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년 1 월 28 일 목요일 맑음
" 재판받으러 오세요 ~ " 어제 오후에 풀천지에게 전화가 왔었다.
아무 죄없는 풀천지가 무슨 재판인가 의아해하실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나 드라마에선 재판받는 사람들 얘기뿐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생동안 재판정의 판사구경 한번 못하고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풀천지와 판사의 인연은
이번이 세번째이다.
첫번째 인연은 풀천지 성자 재현이 때문이었는데
첫 아들을 낳은 기쁨에 친구들에게 한턱을 내게 되었는데
그만 술이 떡이 되어 마지막 술집에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난동을 부렸던 모양이다.
다음날 깨어보니 경찰소 유치장에 갇혀 있었고
잠시후 즉결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대여섯명이 한줄로 판사 앞에 죄인처럼 늘어서서
일문 일답후 훈방조치 선고 판결을 받은 기억이 있다.
두번째 인연은 풀나라를 장만하고 나서
풀나라의 윗쪽에 붙어있는 땅을 경매로 사게되었는데
안동 법원에 찾아가 입찰가를 써놓고 경매에 당첨된 기억이 있다.
이번이 세번째 인연인데
엉뚱하게도 폭설 때문이다.
운전면허 적성검사 만료 기한이 일월 초순인데
아시다시피 새해들어 전국을 강타한 엄청난 폭설 때문에
강추위까지 겹쳐 열흘이상 이곳도 고립된거나 다름없었다.
날이 풀리고 길이 뚫리자마자 경찰서 민원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만료기한은 넘겨버렸고 벌금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이미 풀천지 일기에 소개한 적이 있으니 잘 아시는 사연일 것이다.
통보 유예기간이 자그마치 6 개월인 적성검사 기한을 그냥 보내고
새삼 뒤늦게 폭설을 핑계대어 억지쓰는 셈이 되었지만
어찌어찌 바쁘게 살다보니 하루하루가 금방 6 개월이 되었고
바쁜 연말이 끝나고 새해가 되면 제일 먼저 시행하려던 야무진 계획이
뜻아닌 강추위를 동반한 백년만의 폭설로 인해
고립되고 말았으니 아무래도 억울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냉엄한 법의 심판에 기대어
인정에 호소라도 해볼 요량으로
이의 신청을 하였더니 급기야 연락이 온것이다.
봉화 등기소에 마련된 법정으로 예정된 시간에 도착해보니
제법 많은수의 재판에 출석할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풀천지 가족도 어차피 오늘 하루 일을 접어두고
애들에게 견문도 넓혀줄겸 가족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재판절차를 참관하기로 하였다.
생각보다 젊은 판사가 나와서 빠르게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대했던 원고와 피고의 열띤 논쟁을 구경하지 못할줄 알았는데
서운치 않게 나마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끼리
채무문제에 대하여 증인까지 출석하여 시비를 가리는 장면을
흥미있게 지켜볼수 있었다.
원고는 몇년동안의 정확한 날짜와 액수를 제시하며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마을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주장하였고
피고는 누가봐도 석연치않게
잘 기억이 안난다며 심지어 그 무렵에는 외지에 나가있었음을 주장하였다.
가벼운 임시재판이라 변호인이 선임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마을 친숙한 사이이다 보니 믿거라 하고 차용증도 받지 않아
쌍방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정황이 필요하게 되었고
원고측에서 증인 신청을 하여 참석하게 된 한 마을 사람은
모두가 연로한 사람들이라 평생을 가족처럼 친하게 지낸 사이였는지
난처해 하는 점이 먼저 눈에 띄인다.
증인선서를 해야 하는데 위증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판사의 경고에 화들짝 놀라며
눈이 어두워 잘보이지 않아 띄엄띄엄 간신히 하고 나서
괜히 무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빌려준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힘겹게 증언하였다.
우리가 보아도 피고의 억지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인상 좋아보이는 젊은 판사가 좋은 말로 피고를 설득하여
채무사실을 인정하게 하였고
원고에겐 조금 양보할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는걸로
원만히 판결하고 선고를 하게 되어 법정안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주장을 펼쳤겠지만
대체적으로 원고의 승소로 결말이 되었다.
임시 재판이 끝나고 즉결 심판이 시작되었는데
좌회전 신호 위반에 대하여
젊은이와 경찰관의 열띤 공방이 거세었지만
결국 경찰관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의신청이 기각되게 되었고
불만이 있으면 정식재판을 다시 청구할것을 통고 하였다.
앞서 시행된 모든 재판들도
법에 주눅들고 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 서민들이 대부분이라
판사의 일차 선고가 끝이 나고
억울한점이 있더라도 정식 재판을 다시 청구하기가
무척 어려울것 같았다.
드디어 풀천지의 이름이 호명되고
원고가 되어야 하는지 피고가 되어야 하는지 별 생각없이
겸손한 자세로 피고석에 앉았다.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보고 주소를 물어본다.
앞서 우물우물 하던 사람들과 달리 또렷하게 대답해 주었다.
정황을 설명하고 할말이 있으면 해보란다.
깊은 산골에서 바쁘게 농사짓다보니
일부러 시간을 내어 먼곳을 나오기가 용이치 않아
한가해지는 정초에 날을 받아 두었는데
얘기치 않던 폭설로 고립되어 그만 날짜를 어기게 되어
인정적인 선처를 바랄뿐이라고 호소 하였다.
뻔한 속셈임을 눈치챈 젊은 판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 전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왜 미리 받지 않았냐며 추궁해 온다.
새삼 변명할 생각이 없었던 풀천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이상 드릴말씀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하였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더 할말이 있으면 해보랜다.
더욱 단호하게 없다고 말해주었다.
잠시후 벌금 3 만원 판결 선고가 떨어졌다.
짧은 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힐끗 풀천지를 쳐다본다.
예상하고 각오했던 일이니
전혀 동요없는 풀천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틀렸구나 생각하고 일어서려는데
안내도 된다는 판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있는 풀천지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안내도 된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알아챈 풀천지가
인정이 통했음에 흐뭇해하며
젊은 판사에게 감사의 목례를 하였다.
우리가 거의 마지막 순서였는데
우리만 좋은 결과를 받은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미안한 채로
마침 재판 절차를 도와주시던 분이
우리랑 함께 밖으로 나오시길래 가까이 다가가
이것저것 궁금한점들을 물어보았다.
선고유예는 무죄와 다름없다는 설명에 더욱 안도하며
갚아야 할 돈을 갚지않고 버티는 양심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법이 어느정도 책임을 질수 있는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물어 보았다.
예상대로 법은 편만 들어줄뿐 해결을 책임져주지는 못하였다.
풀천지 나름의 해결 방법을 지면에 옮길수는 없지만
돈은 눈도 없고 양심도 없고 법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모처럼 나들이 삼아 이겨도 져도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한 재판 구경을
훈훈한 인정을 맛보게된 행운까지 겹쳐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봉화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꼭 필요한 몇권의 책을 빌리고
영주에 나가 몇가지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잘못을 해도 가볍게 해야 되고
재판을 해도 가볍게 해야지
져도 괜찮고 이겨도 흐뭇할 것이다.
가벼운 판결이었지만
소박한 농부에게 훈훈한 인정을 베풀어준
젊은 판사의 따스함이 고맙기만 하다.
흐뭇한 기분을 즐기고 싶어
만두를 만들어 먹기로 하였다.
컴앞에 앉아있는 풀천지에게도
풀향기 아내가 함께 만두를 만들자며 치근거리길래
라이브 카페 기분을 내준다며 기타치는 시늉을 하자
자기 옆에 와서 느끼하게 불러달라며 즐거워 한다.
효율면으로 따지자면 벌금 3 만원
은행에다 후딱 내버리는게 훨씬 이익이다.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 봉화까지 나가 재판 참석하느라고
하루를 완전히 공치게 되었지만
냉정한 법의 심판대에서
인정이 통할수 있음을 애들에게 경험시켜준
소중한 하루가 되어주었다.
자신에게 닥친일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단호하게 대처해가는 노력에 당당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결과는 후회하지 않게 될것이다.
첫댓글 참으로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오셨습니다.
작은 일이었지만 훈훈한 기쁨이었습니다...^^
뺀질뺀질 기타치며 느끼한 웃음 날리는 풀천지님 상상타가, 법원에서의 풀천지님모습 연상타가, 첫아들 득후의 난동질?을 생각타가,풀천지님 특유의 언변까지...... 즐거운 시간 감사합니다.꾸벅~*
풀천지 역시 잎새님의 다양하게 웃는 정겨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하루의 삶이 가벼우면 훨씬 더 풍족한 삶들이 채워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