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참 성품이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原文)
無明實性卽 法性
幻化空身卽 法身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을 내 몸으로 삼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착각하여
자기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영지(靈知: 신령한 지혜)가 참 붓다인 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붓다 찾아 다니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중생은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5도(五道: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에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면서
아상(我相)에 단단히 집착하여
전도망상(顚到妄想: 뒤바뀐 망상)과
무명습기(無明習氣: 근본 번뇌)가
오래되어 성품을 가려버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망상과 무명습기의 이 몸과 마음이 법성이고 불신이라면
중생은 어찌하여 이를 보지 못하는가?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에 이렇게 말한다.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배고프고 목마름을 알고, 춥고 더움을 알고
혹 성내거나 또는 기뻐할 줄 아는데
이것이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 수· 화· 풍의 四大요소(인연)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佛性)이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은 이르기를 ‘四大(이 몸뚱이)는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하고,
단지 그대 눈앞에 밝음이 역역하지만 ’
(구분된) 형상이 없는 그것이
‘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하였다.
이른바(여기서 말하는) ‘(구분된) 형상이 없는 그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라고 했다.
또 이르시길
『몸은 거짓된 허깨비(假幻)라 생멸(生滅)을 겪지만,
참마음(眞心)은 허공같이 끊임없고 불변(不變)이다.
그러므로 ‘몸은 허물어지고 흩어져
불과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영구히 신령한 한 물건(마음)은 하늘땅을 덮는다’. 고 하였다.
마음밖에 붓다 없으니,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은 불성(佛性)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이르시되,
‘널리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모두 다
여래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도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모든 중생의 가지가지 허망 된 모습들이
다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나온다.’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난 (마음) 밖에서
붓다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이를 <유심결(唯心訣)>에서
『상(相)은 비록 허망하나 항상 일체(一體) 명합(冥合)하고
성(性)은 비록 실다우나 항상 만연(萬緣) 맡긴지라
비록 드러나 있되 정식(情識)으로는 못 구하고
초절(超絶)함에 맡겼지만, 대용(大用)에는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치애(痴愛)도 해탈의 진원(眞源)이요
탐진(貪嗔)도 보리의 대용(大用)이라
망상 일으킴에 열반이 나타나고
진로(塵勞) 일으킴에 불도(佛道)를 이루로다.』라고 했다.
가령. 여기 칠판이 있다면 그대는
마음먹은 대로 칠판 가득히 그림도 그릴 수 있고,
글씨도 쓸 수 있다.
그런데 그려진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빈 칠판뿐이다.
이는 비유다. 그려진 것들은 그대의 망상이요,
칠판은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 망상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는 본래 있던 것으로
더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견성(見性)이요,
그 성품을 아는 것이 불성(佛性)이다.
무명 실성이 곧 불성이요, 환화공신이 곧 법신이라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달마대사의 말이나, 우파니샤드에서
<네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라는 말도
표현만 다를뿐 같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깨비 같은 이 몸이 바로 불도를 향한 법신(法身)이요
번뇌 망상이 곧 불도를 깨닫는 그것이 불성(佛性)이라는
증도가의 3구의 숨은 의미는
내 마음이 참 부처요,
내 성품이 참 진리인 줄 알고
진리를 구하려고 멀리 밖에 있는 성인들을 추앙하고,
경전이나 성구(聖句)에 매달리지 말고
오로지 내 마음을 관조(觀照)하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사진: 소림사가 있는 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