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892)
■ 3부 일통 천하 (215)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8)
하나의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수백 가지의 원인이 작용한다.
이는 무슨 일이건 그렇게 될 만한 까닭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랬다.
조(趙)나라의 멸망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조(趙)나라는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기 보다는 스스로 무너졌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곽개(郭開) 같은 자가 재상으로 있는데 어찌 조(趙)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나라를 버티게 한 마지막 보루는 상장군 이목(李牧)이었다.
그런데 그 이목마저 곽개의 농간에 휘말려 자결하고 말았다.
조(趙)나라는 이때 실제로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목(李牧)에 이어 상장군에 올라 회천산 영채로 내려간 사람은 곽개의 천거를 받은 조총(趙葱)이었다.
그는 회천산 영채에 당도하자 진군 장수 왕전(王翦)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사기(史記)>는 그 과정을 간략히 기술하고 있다.
-조총(趙葱)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쳐버리니 조유무왕(趙幽繆王)은 항복했다.
너무나 간략하여 허무할 정도다.
BC 229년(진왕 정 18년, 조유무왕 7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로써 조(趙)나라 또한 한(韓)나라에 이어 역사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진왕 정(政)이 함양을 떠나 한단성으로 들어와 조(趙)나라 영토를 공식적으로 접수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조나라의 멸망을 BC 22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천하 통일이 이루어지기 17년 전이었다.
진왕 정(政)은 한단성 왕궁의 높은 왕좌에 올라 선포했다.
- 조나라 영토를 거록군(鉅鹿郡)으로 명명하노라.
조나라의 마지막 왕 조유무왕(趙幽繆王)은 방릉으로 압송되어 갔다.
방릉(房陵)은 지금의 호북성 방현 일대다.
그때부터 그는 멸망한 왕들이 언제나 그러했듯 유배살이를 했다.
조유무왕(趙幽繆王)의 거처는 사면이 돌로 된 석실이었다.
석실에서 거처하게 하는 이유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유무왕(趙幽繆王)이 거처하는 석실에는 늘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조유무왕은 시종드는 신하에게 물었다.
"저 물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이냐?"
시종이 대답했다.
"원래 이 곳은 초(楚)나라 땅이었습니다. 초나라에는 강이 많이 흐르는데, 지금 들리는 저 소리는
저수(沮水)의 강물 소리입니다."
조유무왕(趙幽繆王)은 탄식했다.
"저 물도 흘러흘러 언젠가는 바다로 들어갈 테지. 나는 언제 고국산천으로 돌아갈꼬."
그러고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가 곧 <산수지구(山水之謳)>다.
구(謳)란 읊조림이라는 뜻이다.
방산(房山)이 궁실이 될 줄이야
저수(沮水)가 자리끼가 될 줄이야.
거문고 비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흐르는 강물 소리뿐이로구나.
물은 원래 무정한 것
한수(漢水) 강수(江水)로
흘러듦은 당연한 일이다.
슬프도다.
나는 만승의 왕이었는데
고향으로 달려가는 꿈만 꾸는구나.
조유무왕(趙幽繆王)은 매일 이 노래를 부르다 마침내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개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은 시호가 없다.
하지만 유독 조유무왕(趙幽繆王)만은 시호가 있다.
왜 그럴까?
원래 조유무왕은 적자(嫡子)가 아니었다.
그의 이복형인 가(嘉)가 세자였는데, 아버지 조도양왕이 창기 출신 후궁의 소생인 조유무왕(趙幽繆王)을
후계자로 삼았다.
조나라가 멸망했을 때 폐세자 가(嘉)는 대 땅으로 도망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대왕(代王)이다.
조유무왕(趙幽繆王)이 유배지에서 죽었을 때 대왕(代王)은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유무(幽繆)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조 대왕(代王)도 6년 후인 BC 222년(진왕 정 25년)에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역사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조 대왕(代王)의 존재를 놓고 사가(史家)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대왕을 조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조유무왕(趙幽繆王)을 마지막 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가(史家)는 대왕 가(嘉)가 내린 조유무왕의 시호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는 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조유무왕을 조왕 천(遷)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천(遷)은 조유무왕의 이름이다.
참고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의 <조세가> 편을 기술하면서 조나라의 멸망을 BC 228년으로 잡았다.
대왕(代王)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뒷 이야기 하나.
조나라 마지막 재상이자 매국노인 곽개(郭開)는 조나라가 멸망하자 진왕 정(政)을 따라
함양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한단성을 떠날 때 모아둔 황금이 워낙 많아 한꺼번에 가져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한단성 자기 집 마당에 황금을 묻어두고 일단 함양으로 갔다.
그 후 곽개(郭開)는 두고온 황금을 잊을 수가 없어 진왕 정(政)에게 청하여 휴가를 얻었다.
그가 한단으로 돌아와 묻어둔 황금을 꺼내 여러 채의 수레에 나누어 싣고 함양으로 향할 때였다.
산길을 지날 때 난데없이 도적들이 나타나 곽개(郭開)를 죽이고 황금을 모두 탈취해갔다.
이 일을 놓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 이때의 도적은 우연한 도적이 아니라 이목(李牧) 장군의 식객들이었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