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아내가 없다.
아내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아내가 웃는다.
아내는 방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아내는 간다.
맨발벗은 아내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엊그제 부인 장레식을 치른 여경주를 생각하며 김광균의 시 은수저를 패러디한 것임.
긴 투병생활을 하느라고 (서울 삼성병원)주소를 작은 딸이 있는 서울로 주소를 옮기는 바람에 고향 가까운 곳에는
묘지도 구할 수 없어 아무 연고도 없는 진동 공원묘지에 안장한다고 했다.
정신 없이 바쁠 때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지만 다 떠나버린 지금 빈 자리를 보며 얼마나 허전하고 서글플가?
아들 이야기로는 아버지도 고생이 많았지만 사실은 엄마(고인)가 더 괴로워햇다고 한다.
서울 삼성병원에서도 병명을 모르지, 먹지는 못하지 가족들 괴롭히지 않고 저세상 가고 싶어도 갈 수는 없지,
그래서 영감(경주)한테 온갖 짜증 다 부렸다고 한다.
처음 발병해서부터 근 2년 동안 경주도 시골에 구순이 넘은 노모도 계신데 서울에서 아내 병 수발을 하자니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귀여운 손주 보며 좀 편할만 하니 저렇게 병마가 덮칠 줄이야!
창원 상복공원은 내 고향이라 6일 아침 일찍 혼자서 집은 나섰다. 마누라는 고인과 잘 아는 사이인데
차도 태워줄 겸 같이 가자니까 소중한 약속이 있어 못 가겠다고 나 혼자 나섰다.
6시반에 집을 나서서 창원 남산 버스 정류소에 하차하니 8시10분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상복공원장레식장까지 거리가 대충 4k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고향땅도 밟아보며 오만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창원공단이 생긴 이후 그 동네를 걸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지도를 보고 길을 대충 그렸다.
남산 정류소- 가움정사거리-좌측으로 쭉 뻗은 길로 남지 사거리- 거기서 우측으로 쭉 뻗은 길로
정동사서리 - 상복사거리- 좌측으로 돌아 상복교차로 - 상복공원 -상복교- 장레식장.
그런데 길도 확실히 모르면서 남지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따라가지 않고 바로가면
지름길이 있을 것 같아 안민천을 따라 소로를 따라 갔다가 언덕 위로 올라갔더니
동산골프랜드가 끝이고 지름길을 없었다. 그래서 언덕길에서 땀깨나 흘리며 한 시간을 허비했다.
등산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황령산에도 안 오르다가 제법 높은 언덕길을
숨이 가빠 쌕쌕거리며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오르자니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언덕 위에는 토종닭, 오리 보신탕 집 간판이 많이 있있다.
옛날 같으면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길이었는데 ....우거진 숲에는 아카시아 씨앗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중학교 때 사방공사한다고 수업을 폐하고 학생들을 몰고 들로 산으로 나가 한 사람 당 아카시아 씨 한 홉
못 따면 집에 안 보내주던 기억도 났다.
다시 공단길로 내려오니 간간이 지나가는 택시도 있었지만 끝까지 걷기로 했다.
내가 나온 남면중학교 교가에 "장복산 구름 속에 높이 솟았고 남천내 쉬지 않고 길이 흐르네.."하는 구절이 있는데
남천내는 이제 완전히 공단 속에 파묻혔다.
상복 공원 가까이 가니 환화, STX, 쌍용, 같은 회사 간판이 보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빈소를 찾아가니 아들과 며느리가 지키고 있었다.
지금 KR에 근무하는 (부산 중앙동에 근무한다고 함) 아들 결혼식 때 주례는 남 학장이 맡아주었고
그날 서면 영광도서 앞 맥주집에서 주례 사레비 받은 것 다 뺏기고 가셨다.
30분 즘 기다리니 경주와 딸, 사위가 진동 묘지 계약해놓고 왔다.
"우리 할마이 봤나?"
"그래, 봤다. 근데 너무 예쁘게 화장을 햇더라!"
좀 있으니 부산 남구 팀 하원중, 김광주, 신용우 친구들이 왔다. 연이어 창원친구들. 부산 교대 팀, 무원, 상도 친구들이 왔다.
그래 우리는 먼저 일어나며 나는 남구팀(김국장이 차를 몰고 와서 술도 안 마셨다) 차를 얻어 타고 왓다.
김광주 국장님 감사!
첫댓글 집안 제사때문에 장례식 조문을 못갔다. 경주 부인은 그 전에 서울가는 KTX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울 딸래집에 가신다고 하셨는 데 지금 생각하니 아마 병원에 가시는 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온화한 미소를 이젠 영영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슬픈 마음이 든다. 경주는 오죽할까?
'회자정리'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남은 사람들도 서서히 이별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종찬 넌 전화도 안받아 같이 가자고 .
나중에 갔다 와서 보니까 010-8516-9179 가 떠 있던데 누군지 몰라서 안 받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