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인합창단 레포트 (3B음악여행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한국기독인합창단원 Alto. 김명희
전후 프랑스 문단에 ‘슬픔이여 안녕’을 들고 돌연 나타난 18세의 사강은
주로 인습에 도전하는,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젊은이
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습니다. 사강의 이런 당돌함은 그 시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멀리 극동의 한국에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는 ‘슬픔이여 안녕’은 소설로 읽었습니다만 다른 작품들은 영화로 보았습니다.
‘어떤 미소’와 ‘브람스를 좋아 하세요--’를 영화화한 ‘이수(離愁-원 제목은
Goodbye Again)’였지요. ‘어떤 미소’는 친구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며, ‘이수’는 연상인 삼십 대 기혼여성을 사랑하는 이십 대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뭔가 좀 껄끄러운 사랑, 문제가 있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사강은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브람스를 좋아 하세요---’입니다.
그런데 왜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했을까요. 흥미 있는 포인트입니다. 더구나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 하세요---’에는 절대로 물음표나 느낌표를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냥 말없음표 세 개 만! 을 요구했다는군요.
그건 또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브람스를 이야기하면서 우리 스스로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편단심 민들레 브람스
사강의 취향을 감안할 때 그녀가 브람스를 좋아한 것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스승인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와의 아름답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일생을 통틀어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슈만 부부였습니다. 처음 청년 브람스를 만나 그의 천재를 알아보고
한 동안 자기 집에 묵게 하면서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게 한 사람이 바로
슈만이었습니다. 또 클라라는 자신이 당대의 가장 유능한 피아니스트로서
브람스의 작품을 초연하여 그의 명성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브람스가 평생 이 부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산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슈만 부부에게 1854년 엄청난 시련이 닥쳐옵니다. 1844년 4개월에
걸친 러시아 연주여행의 여파로 정신과 육체적 건강이 악화된 슈만이 정신병을
앓다가 라인 강에 투신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그는 구조되어 목숨은
건졌으나 정신만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일곱 명의 아이들과 가정을 지켜야
하는 클라라를 보는 브람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는 곤경에 빠진
아이들을 보살피는 한편 실의에 빠진 클라라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브람스의 가슴 속에는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다스렸습니다.
‘저 분은 나의 스승의 부인이므로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라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평생 클라라와의 우정을 지켰습니다. 2년 만에 슈만이 타계했지만
브람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그 후 40년에 걸쳐
우정을 나눕니다. 그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서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로, 높임말인 ‘부인(Sie)'에서 친밀한 표현인 ’당신(Du)‘으로
변화해 가지만, 우정을 지키려는 노력은 끝내 잃지 않습니다.
클라라에 대한 그의 일편단심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주위에 여인들이 몰려들었지만 브람스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브람스의 라이벌인 바그너가 평생 많은 여자와 만나고 헤어짐으로써 숱한
염문을 뿌린 것과는 반대로 그는 단 한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그조차 이성으로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브람스의 태도는 사랑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난한 천재 브람스
후기 낭만파 시대를 이끈 브람스는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콥 브람스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였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첼로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 본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합니다.
그리하여 열다섯 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합니다. 그러나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의 인생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학교도 중퇴하고 술집, 식당, 사교장을 돌아다니며
피아노 연주를 해야 했습니다. 단정하고 성실한 브람스에게는 무척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음악수업을
이어갔으며 낭만주의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1853년, 스무 살이 된 브람스는 음악 인생을 크게 뒤바꾸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헝가리)을
만난 것입니다. 젊은 음악가의 재능을 알아 본 요아힘은 브람스를 당대 음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슈만에게 소개하였고, 이후 두 사람은 브람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슈만은 1853년에 발간된 ‘음악신보’에 브람스의 뛰어난 음악성을 소개하였으며,
앞서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세상에 소개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피아노 소나타
Op.1'과 ’피아노 소나타 Op.5‘를 출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브람스의 작곡가의
길은 이들의 도움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고전적 낭만주의자 브람스
브람스는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에 살면서도 고전주의의 맥을 이은
음악가였습니다. 바하로부터 다성적 요소를, 베토벤으로부터 고전적 형식을
이어받아 명작을 남긴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작곡가로 첫발을 내딛던
시기, 브람스는 베토벤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인 피아노
소나타에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역동적인 전개와 뚜렷한 클라이맥스, 그리고
긴장과 해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대의 낭만파 음악가들과는 달리 브람스는 형식과 균형, 절제를 중요
하게 여겼습니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나 리스트의
‘파우스트교향곡’에서 보이는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기분과 복잡하고 특이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고전주의적 특징인 소나타 형식을 이어받아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구성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브람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향곡 제1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면에서 베토벤을 닮은 이 곡은 브람스가 20년에 걸쳐
만든 역작입니다. 베토벤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또한 그와는 다른 맛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베토벤처럼 듣기 편하지는 않지만 씁쓰름하고 떫은맛이
난다고 할까, 인생의 깊은 맛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어디서 오는가 생각해 보면 그의 고향인 함부르크의 기후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강렬한 햇볕이 쏟아지는 남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낙천적인데 반해, 흐리고 안개가 많은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좀 더 감수성이
예민한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심사숙고해서 만든 곡이라서 그런지 이 곡은 가장 브람스답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또한 브람스가 가장 존경했던 베토벤의 교향곡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10번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그너와의 대립- 표제음악과 절대음악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비엔나
중심의 고전주의가 쇠퇴하면서 독일 중심의 낭만주의가 싹트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거장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의 등장을 기다렸는데 안타깝게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버, 멘델스존, 슈만이 기대를 모았지만
그들은 아깝게도 뜻을 펴기 전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대스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브람스와 바그너가 나란히
등장한 것입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도 추구하는 음악도 정반대였습니다. 외향적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바그너와 달리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에 외골수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브람스는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여 바하, 베토벤 등 선배 음악가들이 확립한 업적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뚜렷했습니다. 그와 달리 바그너는 진보적이고 실험적이었
습니다. 전통을 따르기 보다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데 더 관심을 둔 것입니다.
둘 다 낭만주의를 추구하였지만 브람스는 고전적 전통에 근거한 낭만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감정의 표현을 절제하고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절대음악이야말로 참다운 음악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반면, 바그너는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감정표현, 그림을 보는 듯한 회화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표제
음악을 추구하면서 급진적 낭만주의 음악을 이끌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는 대립으로 이어져 유럽음악이 둘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음악가들이 브람스 지지파와 바그너 지지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브람스를 지지한 사람들은 슈만 부부를 비롯하여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퐁 뵐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등이었고, 바그너를
지지한 사람들은 리스트를 비롯, 쇼펜하우어와 니체 같은 철학자들이었습니다.
클라라의 뒤를 따라 죽다
한평생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던 브람스, 클라라를 향한 사모의 정을 가슴 속에
묻은 채 평생 독신으로 지내온 그도 어느덧 60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오선지에 무엇인가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였습니다. 죽음에
관한 명상을 다룬 이 노래는 1896년 자신의 63번 째 생일에 완성되었는데,
그로부터 13일 뒤 브람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평생 사모해 오던
클라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지탱해 온 사랑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그날 이후 브람스는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간암으로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64세의 나이로 클라라의 뒤를 이어 눈을 감았습니다.
낭만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전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확립했던 브람스의 죽음을 사람들은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의 고향 함부르크에서는 모든 배들이 조기를 게양했고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출처:http://power.jegonet.com/bbs/zboard.php?id=8th
-송도익, 작곡가를 통해 보는 음악의 역사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음악여행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