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신광(新光)촌 생산3대 마을. 10년 전만 해도 100가구가 넘던 이 마을의 농가는 현재 70가구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사람은 60, 70대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마을 옆의 신광소학교(초등학교)는 취학 어린이들이 격감하면서 몇 년 전 결국 폐교했다. 한국인들이 지어준 마을 유치원도 문을 닫았다. 같은 자치주의 유동(柳洞)촌도 상황은 비슷하다. 90년대 초 20여가구에 달하던 농가는 현재 단 6가구뿐. 모두 도시로 떠나버린 것이다.》
옌볜 자치주를 중심으로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 랴오닝(遼寧)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에 모여 살던 조선족들이 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의 대도시로 또 한번의 ‘민족대이동’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을 따라 조선족들의 대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 이 같은 현상은 140년 조선족 이주사(移住史)에 있어서 가장 급격한 변화라는 게 조선족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도시로, 도시로〓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은 수도 베이징(北京)으로 7만∼10만여명에 이른다. 다음은 산둥(山東)반도에 위치한 칭다오(靑島)로 4만∼5만명.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는 2만∼3만명 수준이고, 웨이하이(威海), 톈진(天津), 다롄(大連) 등도 1만명이 넘는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최근 10여년간 중국 전역에 산재한 대도시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어림잡아 30만명에 이른다는 게 조선족 학자들의 분석. 10여년만에 200만 조선족의 15% 가량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동한 셈이다.
조선족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베이징 동쪽 외곽엔 ‘코리아타운’처럼 일명 ‘고려촌(高麗村)’으로 불리는 ‘조선족 타운’도 형성됐다. 차오양(朝陽)구의 이룽(翼龍)빈관 뒤편엔 250가구가 한골목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 산다.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주로 한국기업에서 통역을 맡거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의 사무·관리직 또는 노무직의 직원으로 일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사는 셈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상사 주재원들 거주지 주변에 몰려 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56개 민족 중 생활수준 ‘최고’〓조선족들의 생활수준은 중국의 56개 민족 가운데 가장 높은 편이다. 최근 10년새 도시로 진출한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데다 10만여명에 달하는 한국 체류 조선족들이 보내오는 송금액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옌볜대 신문학과 신철호(申哲鎬) 교수는 “조선족 자치주인 옌볜 재정의 3분의 1은 한국에 들어간 조선족들이 부쳐오는 송금액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수교 이후 조선족들의 수입이 늘고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 사회는 급속히 한국을 닮아가고 있다. TV와 냉장과 선풍기 등 가전제품은 대부분 한국제다. 옌지(延吉)의 경우 최근엔 벽지 등 아파트 내부 장식도 중국식에서 한국식으로 바뀌고 있다. 블리치 염색 등 한국에서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이나 패션이 옌지에 도달하는 데는 3개월도 채 안 걸린다.
그러나 집거지(集居地)인 동북 3성을 떠나온 조선족 가운데 도시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린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의 주거비와 물가고 등을 감당하지 못해 상당수가 빈민촌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베이징 고려촌에 있는 조선족들의 집은 보통 10평 남짓. 대부분이 부엌 하나에 방 1, 2개씩이다. 이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800∼1000위안(약 12만∼15만원)에 달하는 10평 주택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3∼5평의 ‘벌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도시 진출 조선족 가운데 90%는 ‘내 집’이 없다. 25∼30평 규모의 대도시 아파트 가격이 보통 50만∼80만위안(약 7500만∼1억2000만원)으로 600∼1000위안 수준의 노동자 월급으로는 평생 저축해도 모으기 힘든 돈이기 때문이다.
▽민족 공동체 붕괴 우려〓한중수교 이후 전체적으로 조선족의 삶의 질은 나아졌지만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중국에서 140여년간 이루고 살았던 ‘조선족 공동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50년대 초 75% 이상이 조선족이었던 옌지는 현재 전체 인구 38만명 중 조선족 비중이 38%로 줄어들었다. 옌볜 자치주의 280만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30%도 채 안되는 83만명이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조선족이 맡고 있던 중국 공산당 지린 옌볜 자치주위원회 당 서기는 조선족에서 한족으로 바뀌었다. 동북 3성에 산재한 4000여개의 조선족 마을은 최근 10년새 절반 수준인 2000여개로 줄어들었다.
오랫동안 조선족 사회를 연구해온 칭화(淸華)대학 중문과 정인갑(鄭仁甲)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머지 않아 조선족 자치주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도시 민족 공동체를 이룩하는 게 절박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조선족 갈등의 골 깊어▼
중국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은 ‘공생 관계’지만 양측의 갈등의 골은 깊다.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하대(下待)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불평불만이 많고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똑같이 실패한 합작사업이라도 한국인-중국인과는 달리 한국인-조선족의 경우엔 서로 원수가 된다. 칼부림도 잇따른다. 최근 산둥(山東)성에서는 한국인 상사원이 조선족이 낀 4명의 폭력배에게 살해당했다.
이 같은 갈등의 1차적 책임은 한국인 상사원들에게 많다는 게 일반적이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조선족 직원에게 “야, 이리 와”라고 하는 등 인격을 무시하는 태도가 조선족들의 가장 큰 불만이라는 것이다.
조선족에게도 문제는 있다. 한국인들이 중국 사정에 어두운 점을 틈타 사기행각을 벌이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다.
한국인들의 ‘취업 사기’와 조선족들의 ‘합작 사기’가 가장 많았던 때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은 97년 전후.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같은 갈등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서로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반목이 크게 줄었다는 것.
홍길남(洪吉男) 옌볜TV 사장은 “양측의 갈등과 배신감은 당초 서로에 대한 믿음과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데 기인하는 것 같다”며 “이해관계가 걸린 경제에서는 한 핏줄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을 냉정하게 사전 검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기업 성별 투자진출 현황(2002년 6월말 누계)
지역 투자건수 투자액
장쑤성 345 6억7170만달러
광둥성 155 2억3432만달러
지린성 620 1억7546만달러
베이징 373 4억589만달러
산둥성 2185 16억746만달러
상하이 282 5억921만달러
랴오닝 1165 5억8863만달러
저장성 162 2억1587만달러
톈진 600 7억6660만달러
후난성 10 1억217만달러
헤이룽장성 258 1억4972만달러
계(기타 지역 포함) 6525 56억8564만달러
(자료:한국수출입은행)
“미래를 꿰뚫어보는 예지력이 필수적이죠.”
조선족 기업인 ㈜모드모아 이성일(李成日) 회장의 성공 비결은 신용과 예지력이다. 중국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 회장은 특히 예지력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수출용 ‘싸구려’ 경공업에 매달릴 때 그는 과감하게 선진국 중산층을 겨냥해 카펫 회사를 설립했다. 세계적 수준의 중국 카펫 제조 기술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선진국 시장을 뚫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96년 회사 설립 이후 매출액은 매년 2, 3배씩 뛰어올랐다. 지난해 매출액은 9억위안(약 1350억원)으로 순익만도 4000만위안(약 60억원)에 이른다. 직원은 2200명. 생산제품의 90%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6개국으로 수출된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당초 경찰관이었던 그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92년. 그러나 잇단 사업에서 그는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기후와 토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중국 남부에서 시작한 깻잎 사업은 바로 망했고, 침구 사업은 수요를 예측하지 못해 실패했다.
그는 현재 중국의 정치인들도 알아주는 기업가다. 그는 광둥성의 정치협상위원회(정협) 위원이자 중앙정부 직속기구인 ‘민족대단결 촉진회 광저우시 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 우한(武漢)의 방직대학과 옌볜(延邊)대학의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서울대는 다음달 말 그를 초청해 경영비결에 대한 강연을 들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