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길은 다양한 삶이 서려 있는 길이다. 글 읽는 선비의 이야기와 어려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고, 추운 겨울 편찮으신 부모님을 위해 잉어를 구해온 효자의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의 나라를 구했던 선조들의 이야기와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산신령의 이야기와 도깨비 전설을 듣고 또 보태며 걸었던 나그네 이야기가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교문화길은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유교문화길의 첫 구간은 풍산들을 가로지르는 총거리 14.5km에 달하는 길이다. 낙암정에서 안동한지 공장에 이르는 풍산들을 가로지르는 길은 벼랑길과 강변길, 오솔길이 문화유산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있다. 안동권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단호리에는 낙강정과 낙음정, 우모재 같은 소박한 정자를 볼 수 있다. 송안군 이자수가 6백 년 전에 자리 잡은 마애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이노정, 산수정이 낙동강, 망천 벼리와 조화를 이룬 마애 솔숲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유교문화길 제1구간
낙동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안동의 누정 이야기 이번 호는 유교문화길의 출발점인 낙암정 이야기이다. 낙암정(洛巖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4호)은 건지산에서 세 갈래로 뻗어 내려온 골짜기에 형성된 단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단호는 상단지, 중단지, 하단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의 생긴 모양이 단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단호라는 지명은 바위와 언덕이 모두 붉은색이고 마을 앞에 큰 소(沼)가 있다고 해서 단호로 명명되었다. 정자는 세종 때 문신인 배환(裵桓, 1379~미상)이 1451년(문종 1)에 건립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만년을 지내던 곳이다. 낙암정은 고려 명장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이 즐겨 유상하던 상락대를 옆에 끼고 옥빛 낙연이 절경을 이루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상락대는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김방경이 젊은 시절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낙암정에서부터 상락대까지는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룬다. 상락대에서 바라보는 낙암정은 한 마리 학이 둥지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있는 형국이다.
낙암정
초창 이후 낙암정은 세월의 부침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가 있었는데 선생의 7세손 성균진사 배득인(裵得仁, 1566~1623)은 선조의 뜻을 받들어 초정(草亭)을 세웠으나 그 역시 허물어지고, 1813년(순조 13)에 다시 세웠다. 그 후 퇴락하여 1881년(고종 18)과 1955년에 다시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70여 년에 한 번씩 중창과 중수가 거듭되었다. 정자는 건지산을 배산으로 하고 굽이치는 낙동강을 임수로 하여 경관이 빼어나고 전망이 확 트인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낙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단출하다. 정자는 막돌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왼쪽 온돌방에는 각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형식 구조를 하고 있다. 1층은 기단에서부터 1m 정도 누하주를 들어 올렸으나 절벽 위에 건축물을 앉히다 보니 안정감을 주기 위해 누하주의 키가 높지 않게 한 것이 돋보인다. 평면구성은 건물을 바라보면서 오른편 한 칸은 구들들인 방을 설치하고 왼편 2칸은 마루를 깔아 개방한 구조이다. 마루와 방을 구분 짓는 벽체는 사분합 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방과 마루를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가변형으로 설계하여 정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잘 보완해 주고 있다. 정자에 오르려면 정면이 아닌 후면의 협문을 통해야 한다. 안동지방의 정자가 지닌 특징을 잘 보듬고 있다.
낙암정 측면
낙암정 가는 길
낙암정은 낙동강 건너 있는 계평 들에서 바라보면 단호절벽이라 부르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고, 그 중간에 아스라이 정자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아 단호절벽의 풍경을 완성해 주고 있다. 낙암정에 가려면 남후면 유리한방병원 앞을 지나 단호 쪽으로 가다가 가파르고 비좁은 고갯길을 오르는 방법이 있고, 풍산읍 쪽에서는 최근에 새로이 확장 개설된 풍산 마애솔숲 앞길을 통과하여 가는 방법도 있다. 양방향 어느 곳을 택하여 오든, 고갯마루에 오르면 낙암정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석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절벽을 향하여 난 샛길로 들어서면 사뿐히 내려앉은 정자와 마주한다. 남후면에서 접근하는 지방도는 최근에 확포장 되어 접근도 훨씬 수월해졌다.
은하수가 비칠 듯 큰 거울을 이루는 강물과 푸른 들판
정자에 기대서서 눈을 들어 바라보면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보이는 푸른 강물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백사장은 한 폭의 그림이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시선을 둘로 나누어 버린 것이 아쉽지만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푸른 들판과 저 멀리 학가산과 천등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낙암정중창기」를 쓴 김굉 선생은 이 풍경을 “왼쪽에 자리한 상락 푸른 절벽은 강심에 병풍을 친 듯하고, 오른쪽에 자리한 산록은 정자 터의 팔을 굽혀 안은 듯하다. 그 밑으로 강물이 유유히 몇 리를 흘러와 절벽 밑에 이르러 소를 이루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잔잔하여 상하의 하늘빛은 은하수가 비칠 듯, 푸르른 절벽이 거꾸로 물속에 잠긴 듯, 완연히 크나큰 거울을 이룬 듯하다. 드넓은 모래밭과 망망한 큰 들판에 울며 나는 갈매기 떼 소리, 어부들의 피리 소리를 정자 밖에 나가지 않고도 모두 한눈에 보고 들을 수 있다. 강 건너에는 봉정·학가·풍악의 여러 산이 눈앞에 빙 둘러 있어, 아침저녁으로 일어나는 운연이 천태만상을 이루거니와 이게 모두 이 정자의 놀라운 경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마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앉아 바라보면 좀 더 편안하게 시야에 놓이는 풍광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세가 편안한 탓인지 깎아지른 절벽도 그 밑을 감돌아 가는 어둡도록 깊은 강물도 편안해 보인다. 백사장도 계평도 멀리 보이는 안동 주변의 산들도 시원하다. 정자 주변을 둘러보면 왼쪽 기슭에 산벚나무 고목이 힘들게 세월을 버티고 있다. 봄날 산벚꽃 필 즈음이면 꽃구경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할 것 같다.
낙암정에서 바라보는 계평
도깨비에게 얻은 정자 터
옛날 풍산 고을 계평리에 글 읽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마음씨 좋은 배감사라는 분이 살았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여러 선비와 어울려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강 건너 서쪽 단호리의 기암절벽은 지는 석양을 받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풍월을 좋아하는 배감사는 이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술에 거나하게 취한 터라 배감사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가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에 깨끗한 백사장을 베개 삼아 배감사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 때인가 시원한 강바람에 산책을 나왔던 도깨비들이 잠이 든 배감사를 보았다. 도깨비들은 배감사가 죽은 줄로만 알고 불쌍하게도 배감사가 죽었다 하며 장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도깨비들은 배감사를 메고 강물을 건너 가파른 절벽을 오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절벽을 오르던 도깨비들은 힘이 들어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그중에 한 도깨비가 “여기가 좋은 묘 터가 되겠는걸. 우리 여기서 장사 지내는 게 어때?”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잠에서 깬 배감사는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너무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다른 한 도깨비가 “아니야, 여기는 좋은 정자 터지, 묘 터가 아니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죽은 채 듣고만 있던 배감사는 죽을힘을 다해 “네 이놈들, 뭣 하는 짓들이야? 내가 죽긴 왜 죽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놀란 도깨비들은 정신없이 절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소동에 절벽 위에서 집채 같은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져 정자를 짓기에 알맞은 터를 닦아 놓았다. 도깨비들에게 좋은 정자 터를 얻은 배감사는 여기에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하여 낙암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낙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