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禪修行)으로 가는 길
흙탕물 속에 맑은 물 있으니 나를 비우면 청정 여래를 보리라.
4월 9일, 봄비가 대지에 생동감을 전하는 가운데
범어사 보제루에서 10대 선사 초청 설선대법회 여섯 번째 법석이 열렸다.
이날 범어사에는 우중(雨中)에도 비옷을 갖춰 입고
법회에 참석한 3천여 명의 사부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설주(說主)로 법좌에 오른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은
‘선 수행의 바른길’이라는 주제로 불자들의 마음에 감로 비를 내려주었다.
지환 스님은 “반야 안목을 갖고 반야 삼매를 실천하는 것이
곧 반야행(般若行)으로 가는 길”이라며
“우리는 삶의 목적을 깨달음의 방향으로 전환해 금생(今生)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상황에 맞게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날 법문을 요약 개재한다. (편집자 주)
보리자성(菩提自性)이 본자청정(本自淸淨)하니
단용차심(但用此心)하면 직료성불(直了成佛)하리라.
이 한마디 속에 불교 대의와 선적 삶이 다 들어있습니다.
보리 자성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자리, 참마음의 자리를 말합니다.
참 마음은 도를 닦고 참선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말입니다.
청정하다는 말은 모든 번뇌 망상이 본래부터 없어 자아가 텅 비어 버린 그러한 성품 자리를 말합니다.
또한 텅 비었지만, 일체 공론이 원만하게 구족(具足)해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이를 일러서 보리 자성이 본자청정 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었다는 부정 속에 구족(具足)했다는 긍정이 포함해 있는 것입니다.
부정과 동시에 긍정이고, 긍정과 동시에 부정인 존재의 원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단용차심(但用此心)하면 직료성불(直了成佛)하리라.
이와 같은 참마음(보리자성(菩提自性) 본자청정(本自淸淨)으로 살게 되면
곧바로 깨달음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바로 깨달음의 삶, 부처님의 삶, 자유자재한 해탈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반야 안목’과 ‘반야 삼매’, 그리고 ‘반야행’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반야 안목은 진정견해(眞正見解)라고도 합니다.
참되고 바른 견해만 가지면, 나고 죽음의 생사에도 자유자재하고,
가고 머무름에도 자유로워 대 조화와 절대 평안의 참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믿고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부처인데 왜 밖에서 찾습니까?
이 믿음이 서지 않으면 참선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의 기초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믿고 밖으로 찾지 말라”고 했던 임제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청정한 광명, 이것이 너 자신 속의 법신불이요,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분별없는 광명, 이것이 너 자신 속의 보신불이며,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차별 없는 광명, 이것이 너 자신 속의 화신불이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참마음이 참 부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 내가 있다,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 ‘있다’라는 견해에 빠져 버리면 미혹 속에 갇히는 겁니다.
생명의 실상, 존재의 원리로 보면 이것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내가 있습니까?
꿈속에 태양도 있고 세계도 있고 지구도 있고 다 있지만 꿈을 깬 상태에서 보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치 존재의 실상은 꿈에 있는 현상처럼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空) 하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실상인 공 자리를 우리는 ‘진공’이라고 말하는 데
이 자리는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내 생명의 근원에서 보면 나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흙탕물에 맑은 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흙탕물에는 맑은 물이 있습니다.
흙탕물인 그때도 맑은 물은 그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번뇌 망상을 일으켜 사람을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해도
참마음은 여여(如如)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흙탕물 속에 맑은 물이 있듯이
참마음의 묘용이 지금도 우리 속에 여여(如如)하다는 이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만 참선할 수 있습니다.
조사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마음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을 홀연히 깨달으면,
본질적으로 한없이 자유로워 여실히 안락할 것이며,
또한 묘한 작용이 외부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니,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성불해 있음을 설파한 것입니다.
이 자리만 확인해 버리면 자유자재하고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바로 분별 망상, 번뇌 망상입니다. 분별 망상만 비워버리면 부처로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번뇌 망상을 어떻게 비워버릴 것이냐?
여기에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겁니다.
이 번뇌 망상을 비워버리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선의 삶이 아니라 선의 수행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단계 내려와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번뇌 망상을 인정했습니다.
있지도 않는 번뇌 망상한 테 우리가 안 속으려면
분발심을 내어 수행해야 합니다.
화두만 잘 들면 분별 망상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반야 삼매입니다. 마치 불덩이가 활활 타고 있으면 하루살이나 벌, 나방이 범접해도
그냥 타버리듯이 화두만 잘 들고 있으면 이 번뇌 망상은 그 순간 작동을 못 합니다.
번뇌 망상이 작동 못 하니까 참마음만 흘러갑니다.
그때는 참으로 편안하고 고요하며 맑고 행복합니다.
탐진치 삼독(三毒)의 불이 꺼져버리면 곧 니르바나에 이르는 겁니다.
대 조화와 묘용을 전개하는 그 자리서 보고, 듣고 있을 때,
여여(如如)한 것인데 번뇌망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속에 갇혀 있으므로 괴로움이 생깁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바로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정과 지혜는 반야 삼매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지혜 따로 선정 따 닦는 게 아닙니다.
불이 있으면 불빛은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의 입장이 선정이라면 불빛은 반야입니다.
이제 반야행에 대해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반야 안목과 반야 삼매 그리고 반야행은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입니다.
‘나’라는 것을 굳이 둘로 나누어 보면 몸과 마음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은 모두 공한 것이라 했습니다.
오온(五蘊)을 나로 삼고 있는데 오온(五蘊)이 공한 것이라 하니 결국 나는 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나는 공한 것’이라며 외워도 생각뿐이지 와 닿지를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기도든 화두든 직접 수행해서
자신이 텅 빈 것임을 체험해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는 거와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느끼는 것과 계합(契合)은 이보다 더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목숨을 걸고 정진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말 속의 ‘무’는 빈 병을 예로 들었을 때
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병 속에 아무런 잡동사니가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행의 첫걸음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면 반드시 대립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순수하게 사랑할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는 나를 안 내 세우죠?
나를 안 내세우니까 대 조화가 일어나 매일 행복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는 당신은 ‘내 것’ 하는 소유심(所有心)을 내며 나를 드러냅니다.
나라는 것이 있으면 당신이 있게 되고 당신이 있게 되면 내가 있으니까
대립이 생겨 그 조화가 깨집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 합니다.
나 중심으로 살면서 내가 있다, 내가 잘났다, ‘나’다 하면서
수행을 따로 하려 하면 참선 공부는 안 됩니다.
화두가 안 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딱 잡아 놓고 탐심과 진심이 막 출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워야 화두가 잡힙니다.
이 마음 청정 하여 한 물건도 없거늘 탐진치로 말미암아 경계의 막힘을 보는 도다.
눈동자가 돌출해서 전체가 드러나면 삼라만상이 허공의 꽃이로다.
나를 비워보려는 반야행의 작은 실천만으로도 우리는 대립을 떠난 자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이 멀다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미 이룬 것입니다.
정진의 원력을 놓지 말기 바랍니다.
- 지환 스님 -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