습니다. 막역한 친구 세 명과 엄두내기 힘든 ‘겨울나들이’를 한 곳이 포천 신북면의 ‘나남수목원’이었습니다. 그 감흥感興을 형에게 맨먼저 전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형, 나남수목원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최근 무슨 인연으로 『나무 심는 마음』과 『숲에 살다』라는 엄청 두꺼운 수필집 두 권을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20여만평의 산지를 구입하여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오늘날의 어엿한 수목원으로 꾸민 고희古稀를 막 넘긴 한 사나이의 생활백서白書이자 인생백서였습니다.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하여, 모처럼 상경한 일요일 새벽 그곳에 가보려 마음을 먹자 가슴이 뛰었습니다. 첫사랑을 수십년만에 만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안부전화에 같이 가자는 친구의 말은 더욱 더 사람을 날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형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겠지요. 저는 눈 내리는 겨울날 기차여행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 설레는 기분을 공유 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 행운인가요. 이른바 ‘벗길맛’입니다. 벗길맛은 ‘벗따라 길따라 맛따라’의 줄임말로, 친구들끼리 불쑥불쑥 마음이 내키면 번개팅하여 놀러가자는 취지로 만든 실체가 없는 모임입니다.
어렵게 도착한 나남수목원 정문이 닫혀 있어 난감해하다, 할 수 없어 수목원을 만드신 이사장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습니다. 관리국장에게 전화를 하겠다며 일단 월담을 하여 구경하라는 너그러운 말씀에 감지덕지感之德之, 담을 넘었습니다. 태초 자연의 모습이 이랬겠지요. 아무도 밟지 않은 깊은 산속 눈길을 맨먼저 걸으며 읽었던 책의 대목들을 떠올렸습니다. 시쳇말로 기분이 째진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벌러덩 누워도 봅니다. 아항, 이것이 진입목으로 심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이구나? 아항, 저것이 자작나무로구나? 아항, 저것이 해마다 지훈상 시상식을 한다는 책박물관이구나? 마음과 발걸음이 바쁜 까닭은 반송 3천여그루가 식재돼 있는 반송밭이 가까이 온 때문이겠지요. 수목장樹木葬을 원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 그 공간을 내주려는 생각이라구요.
더도 덜도 아닌 장관壯觀 그 자체였습니다. 형도 한번 상상해 보시죠. 첫눈에다가, 사람 한 명 없는 곳을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달려가는 제 모습과 그 기분을요. 행복幸福요? 이것이 행복이 아니면 그 무엇이 행복일 것입니까? 반송밭과 그 옆에 식재한 자작나무 숲(이곳에서는 세는 단위가 보통 몇 백이 아니고 몇 천 그루입니다. 팔뚝만한 굵기의 자작나무만도 1만5천그루이니 말 다 했지요)을 바라보며(그 사이에도 눈은 함박눈처럼 쉴새없이 내립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여보, 미안해. 나만 친구들과 와서. 사계절에 한번씩 꼭 같이 오자. 이건 진짜야”며 감흥을 전했습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은백색의 향연饗宴에 푹 빠져 있어도 좋겠습니다.
매사에 어수룩하고 사는 게 서툰 저같은 반거들충이 모지랭이(못난이)가 글이라도 잘 쓴다면 이 기분을 고스란히 형에게 전해 드릴 텐데 안타까운 마음만 앞섭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수목원에서 의연하게 자라고 있는 수만 그루의 나무 하나 하나가 제 눈에는 언제든 이 지구를 살리려 숨쉬고 있는 ‘의병義兵’들로 보이더군요. 이런 나무들은 '의목義木'이라고 해야될는지요. 안내그림<사진>의 나무목록을 적어보겠습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큰주목과 눈주목이 반깁니다. 백송, 느티나무, 백합나무, 손기정참나무, 회화나무, 구상나무, 아로니아밭이 있는가하면, 가시오가피, 대추나무, 앵두나무, 측백나무, 야광나무, 산딸나무, 산수유, 산뽕나무, 은행나무에 복자기단풍, 보리수, 헛개나무, 잣나무, 노각나무, 밤나무, 엄나무, 무궁화묘목밭, 자귀나무, 매실, 철쭉, 다래, 해송, 목련, 자두나무, 귀룽나무, 마로니에, 히어리나무, 블루베리, 계수나무, 라일락, 오동나무 등,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나무들이 뽐내고 있습니다. 애초에 수목원을 만든 분의 20대때 꿈이 ‘언론의병장’이었다군요. 언론의병장? 선뜻 그 개념이 와닿지 않지요? 의병이 무엇인가요? 나라가 어려워 백척간두에 놓일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분들이 의병이 아니던가요?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도 떠올려 보시죠.
어디 ‘관군官軍’이 나라 구한 사례를 본 적이 있나요? 반면에 힘 없고 빽없고 못난 ‘흙수저 백성’들이 나라를 구한 사례는 넘치고도 넘칩니다. 출판出版도 넒은 의미로 언론言論일진대, 출판활동을 하는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언론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진 한 사나이가 이룬 눈부신 성취成就가, 바로 40년 동안 인문사회과학서 4천여권의 발간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또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인 수목원을 10년 동안 만든 ‘책 귀신’이었습니다. 흔히 00계의 거물, 거목, 대부 등의 별명을 붙이지만, 저는 그런 단어를 싫어합니다. 대신 ‘위인偉人’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위인,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듭니다. 하다못해 잘못돼 가는 역사의 물꼬라도 바로잡습니다. 그분은 위인이자 의인義人이더군요. 또한 생래적生來的으로 지극히 ‘공의公義로운 분’이라는 것을, 세 권(『언론의병장의 꿈』 포함)의 책을 통독하며 느꼈습니다.
역사歷史는 위인, 의인, 의병, 의사, 열사, 바로 이런 분들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관군들과 제도권 용병傭兵들은 언제나 들러리이지 절대로 역사의 한가운데 주인공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이제 ‘언론의병장’을 넘어서 ‘나무의병장’이 되어 오염과 공해 등으로 신음하는 이 지구를 지키려는 더욱 야심찬 꿈을 꾸고 계신 듯해 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형, 꼭 그분이 아니래도 좋습니다. 이런 꿈을 꾸며 말없이 노력하고 있는 이 땅의 이름없는 수많은 ‘의병’들에게, 우리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성원이라도 보내야 되지 않을까요? 너무 오랜만에 쓰는 편지가 장황했습니다. 해량하소서. 언제 그 수목원에 같이 갈 대복大福이 있기를 고대합니다. 또한 말문이 아닌 ‘편지문’이 트여 자주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안하소서.
12월 14일 우제愚弟 우천 절합니다
첫댓글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으라했거늘
산야를 뭉개어 아파트를 지어야 돈을 벌으니
수십년된 나무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콘크리트 열섬현상 일어나는 아파트속에서
살이가는 우리가 불쌍하단 생각이든다
우리 아부지 건지산 톱대장으로 이승만대통령에게 권총과 말을 하사받아 건지산을 지키기 시작하여 평생을 나무들하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작은 나무하나라도 자른거나 뽑을라치면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잠시
머뭇거린다.
우리 아버지 오직 나무 나무 얘기만 평생을 하셨다.
지금도 진안골짜기 낙엽송을 심어놓은게 아름드리도 자라서 울창한숲이 가득하다
지금도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무주.진안.장수가 지금처럼 나무가 많아진건
순전히 자네 부친 덕이라네 이런말을 들으면 기분이좋다
친구들중에 상길이.종호 나무박사들이있어
국립수목원부터 필리핀.인도네시아까지 수목관리를 해준다하여 놀란적이있다.
우리아파트 입주하면서 대추나무 감나무를 심었는데 지난 가을에도 대추를 제법 땃다
비록 낙엽진 차가운겨울이 왔지만 그래도
봄날의 희망을 주는 나무가 있어서 좋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35년되는 아버지 생각할수있어 좋다.
어?
마지막 까치밥 감하나 남았었는데
어제 비바람에 떨어졌나?
없네ㆍ
열정의 샘, 우천.
그 걸음걸음 위에서 두리번대며 뿌듯해하는 자네의 눈길과 가슴 뜀이 여기까지 전해오네.
나 역시 오늘 첫눈을 즐기느라 대모산 자락에서 아주 천천한 걸음으로 네시간을 만끽한 하루였네. 하늘에서 내려주는게 뭐든, 설레임을 함께 받는다면 아직은 젊다는 증표이리.
수상한 세월이지만 계속 심신의 안녕을 지켜내며 건승하기를 비네.
청심청안 우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