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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TV에서 채널을 돌리다 배우 최민식과 이병헌이 주연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에 시선이 멈췄다. 사랑하는 약혼녀를 토막 살해한 연쇄살인마 최민식에게 사적(私的) 복수를 감행하는 국정원 경호요원 이병헌의 이야기다. 최민식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거나 상상할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다. 그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는 이유와 동기는 영화에 없었다. 그가 행사하는 막무가내의 폭력과 악마를 응징하다 자신도 악마로 변해버린 한 남자의 복수뿐이었다.
도처에 악마가 넘쳐난다. 윤 일병 사건은 '군대판 악마를 보았다', 연이어 터진 김해 여고생 살인 및 시신 훼손 사건은 '청소년판 악마를 보았다'로 대중은 명명(命名)했다. 수액주사를 놓으며 죽을 때까지 때렸다는 윤 일병 사건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묻힌 느낌이지만 김해 사건 역시 그 이상의 악마성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열다섯 살 여중생이다. 매춘 강요, 맨살에 펄펄 끓는 물 붓기, 얼굴에 휘발유 뿌려 불붙이기, 시신에 콘크리트 반죽 부어 은폐하기… 배후에 20대 남성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를 변명으로 삼기에는 터무니없이 잔인한 범죄였다.
이들의 범행을 끝까지 낱낱이 밝혀서 책임을 묻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만 '악마(惡魔)'로 호명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 손쉬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윤 일병 사건 이후 회자된 슬픈 유행어는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이었다. 군대 가서 참으면 윤 일병이 되고, 못 참고 폭발하면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임 병장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의 '군 인권 실태 연구 보고서'(2013년)에 따르면 남이 구타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병사는 2005년 8.6%에서 2013년 17.7%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구타를 목격한 후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는 질문에는 절반 이상인 53.7%가 "못 본 척했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병장 일당만 악마로 치부할 수 있을까.
'청소년판 악마를 보았다'도 마찬가지다. 열다섯 살 여중생들은 모두 집을 나온 가출 소녀였다. 소설가 김영하가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이미 고발한 바 있지만 이들이 함께 사는 가출팸(패밀리)의 삶은 끔찍 그 자체이다. 가출팸도 일종의 유사 가족이므로 생계와 숙박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방법은 짐승의 약육강식이다. 소년은 절도와 강도로 돈을 훔치고, 소녀는 성(性)을 판다. 지금 와서 탄식하지만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들을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騷音)으로 취급하고 관심의 스위치를 꺼버렸던 건 아닐까.
'악마를 보았다'를 본 다음 날 지하철에서 60대 남성들의 군대 관련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우리 때는 더 힘들었지만 다 견뎌냈잖아." 그 옆자리에 앉은 한 청년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 꼴이잖아요."
자문(自問)해 본다. '내 안의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