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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300 38 |
너무 늦은 중년의 편지 / 김왕노
오래 전 너는 아카시아 숲에서 트럼펫을
밤하늘 깊이 불어 올렸지.
곡명을 올랐지만 너무 애절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올렸다는 말이 맞겠지.
실연의 아픔으로 망가져 어딘가로 가버린 너는 잘 있나.
네가 두고 간 바다에는 멀리서 배가 오고 아카시아 숲에는 벌이 들끓는다네.
그러나 그것들로 네가 가버린 빈자리를 채우기는 부족해
네가 있는 곳이나 내가 사는 곳이란 사람 살만한 곳이라 하지만
삶도 하나의 혁명 같아 사랑에 실패한 너는 녹슨 장총 같은
꿈의 입구를 닦아 입맞춤할 테지
꿈의 노리쇠를 당겼다가 놓을 때 한 발의 사랑이 장전되기도 할 테지
그러면 네 사랑이 다시 시작되어도 좋아
나는 주둔군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가 끊기는 이곳에서
불량한 그들의 꿈을 훔쳐보며 얼마나 화음을 맞춰 찬송가를 부르면
그들을 용서할지
무장해제 된 이 거리에서 사제 총을 만들어서라도 공포탄을 수없이 쏘며
갓뎀 갓뎀 외치고도 싶어 안방처럼 차지하고 마이웨이를 부르는
그들을 견딜 수 없어
고향을 떠나와 주둔하면 낯선 태양에 당황하기도 할 테지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적의를 불사르다보면 붉은 장미만 봐도 할 발작
하나 동두천 우리의 민들레 윤금이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
짐승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일을 한 주둔군의 발소리에
누구나 악몽을 꾸기 시작하는 아픈 밤이 시작 되었다.
아득히 멀어진 곳에서 네가 그리워하는 이곳의 나는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
여행가가 되어 전 세계를 유랑하겠다는 꿈이 한 풀 꺾이기는 했어
하나 너는 먼 이국에서 시거를 태우다가 무대에 나가
트럼펫을 릴 암스트롱처럼 불어 댈 것 같아
이제는 중년의 네게 늦게 찾아온 사랑을 위해 장미를 바치고
아직 여긴 네 트럼펫 소리를 기억하는 아카시아 꽃이 수없이 지고 피는데
아카시아 숲이 바람에 물결칠 때마다 비릿한 네 사랑의 슬픔도 물결쳐
멀어져간 네 연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네가 불어 올린
트럼펫소리를 도리어 네가 비처럼 흠뻑 맞고
그리움짐승으로 네가 오들오들 떨 때 난 어떤 위로도 없이
‘떠난 사람은 잊어 잊어라.’ 는 죄 많은 말만 되풀이 했다.
하여튼 이곳의 나는 가난한 시인 너를 찾아 집을 나서지는 못했어.
고백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트럼펫 연주자인 너의 팬이었다네.
때가 되면 우리 이곳에서 한번 뭉치자.
옛이야기 하며 술잔을 나누다가 네가 비장하게 우리의 하늘, 아카시아 숲 위 밤하늘로
트럼펫을 불어 올리면 정박의 닻 내린 바다의 배마저 뱃고동 울리게
죽어간 사랑, 죽어간 청춘을 위한 진혼곡이 밤하늘로 빈 가슴마다 메아리치게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 출생.
<매일신문〉신춘문예 등단.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리아스식 사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디카시집『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