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영축산-부처 설법한 인도 영축산 그대로 따와
자장(590~658년)이 통도사를 창건한 터가 바로 영축산 자락이다.
한자로는 신령스런 독수리가 산다는 곳이다.
‘취(鷲)’가 ‘축’으로 된 건 불교식 발음 때문이다.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불리던 명칭도
2001년 지명위원회를 열어 영축산으로 최종 확정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설법한 산으로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사는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하늘의 제왕이 있다면 땅과 물의 제왕도 있다.
땅은 사자와 호랑이, 물은 용이 제왕이다.
영축산은 독수리와 용을 모두 품고 있다.
통도사 서운암 성파 스님은
“산과 물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산이 높을수록 물이 많다.
서로 비례관계다. 산 못지않게 물도 중요하다.
독수리는 맹금 중의 맹금이고, 육지의 사자는 맹수 중의 맹수다.
사자가 한 번 짖으면 100가지 짐승의 뇌파가 파열된다고 하며
그만큼 강렬한 소리다. 그 사자가 내는 소리인 사자후는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된다.
최고의 법 도량인 것이다.
용은 신비스럽고 영적인 동물이고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을 상징한다.
반야용선이 그 예다.
이와 같이 영축산은 하늘과 땅, 물의 제왕을 모두 품고 있는 최고의 터”
라고 했다.
성파 스님은 “산지명당 오대산 월정사, 야지명당 영축산 통도사”라고 터에 대해서 강조했다.
첩첩 쌓인 산 중에 최고의 사찰은 월정사와 상원사이고,
평평한 터 중에서는 영축산 통도사가 단연 으뜸이라는 말이다.
땅은 한자로 ‘地’라고 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土(흙)’는 ‘乙(새)’에 달렸다는 의미가 함축된 말이 ‘地(땅)’이라는 것이다.
새에 힘 ‘力’을 보탠 글자가 ‘也(야)’라고 설명한다.
다르게 표현해서 ‘토력(土力)은 전어을(全於乙)’이라는 설명이다.
땅은 오로지 새에 달렸다는 의미다. 그 새는 하늘의 제왕 독수리인 것이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땅을 내려 보며
가장 좋은 터와 편안하게 먹잇감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골라 안착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신령스런 새로 여겨졌다.
따라서 통도사는 시공을 초월한 터라고 짐작된다.
이 같은 설명은 통도사(通度寺)란 명칭과 무관치 않다.
통도사는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 중의적 개념이다.
1.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과
2. 불교의 최고 도량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
3. 수양을 해서 득도한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통도사 교무국장 진응 스님도
“고대는 풍수사상이 종교보다 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종교보다 상위의 개념이었을 것 같다.
땅에 대한 신비적 영험성을 불어넣어 종교에 힘을 보탰을 가능성이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통도사 터의 구룡지 전설만 해도 그렇다.
아홉 마리의 용이 이 땅에 살았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차치하고 일단 신비성으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다.
영물인 용은 다양하게 설명된다.
물의 신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한다.
들보와 법당에 용의 화신이 새겨져 위엄과 신비를 더한다.
더욱이 용이 끌고 가는 배인 반야용선은 서방 극락정토 성불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용으로 화하기도 한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불어넣는 주체가 바로 용인 것이다”
고 설명했다.
통도사 창건설화를 간직한 구룡지 옆에 통도사 삼성각과 산령각(산신각)이 있다.
* 통도사 산령각
구룡지의 9마리 용의 의미도 예사롭지 않아
*통도사 구룡지
여기서 잠시 통도사 구룡지 전설을 살펴보자.
‘자장이 통도사를 지으려고 할 때 그 터는 큰 연못과 늪지였다.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자장이 주문과 경을 읽으며 용들에게 연못을 떠나라고 했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자장이 종이에 불 화(火)자를 써서 하늘로 날리며 법장으로 물을 저으니 물이 끓어올랐다.
용 세 마리가 죽었다.
그것을 집어던지니 부딪친 바위에 피가 묻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용혈암(용피바위)이라 했다.
* 구룡지 뒤의 용피바위
* 통도사 오룡곡
용 다섯 마리는 통도사 남서쪽 골짜기로 달아났다. 그곳을 오룡곡이라 한다.
마지막 한 마리는 눈이 멀어 절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면서
살 만한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지금 대웅전 바로 옆의 연못이 바로 그곳이다.’
사찰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용들은 대개 선룡(善龍)인데 반해
통도사는 악용(惡龍), 독룡이다.
우리 전통 신앙에서 용은 신비스럽고 상상 속의 영물로 대표된다.
또한 물의 제왕으로 받들어 신으로 모신다.
그래서 용왕굿, 용왕제, 용신제, 토룡제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통도사의 용은 악신으로 출현한다.
영물인 용이 어떻게 악과 독으로 화할 수 있을까.
이는 전통신앙인 용신과 외래 종교인 불교가
한바탕 갈등과 충돌을 벌이는 형국 외 다른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 상류는 원래 신라시대 용신제를 지내는 가야진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전통 용신 신앙이 매우 강했던 곳이다.
따라서 구룡지의 전설은 초기 불교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전통 신앙과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용 한 마리가 남아 통도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좌정한 것은
결국 전통신앙과 선진 외래 종교인 불교의 습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그런데 왜 하필 용이 아홉 마리일까. 분명 의미가 있을 법하다.
주역에서 1, 3, 5, 7, 9는 양수다. 짝수는 음수다.
우리가 수학적으로 배우는 개념과 조금 다르다.
먼저 아홉 마리 중 세 마리를 뜻하는 3이란 숫자는 주역에서 가장 완벽함을 상징한다.
동양의 삼재사상인 천지인을 표상하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포함한 전체의 의미로 쓰인다.
또한 3은 1(양수)과 2(음수)를 더한 것으로,
양과 음을 모두 포함한 완전한 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세 마리의 용이 죽었다는 의미는
전통신앙이 불교에 자리를 내주고 타협을 이뤘다는 얘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어 5는 소우주로 인간을 나타낸다.
5는 1에서 10에 이르는 중간수이며, 주역의 오행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네 방향과 중심을 합하여 보편성을 상징한다.
다섯 마리의 용이 영축산 골짜기로 갔다는 얘기는 영축산이 불법 도량을 펼치는 우주와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통도사 수호신으로 남은 한 마리는 전통신앙이 불교와 완벽한 습합을 이뤘다는 해석이다.
사실 구룡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9는 완벽한 숫자인 3의 제곱으로 불후의 숫자다.
양이 완성된 수로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지상낙원을 나타내는 가장 높거나 가장 많은 의미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9는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의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9란 의미는 단순하지 않으며,
구룡지의 전설도 예사로 생긴 게 아니다.
성파 큰스님은 여기에 “상칠하이(上七下二)”로 덧붙여 설명했다.
소우주인 인간은 가장 완벽한 양수인 아홉 개의 구멍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상체엔 일곱 개의 구멍이 있으며, 하체엔 두 개가 있다.
상체의 일곱은 대우주를 나타내며, 그 자체로 북두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불교에서 7은 상승의 수이면서 지고천(至高天)의 중심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축산과 통도사 창건설화 중의 하나인 구룡지의 의미가 사뭇 그렇게 깊고 깊은 맥락이 있는 것이다.
전통신앙의 불교 습합과정은 용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산신으로 언급됐던 ‘변재천녀’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면 과연 변재천녀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대 신라사를 전공한 경북대 사학과 문경현 교수는
“변재천녀는 하늘에 있는 천신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산신으로 보면 된다.
보통 ‘天’자가 붙으면 최고 산신으로 평가한다.
산신에 천자가 붙은 산신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쉽게 말해서 족보 있는 산신으로 보면 틀림없다”
고 말했다.
산신에 천왕 호칭이 붙은 산은 지리산 ‘천왕할미’ ‘성모천왕’,
속리산 ‘대자재천왕’, 팔공산 ‘공산천왕’ 혹은 ‘공산대왕’,
태백산 ‘태백산천왕’,
가야산 ‘정견모주’ 혹은 ‘정견천왕’,
비슬산 ‘정성천왕’ 등이다.
그런데 그 산신이 불교의 신 중에서 한 위로 좌정해 있다.
같은 이름 다른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신들은 모두 불교의 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통도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가람각(伽藍閣)이 있다. 통도사 터를 지키는 땅의 신이다.
우리 전통의 신이 불교의 신의 한 위로 좌정해 있는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 뒤 제일 위쪽엔 삼성각(三聖閣)과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보통 삼성각이나 산신각 하나만 있는데 말이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칠성신, 독성신 세 위의 신이 봉안돼 있다.
불교 자체에도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 천성산 내원사 산신각
원효와 산신의 전설을 간직한 천성산 내원사 산신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과 절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천성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부산 기장의 담운사-척판암(淡雲寺-擲板庵)에 주석하고 있던 원효스님은
어느 날 중국 태화사에 산사태가 나 공부하던 스님들이 매몰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글을 쓴 판자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 판자는 태화사까지 날아가 마당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보고 법당 안에서 수도하던 많은 대중들이 놀라 모두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때 갑자기 산사태가 나서 법당 등의 건물들이 묻혀버렸다.
놀란 대중들이 땅에 떨어진 판자를 보니 거기에는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날려 대중을 구하노라(海東元曉擲板而救衆)’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후 원효스님의 법력(法力)으로 구출된 천명의 태화사 대중들이 도를 구하여 담운사를 찾아왔다.
스님은 그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을 나와
"이 산에서 천명이 득도할 것이니 청컨대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
라고 하므로 원효스님은 산신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지금의 산령각 입구까지 일행을 인도한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기려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 되니,
현재의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원효스님은 천성산 산신령의 인도대로 이곳에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ㆍ중ㆍ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여 1천명의 대중이 머물며 수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대중을 산 정상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칭한다.
이후 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 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하여
이후로 원적산을 천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사불산~~!()()().
처처에 계신 부처님.
왜 이런말을 썻는지 알것 같습니다~!
체험과 경험도 중요하지만
의미을 알고 받아들이면 .더욱 감동이며 환희로움인듯 합니다~~!.
매일매일 길을 떠나 헤매는 한 중생이 있어 물엇습니다~~!
왜~!
왜~~~냐고.~!.
그뒤로 동행자가 될수가 없엇습니다
시간낭비일뿐이란걸 알앗기 때문이지요.
요즘 선생님께서 오려주시는 글을 볼때면
내 스스로에겐 헛된 거름이 아니엇다는걸 또한 얗게 라도 알게되고 느껴지는걸 보면 . 감사할뿐
그래서 사찰순례는 안하는것보단 하는게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걸 완전한 체험으로 내것이 될수 있다면 좋겟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혜로써 깨달아지기을.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