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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 다운 시인이었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포연 속을 누볐고,
그 슬픔을 만가(輓歌)로 노래 부를 줄 알았다.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내고
1956년 3월 20일 밤 9시 경 심장마비로 운명.
당시 그의 아내는 서른,
어린 2남1녀 아이들은
9살· 7살· 4살이었다.
당시 9살이던 박세형(朴世馨·67)씨는
그날 밤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우리 집은 서울 세종로 135번지
(교보빌딩 뒤편) 디귿자 한옥이었어요.
집 가운데 펌프 우물 푸는 마당이 있었는데
그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와 토하시니
제가 등을 쳐 드렸습니다. 입에서 활명수
냄새가 났던 것으로 기억해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뛰어가셨어요.
그때
밤 9시가
넘고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이미 아버진 눈을 감으셨어요.”
그와 가깝던 문우 증언으로는,
죽은 이상(李箱·1910~1937)의
기일(3월 17일)을 기해 사흘 동안
술을 마셨고, 죽던 그날 화가 김훈이
사준 자장면 한그릇을 먹었을 뿐 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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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상섭·박종화·현진건
같은 당대 주호(酒豪)가 아니라
그저 풋술을 즐기던 여린 시인이었다.
술을 이겨 내지 못한 것.
“당시 부모님은 사랑채를 쓰셨고
저는 외조부와 한방을 썼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늦게
외조부가 잠든 저를 깨웠어요.
‘이놈아, 네 애비가 죽었다’시며…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제가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눈을 비비며 어머니가 계신 사랑채로 갔더니
아버지 시신이 옥양목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눈은 감고 있었고요.
아버지 친구 송지영 이봉구 시인
증언은, 눈도 못 감았다고 하는데
제 기억으로 그런 것 같지 않았어요.”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니
사흘 동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댓돌에 앉아 비를 보며 생각했어요.
다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우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고 말이죠.”
장남 박세형씨는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이 점점 깊이 다가와
오래도록 가슴을 짓눌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왜
별안간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제 나이 15살 때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보다 16년을 덜 살았다’고
되뇌었고, 서른이 되자 ‘아버지보다
1년을 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면서 더는 죽음을
떠올리는 공포는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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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전에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생활인이셨어요.
자력으로 솔가해 자식을
부양할 생활인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참혹했어요. 당시 고료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됐을까요?”
생전 박인환은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 두꺼운
겨울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박세형씨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왔다.
영문과 최인호(崔仁浩·1945~2013)는
같은 학번이고 마광수(馬光洙)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 같이 수업 듣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국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지방 출신들이 70%나 됐어요.
‘나는 어느 고교를 나왔는데, 고2때 전국
백일장에서 1등을 했다’는 얘기부터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10번 읽었다’는 얘기까지 문학깨나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렇게 소개했죠.
‘연대 정외과에 떨어져
재수해서 왔다’고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죠. ‘아버지가
시인 박인환인데, 그렇다고
시 쓰러 온 것은 전혀 아니다’.”
마음속으로 절대
아버지처럼 문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
“문학이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문학을
안 했다면 평범하게 사셨을 테니까요.
집안의 가장은 결혼해
땅에 발붙이는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걸까.
현대건설 리비아 현지
업무부장이었던 그가 회사
구조조정에 반발, 사표를 던진 것.
1년 넘게 회사와 송사(訟事)
“그때 저절로 시가 나오더라”.
“직장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제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
시가 저를 구제하더군요.
정신없이 썼어요.
유명한 미술평론가 친구놈이 제게
‘미적 감각이 놀랍다’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책과 옷가지 모두 버려
시인이 살았던
세종로 135번지는
박인환의 처가였다.
그곳은 현재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 뒤쪽이다.
그는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제 외조부는 일제시대 은행지점장을 하셨고,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분.”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
한일병탄 이후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됐다.
시인의 장인은 고종의 재산과
재정 운영을 맡았다고 한다.
“외조부는 딸만 둘을 두셨는데,
어머니는 맏딸과 14살 차이 둘째
어여뻐하시며 애지중지 키우셨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어머니 성격이 의존적이셨어요.
평생 모든 재화를 처가를 통해 받았으니
돈 개념도 없으셨어요. 원서동(창덕궁 인근)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셨다고 해요.
딸 소식이 궁금한 외조부가
퇴근길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우는 모습을 보셨어요.
하는 수 없이 외조부가
조부에게 얘기해 신접살림을
처가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수레에 한가득 책을 싣고 처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시인의 아내는 귀하게만 자라서였는지
생활력이 없었고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어깨 폭이 좁아 어머니처럼 한복을 잘 입은
이를 본 적이 없어요. 키가 170cm로 늘씬했고
진명여고 다닐 때 농구선수 포지션은 포드였어요.
얼마나 날렵하셨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한복을 차려입으셨다면
날아가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만큼
얼굴 화장이
아름다운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어요.
그런 분이 서른에
청상이 되어 평생을
홀로 사셨어요.”
맏이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잖아요.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사실, 저와 어머니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뭐랄까 묘한… 생활 안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불화의 원조는 제 안에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 나이
고작 서른에
애가 셋이었죠.
절망의 깊이를 이해한들
어린 자식들은 알 수가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떠난 아버지의 책들,
사랑채 벽면을 빼곡히
둘러쌌던 아버지의 흔적을
죄다 버렸습니다.
넝마주이가
다 가져갔어요.
아버지 옷가지들도
없애 버리셨어요.
우리 집처럼 선친의
유품이 없는 집이
없을 거예요.
그저 사진 몇 장밖에.”
시인의 부인 이정숙은
2016년(향년87세) 사망
1948년 부모님은
덕수궁에서 결혼식.
이정숙 여사는
박인환 시인 사후
58년 4개월 세월을
홀로 지냈던 셈이다.
망우리공동묘지가
만장이 되어 부부는
합장하지 못하였다.
....................................
술보다 독한 눈물/박인환.
.....................................
.
'故 박인환 옛 시인은
패시미즘에 빠진걸까?'
.
...........묘비 뒷면................
"시인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으며
1956년 3월 20일 31세를 일기로
불행한 시인의 일생을 마쳤다.
.
"부인은 이정숙
여사와 자녀 3남매로
세형 세곤 세화가 있다.
사흘간 밤낮없이 외상술을 마시고
귀가한 후 깊은 잠에 빠졌던 박인환.
그의 사인은 안타깝게도 심장마비였다.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도
돈이 없어 찾지 못했기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채
1957년 3월 20일 밤 9시 운명.
죽기 전에
친구가 사준
자장면 한그릇.
그것이 옛 시인 빈속을
달랜 준 유일한 곡기였다.
눈을 부릎뜬채
마지막 숨을 거둔
옛 시인의 마지막 모습.
부지런히 원고를 써도
집에 쌀이 떨어질 정도로
궁핍했던 당시 문인들의 삶.
"내가 죽으면
시집이 많이
팔릴꺼야.."
생전에 아내에게
입버릇처럼 말한
박인환 시인이었다.
그가 운명한지
20년이 지난 1976년
출간된 시집.,목마와 숙녀.
1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976년 근역서재(槿域書齋) 간행.
박인환 시인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아들 세형(世馨)이 묶어낸 시집.
.
생존시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에
수록된 시 56편 중 54편과 유작 등 미수록
시 7편 등 모두 6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집 표제는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를 취하였다.
.
.........................'버지니아 울프' 유서..............................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
버지니아 울프가 서섹스 시골집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생전에도 작가, 여성운동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나 개인적인 삶은 힘겨웠다.
예민한 성격에 평생 불안 증세와 신경쇠약에 시달렸는데,
여기에 남편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41년 2월 마지막 작품 《막간》을 탈고한 후
우울증이 심해진 버지니아는 3월 28일 남편에게
편지를 한 통 써 두고 산책을 나갔다.
'여보, 나는 내가 다시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가 또다시 그러한 지독한 시간을 극복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었을 겁니다. 당신의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두 사람도 우리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울프는
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는
우즈 강에 투신해 자살했던 것.
'죽음이여, 내 너에게 뛰어들리라.
패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서!'
- '버지니아 울프' 묘비의 글 -
결혼 전 이름.,애덜린 버지니아 스티븐
1882년 1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난.,그 녀.
아버지 레슬리 스테판은 <18세기에 있어서
문학과 사회> 작가, 어머니는 줄리아 덕워스.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이용할 수 있었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울프는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
1897년,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 공부 시작.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울프는 두 번째 정신이상증세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미수.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
1915년 《항해》을 출판한 뒤
1919년 《밤과 낮》을 간행
1925년 《댈러웨이 부인》
1927년《등대로》,
1928년 《올랜도》
1941년 3월 28일 우즈강 산책 나갔다가 행방불명
우즈강 강가에 울프의 지팡이와 발자국이 있었다.
이틀 뒤에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서재에는 남편과
언니에게 남기는 유서가 있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허탈감과 환청,어린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정신이상 발작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추정된다
............용마산 망우리공원...............
면목동 용마산( 348m)은 아차산 최고봉.
'망우리공원은 중곡동' 산능선 등산로 따라
망우리~아차산성~어린이 대공원 후문까지
이어지는 시민공원(면적 2,800,619㎡) 묘지.
용마산 서거정공원은 조선전기 문인
서거정 선생이 살던 곳이라 그 호를 따서
공원 이름을 지었고 그의 시비가 4개 있다.
구리시와 경계를 이룬 망우리 고개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조선 창업후 동구릉 묘터를 찾고 돌아오다가
잠시 한 고개에 멈춰서서 산천을 돌아보면서
근심 걱정을 잊었던 고개가 바로 망우리 고개.
.............................................................
일제 강점기 미아리 공동묘지와 더불어
'한국인 전용 묘지'였던., 망우리 공원묘지.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로부터 벗어났으나,
사상과 이념의 분열·대립 속에서 열강의 정치적
영향에 의해 남북한 분단을 면할 수 없었던 한반도.
해방 직후 정치적 측면에서의 좌우 사상 대립은
문단에서도 여러 분파의 갈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해방 직후 소설인, 이태준의 〈해방전후〉(1947),
채만식 〈제향날〉(1946), 김동리 〈무녀도〉(1947),
정비석〈파도〉(1946), 박영준〈목화씨 뿌릴 때〉(1946),
박태원〈성탄제〉(1948), 염상섭〈삼팔선〉(1948),
박노갑〈사십년〉(1948), 안회남 〈전원〉(1946),
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1948) 등 작품집들.
이 소설들은 대체로 두 가지 흐름을 보여준다.
하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사회적 행위의 제어수단
그 수단을 사회적 이념의 지표에 연결하려는 움직임.
삶의 현실 문제를 계급적 의식에 대응시켜 보고자 한
이태준·박태원·안회남·박노갑 등이 이 부류를 대표하며,
김남천·홍효민 등의 리얼리즘이 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은
문학과 인생에 대한 폭넓은
조망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과
그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작가들.
채만식을 위시한 김동리·계용묵·정비석·
최정희·황순원·최인욱 등이 이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소설적 경향은 물론 당시
문단의 좌우대립양상과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시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이념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시가 서정양식으로서의 시 형태를 상당 부분 파괴
정치적 현실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시적 이념으로 끌어들인
시인들 가운데, 김기림 〈새노래〉(1948)는 이념 선전을 중심
오장환의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은
현실 지향적인 시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용악〈오랑캐꽃〉(1947)도
이념적 지향이 강조되고 있다.
민족 시인들은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공동 시집 〈청록집〉(1946),
김상옥 〈초적〉(1947),
유치환 〈생명의 서〉(1947),
서정주 〈귀촉도〉(1948),
박두진 〈해〉(1949) 등.
1950년 6·25는 남북분단을 고정시켜 놓은 비극적인 계기
분단 상황 문제성이 전후 한국사회를 조건지워 놓고 있다.
한국사회가 전쟁 혼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950년대 중반.
전쟁이념과 체제에 대한 거부와 반항이 싹트기도 했고,
새로운 삶의 지표와 가치 정립을 위한 몸부림도 나타난다.
문학 영역에서는〈문학예술〉현대문학〉,〈자유문학〉 등
종합문예지의 등장과 함께 〈사상계〉, 〈신태양〉 등의
종합지가 모두 문학활동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전후 소설의 경향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해방 이전 세대에 속하는 김동리·황순원·안수길
'카인의 후예'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체험했던
살벌한 테러리즘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인간의
자유를 향하는 의지를 짓밟아 버리는 맹목적인
이데올로기 횡포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전쟁의 현실을 직접 체험한 전후세대 작가들은
전후 폐허 현실 속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자 모든 기성적인 것을 부정하고
기성 세대의 윤리 의식과 사회 가치 개념에
대한 반항 의식을 표현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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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시작활동을 통해 해방 이후 시단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성과들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시적 완결성에 대한 신념을 지켜
청록파다운 풍모를 유지한다.
1950년대 전후시의 가장 뚜렷한 특질은
언어의 가능성과 대상으로서의 현실의 시적
수용에 부심하던 새로운 시인들에 의해 드러난다.
이들은 착잡한 현실과 혼란된 상황,
끝없는 물질적 요구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의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외부 현실과 차단된 자기 내면의
서정세계만을 고집하는 시적 경향을 거부.
흔히 실험파 또는 현실파로 분류되기도 하는
김경린·조향·김규동·이봉래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의 언어는 즉물적이며,
이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도시문명의 어둠이 차지한다.
8·15해방 이후의 희곡문학은
해방 공간의 혼란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을 강조하면서
극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당장 그날 그날의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던 1950년대
그때 그시절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박인환' 시인.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옛 시인의 시와 노래말 처럼
용마산 망우리공원에 잠든다.
'1926~1956 (향년 29세)'
1945~1956 시인으로 활동.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
아버지 박광선(朴光善)은 면사무소 직원.
땅도 꽤 있어서 어릴 적 그의 집은 부유한 편.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이
머리가 좋고 똑똑한 것으로 드러나자,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아버지는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겨 산판업.
가족과 함께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에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에 진학한다.
이 무렵 그는 영화와 문학에 빠져들어
공부 대신 일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 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탐독으로 밤새운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드나든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
그는 중학 졸업 뒤 아버지의 강요 및 권유로
3년제 관립 학교인 평양의학전문대학에 입학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다.
헌칠한 키에 얼굴도 잘생긴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 최고의 멋쟁이, ‘댄디 보이’
여름에도 늘 정장 차림을 하던 시인 박인환
....................
.....................
1945년 8·15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 남북 협상 등이 진행되었으나
실패하고 결국 1948년 남북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분단되었다.
8.15 해방 후 제주에서는 좌우익
정치적인 갈등이 극심한 상태였다.
거기에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민을 탄압하자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했다.
애초 미군정은 경찰을 동원해 진압하려 했으나 사태 악화.
군을 투입해 진압하여 사건 종결 후
1950년 6·25전쟁을 거쳐 남북분단 심화.
그후로 이 사건은 언급되는 자체가 금기시.
...................제주 4.3 사태.......................
광복 직후 제주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 미곡정책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 경찰.
군정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민심을 더욱 악화,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활동 전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
서북청년회(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 사례가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제주 사회는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갈등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 결렬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고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2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 무효 처리.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제주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집단 살상.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소실.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에 이르렀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한다는 사면정책 발표.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
1949년 5월 10일 재선거 실시.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며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 희생되었고, 또 전국 각지
형무소 수감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채택,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 추정,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인명피해.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
으로 지정되었다.
......................
1945년 8.15 해방이 된 이후 이 땅은
다시 한번, '민족 대이동'을 겪게 된다.
일제 강점기 때 압박과 궁핍에 못 이겨
새 삶터를 찾아 고향을 떠났던 유랑민들,
일제의 감시가 덜하였던 중국의 여러 도시와
만주 벌판으로 흩어져 투쟁을 벌인 독립 투사들,
유학 등의 명목으로 민족이 겪고 있던
비극적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일본이나 중국, 미국 등지로 떠난 이들······.
이들 모두가 이제는 반대로 해방의 감격과
새로운 삶의 기대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땅은 이들의 귀향을 포근하게 맞아줄
터전이 거의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이 되고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 속에서
해외로 나갔다가 귀환한 동포와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의 수를 전부 합치면 약 120만 명에 이르는 유랑민.
이렇게 많은 유랑민이 한꺼번에
서울 등지로 밀려들어오자 곧바로
남한은 주택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진다.
일본인들이 남한에 남기고 간 8만 호.,적산 가옥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지만 이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어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주택난은 날로 심해진다.
특히 흙 냄새며 바다 냄새가 그리워 고향을 찾은
농어민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 얼마 견디지 못해
무작정 서울로 발길을 돌려 궁핍 속 일자리 태부족.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조금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면 변두리 야산 중턱이나
개천변, 다리 밑, 공터 묘지 등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움막을 짓기 시작한다. 일명 ‘하꼬방’
· ‘상잣집’ · ‘판잣집’ · ‘바라크’라고 불리던
이 임시 주거 형태는 장소만 물색해놓으면
미8군에서 흘러나온 나왕 · 미송 · 루핑 · 깡통 ·
비닐 등의 재료를 갖고 단속 공무원이 퇴근한
저녁부터 지어 다음날 아침 나절에 벌써 마무리
입주해버리는 속성 주택이자 무허가 주택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안으로 들어서면
칸막이로 나뉜 여러 방에 다가구가 입주,
상하수도를 비롯 위생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물론 화재 등 사고에 전혀 무방비
이런 생활이나마 유지되면 다행이지만
언제 단속반의 철거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지 몰라 임시 주거 형태에 깃들인 사람들은
하루하루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해방 공간에 들어서기 시작한
임시 주거 형태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서울에 더욱 널리 퍼진다.
이범선, 『오발탄』(1959)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큼 비좁은 골목길.
부엌에서 아무데다 마구 버린 뜬물.
미끄러운 골목에는
구공탄 재가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집 방문들이 보였다.
해방 뒤의 귀환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다룬 이 시기의
소설로서는 계용묵의 「별을 헨다」
「바람은 그냥 불고」,
김동리의 「혈거 부족」,
최인욱의 「개나리」, 정비석의 「귀향」,
최태응의 「고향」, 엄흥섭의 「귀환 일지」,
안회남의 「불」,
염상섭의 「첫걸음」
삼팔선」, 김만선의 「압록강」,
허준의 「잔등」 등을 꼽을 수 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시를 써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 박인환 -
그가 술회한 것처럼 해방공간으로부터
한국전쟁 및 전후의 혼돈시대를 배경으로
쓴 그의 시는 좌절과 허무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청년의 비극적인 현실 인식 및 모더니즘
풍의 감각과 시어로서 형상화된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박인환의 도시와 문명에 대한
모더니즘 추구는 시대상황적인 회의와
절망으로 밝은 면보다는 우울과 감상 등
어두운 면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나, 청록파 등 전원적인 서정이
주조를 이룬 1950년대 도시적 서정을
탐구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1940년대 한국 문학사적 특징' 청록파.
1930년대 말~1940년대 초『문장』을 통해
문단에 나온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이 그동안
서정시를 모아 1946년 여름에 출간한 시집 '청록집'
‘을유문화사’ 공동시집 『청록집』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
박목월 편에는 「임」
윤사월」 ·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조지훈 편에는
고풍 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완화삼(玩花杉) 등 12편,
박두진 편에는 「묘지송(墓地頌)」
「도봉(道峰)」 · 「설악부(雪岳賦)」
등 12편이 실려 모두 합쳐 39편의 시집.
박목월 · 조지훈 · 박두진 세 시인은
애초에 특별한 유파 의식을 바탕으로
공동 시집을 펴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시에 함께
나타나는 소재의 뚜렷한
자연 지향성, 그리고 일제가
국어 말살 정책으로 숨통을 조이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말의 리듬과
토속적 아름다움을 잘 살려낸 점 때문에
세 시인은 공동시집 발간 뒤 ‘청록파’로 분류,
알고 보면 세 사람은
이 합동 시집 한 권을
낸 것 외에는 특히 행보를
같이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청록파가
하나의 유파로 사랑받으며
오랫동안 한국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36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가
막을 내리면서 온통 정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시대 배경 속에서
정치색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작품이 오히려 대중의 감수성을 건드린 것
문학 분야에서도
정치적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좌우
이념의 투쟁으로 점철된
해방 공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골치 아픈 ‘정치시’보다는 서정시에서
뜻밖의 따뜻한 안식과 위로를 찾은 것이다.
이제 그만 시끄러운 현실을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를 절실히 느낀
당대인의 현실 도피 심리에 청록집이 내세운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는 썩 훌륭한 출구로 작용.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그러므로 일부 비평가는
‘청록파’의 시들이 지나치게
현실을 배제한 서정 일변도이며,
너무 정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세 시인의 시세계는 표현의 기교나
율격 면에서 서로 다르나 자연을 제재로
인간적 염원과 가치를 추구한 것은 공통점.
박두진은 자연을 원시적 건강성과
격렬한 의지의 대상으로 이해했으며
박목월은 독자적으로 수용한 민요조
리듬에 애틋하고 소박한 향토적 정서.
조지훈은
전통적 생활양식에 깃든
한국적인 정신과 미의식을
섬세한 감성으로 시화했다.
<문장〉에 추천된 작품을 중심으로 엮었으며,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라는 점이 공통적이며
8·15 후 '최초 창작시집' 한국시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들은 정지용 추천을 받아 등단했으며,
1946년 6인시집 청록집을 을유문화사에서
펴내면서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
.................
그무렵 명동은 제법 번화한 거리였다.
멋쟁이 젊은 남녀, 작가, 시인, 화가, 실업자,
거지, 앵벌이, 아편 중독자, 병역 기피자, 양공주,
건달······.명동거리에는 갖가지 인간 유형이 모여든다.
1949년 이미 명동 바닥에서는
해괴한 소문이 한 가지 떠돈다.
“명동에서 문둥이가 시를 판대.”
어느날 밤, 명동 한 바에
어깨에 닿을 만큼 머리가
긴 거지 하나가 나타난다.
거지는 5~6명의 신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다가간다.
“뭐요?”
거지는 신사들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종이에는 「파랑새」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다.
한 신사가 제목을 들여다보며
“그린 버드(Green Bird),
그린 버드(Green Bird).”
하고 중얼거린다.
“이거 당신이 지은 거요?”
“네, 시가 되건 안 되건 한 장 사주세요.”
“여기에 계신 분들이 시인들이오.
자, 내가 소개하지. 이 분은 정지용,
이 분은 이용악이라는 분이오.”
그들은 시를 파는 문둥이 거지에게
술잔을 권하지만 거지는 사양한다.
“인간이 사는 조건은
육체적 조건으로
사는 것이 아니오.
정신적인
것이 제일이오.
어서 드시오.”
정지용은 호주머니 속에 있던 고급
만년필을 꺼내 거지의 손에 쥐어준다.
“내 오늘 밤은 돈이 없으니
대신 이 만년필을 갖다가 쓰시오.”
그러나 거지는 만년필을 탁자 위에
그냥 놓고 허둥지둥 바에서 나간다.
이 거지가 바로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
그는 나병에 걸린 몸을 끌고
비극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과 고독을
담은 시를 팔아 삶을 지탱해나간 것이다.
삶에 대한 애착을 통곡과 피의
언어로 노래했던, 문둥병자 시인
194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
문둥이 박대가 심한 시골을 떠나
서울 명동까지 진출하여 구걸한 그.
겨울이 닥치자 얼어죽지 않기 위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한하운은 시를 판 것.
.
어느 날부터 한하운은 자신이 쓴
「파랑새」 「비오는 길」 · 「개구리」
같은 시를 구걸의 대가로 지불한다.
명동에서 시를 파는.,'걸인 시인' 하나운.
몇몇 시인의 도움으로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라는 제목으로
<전라도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외 12편 발표.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하운,
「전라도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전문, 『신천지』(1949. 4.)
이것이 많은 독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어
같은 해 5월 그의 시 26편이 실린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한하운 시인......................
1937년 이리농림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 세이케이 고등학교 2년 수료하였다.
그해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 졸업.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 근무
1945년 한센씨병(나병) 악화로 관직 사퇴.
1946년 함흥학생사건 연루 반동분자로 투옥
1948년 공산 치하를 피해
월남하여 한동안 유랑생활.
1950년 성혜원 설립 운영,
1952년 신명보육원 설립·운영.
1953년 대한 한센 연맹위원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병 환자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960년 무하문화사, 1966년 신안농업기술학교
교장 및 한국사회복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이병철(李秉哲) 소개로
〈신천지〉에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나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
1949년 첫 시집 '한하운시초'후
문둥병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1955)
제3시집 〈한하운시전집〉(1956)
.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 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 한하운시집(1960)을 펴냈다.
...........1950년대 한국 문단............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무려 6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낳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기까지
3년 전쟁으로 집과 공장은 잿더미가 되고
도로 및 사회 간접자본도 거의 다 파괴된다.
문학은 그 시대의 갈등과 고뇌를 반영한다.
사회 혁명을 이끌고 당 조직을 정비하며
권력을 거머쥔 김일성 및 북한의 지도부는
‘혁명 사명감과 열정’ 그리고 군사적 모험주의.
1950년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의 전면 공격으로 전쟁이 개시된다.
이미 삼팔선 부근에 집결해 있던 인민군 7개 사단은
상부 지령이 떨어지자 보병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철원과 의정부 지나 경인가도를 따라 남녘으로 밀려든다.
처음에는 그저 삼팔선 언저리에서
좀 규모가 큰 교전이 벌어진 걸로 생각.
곧 수습되길 기다리고 있던 서울 시민들.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접하면서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들도
하나 둘씩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피난민 행렬은 자꾸 늘어 어느덧
한반도 남녘은 한강을 건너거나
수원역 화물 열차의 꼭대기에라도
올라타기 위한 사람들로 아수라장.
6월 26일 문예빌딩 2층 ‘문예사’
사무실에 모인 문인들은 긴급 문총
상임위원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튿날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진다.
같은 날 저녁 ‘문총’ 회장 고희동과 모윤숙.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중앙방송국으로 가서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내용의 방송을 하고,
김윤성과 공중인은 격문까지 작성하여 낭독한다.
이튿날인 6월 27일 다시 모인 모윤숙 ·
오영진 · 김동리 · 조지훈 · 박목월 · 이한직 ·
서정주 · 김윤성 · 서정태 · 박종화 · 김영랑 ·
김진섭 · 김송 · 조연현 · 이원섭 · 이동주 · 공중인
등 30여 명은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사무실 안팎에서
서성거릴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며,
고작해야 모윤숙처럼 미아리와 의정부 쪽
큰길로 나가 스피커로 “맥아더 사령부에서
미군이 진주해 오니 안심하라.”고 외치는
허황된 일로 선전대의 임무를 대신한다.
곧 가족을 걱정하며 하나둘씩 사라지고,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지훈 서정주
이한직 · 김윤성도 피난을 하기 위해 철수한다.
곧 미군이 올 것이라는 거짓 방송을 믿고
피난을 서두르지 않은 숱한 체류자와 낙오자를
뒤에 남긴 채, 밤 사이에 한강대교는 8백여 피난민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가운데 폭파되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
6월 28일 서울에 인민군 3사단이 밀려들고,
한강을 건너간 문인들은 대전에서 합류한다.
한때 북녘에서 활동하다가 응향사건 후 월남해
육군정보국 촉탁 신분으로 대북 신문인 '봉화'의
제작과 북한 방송 청취 분석 일을 하던 시인 구상.
한강을 건너기 위해 주먹밥 물치를 싸들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가 강물 언저리 즈음에서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것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한강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놀잇배에 뛰어내려
가까스로 한강을 건너 피난하였다.
한강대교의 폭파로
남쪽 피난 길목이 끊기자
서울은 고립 무원의 섬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겨진 시민들은
그제서야 전쟁을 실감하며 불안과 위기감
속에서 저마다 생존 길을 찾기 위해 암중 모색
참혹하게 파괴된 도심.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
인민군을 피해 방공호나
다락방으로 숨어든 사람들······.
전쟁은 어느덧 관념이 아니라
살속 깊이 파고드는 극한 상황.
6월 28일, 서울함락을 알리는 인민군 시가 행진
이 행렬에 섞여 안회남 · 임화 · 김남천 · 박팔양 ·
홍구 등 1947년을 전후로 월북한 ‘조선문학가동맹’
주요인물들이 종로2가 한청빌딩 2층에 모습을 보인다.
이 가운데 몇몇의 얼굴에는 잠깐이나마
옛 동료들을 다시 만난 데 따른 반가움이
스치기도 하지만, 곧 태도를 바꾸어 저희가
띠고 온 임무를 수행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의 협박으로 몇몇 명망가는
남한 정부에 불리한 내용의 방송을
하러 나서고, 일반 문인들은 날마다
출근해 상부의 지시와 교육을 받은 뒤
자아 비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충성의 뜻을 담은 작품을 지어낸다.
이렇듯 서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잔류 문인들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문학과 작가의 양심을 내동댕이친다.
이 무렵 김동리는
손소희의 집을 찾아가
벽장 속에서 숨어 지내며,
조연현은 본명을 숨기고
동대문시장 노점에서
옷장수로 변장한 채
고비를 넘긴다.
박두진은 안양의 직물 공장 노동자로 숨어들고,
점령 직전까지 스피커로 “미군이 오니 안심하라.”고
소리치던 모윤숙은 광나루 건너 광주의 한 농가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적치(敵治)’ 석 달을 버틴다.
또 한때 좌익 문학 진영의 선봉에 있다가
전향한 김기진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나 가까스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다.
.
'삼천리'에서 만나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서로 애정을 잃지 않고 살던 김동환과 최정희
부부는 6.25 전쟁 와중에 생이별을 겪게 된다.
김동환을 피신시켜놓고
조선문학가동맹에 나가서
온갖 굴욕을 감수한 최정희
“나타나면 우대하겠다.”는
정치보위부 간부의 말을 믿고
김동환과 함께 우중충한 건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간다.
물론 그 간부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며,
아픈 딸을 걱정하며 최정희에게
“아란이 주사 맞혀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김동환은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여부의 소식조차 모르게 된다.
전쟁이 터지고 여러 날이 지난 뒤에도
국군은 여전히 열세에서후퇴를 거듭한다.
한편 인민군도 부산 진격 목표가 예정보다
지연되면서 훈련된 병력을 많이 잃는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감소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의용군 강제령을 발포.
사춘기를 갓 넘긴 청소년부터
장년층에 이르는 남자들을 색출
최소한 훈련조차 시키지 않은 채
전선에 몰아넣는 인간 방패 전술.
처음에는 노동자와 농민 출신이
낙동강 전선에서 공허한 떼죽음을
당한 데 이어, 곧 남한의 각계 문화인
2천명을 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하달.
.
7월 30일, 문학가동맹 · 미술가동맹 ·
음악가동맹을 포함한 갖가지 문화 단체
소속원들에게 의용군 강제령이 발동된다.
의용군은 민간 지원제 형식으로 모병되나,
실제로는 강제 징집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안회남은 문인들에게 의용군 지원을 강경 종용.
의용군 지원 궐기대회 강제참석 ‘수동적 피지배자’들
잔류 문인과 문학 청년 2백명은 제11차 의용군으로 소집.
이로써 기성 문인들은 물론
아직 문단에 정식으로 이름조차
올리지 않은 문학청년들까지 차출.
이 때 박상준 · 안동림 · 김수영 · 고원 ·
박계주 · 김용호 · 유정 · 지봉문 등은
머리를 박박 깎이고 군복이 입혀진 채
의용군으로 등을 떼밀리게 되는데, 다행히
이들은 후방인 평북 청천강 쪽으로 보내진다.
이들은 끼니때 나오는
찬밥 한덩이로 배고픔을 견디고,
미 공군 삐라를 보며 탈출 기회를 엿본다.
개전 두달 만에 낙동강 방위선으로 밀린 국군은
겨우 맥아더(Douglas McArthur) 사령관의 대구
사수 명령과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한 각국의 병력을
지원받은 워커 장군의 지휘로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국군은 낙동강 방위선에서 출발해
다부원을 뚫고 상주와 점촌을 거쳐
차츰 북진하며 피난민들도 뒤따른다.
전쟁으로 논밭에까지 우거진 잡초,
부서진 탱크와 트럭의 잔해, 탄피,
곳곳에 인민군 병사의 주검······.
그러나 적군으로 불리던
그들은 바로 같은 피를 나눈
내 형제, 내 동포가 아닌가. 이 때
국군의 뒤를 따르던 조지훈은 다부원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뒤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
'한 달 농성 끝에 나와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도 없고 바람만 분다.
시인 구상은 국방부 정훈국 서울지구 보도대장의
직분으로 정훈 장교와 사병을 대동하고 인천에 도착한다.
난리통에도 용케 남은 인쇄소를 한 군데 찾아낸 그는
국방부가 전시물로 뿌리던 『승리』를 『승리일보』라는
이름으로 개칭, 임시 전선 신문을 창간한다.
9월 23일, 그는 미군 지프에 몸을 실은 채
아직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인천과
서울 시내에 전선 신문을 뿌려댄다.
그의 이런 행동은
잔류 시민들에게
수복을 미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전선 신문을 본 시민들은 반신 반의하면서도
초조감과 기대감 속에서 국군과 미군을 기다리게 된다.
드디어 인천 상륙 작전에 이어,
9월 28일 국군의 서울 수복과 함께
인민군은 북으로 도주한다.
한편, 모란의 시인 김영랑은
6·25가 터진 뒤 동료의 집
지하실을 오가며 피신해
목숨을 부지하나, 9·28수복
직전 길에 나섰다가 아군과
적군 사이에 오가는
총탄을 맞고 참사.
이 와중에 이광수 김동환 김억 김진섭
홍구범 김기림 박영희 등은 납북된다.
6.25 직전 보도연맹에 가입해
남한정부에 충성을 다짐한
정지용 설정식 이용악
박태원 현덕 양운간 등은
임화 김남천의 조선문학가
동맹을 따라 월북한다.
또,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이흡은
국군에 의해 살해되며 빨치산 문화공작대 일원으로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은뒤 간신히
무기로 감형되어 6.25직전까지 감옥에 있던 유진오는 실종된다.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폭격을 맞아 콘크리트 뼈대만 남기고
주저앉은 건물들······. 그 폐허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영양 실조의 얼굴에 웃음을 담아낸다.
이윽고 광화문과 종로며 명동 거리에
구호 물자 속에서 고른 낡은 트렌치 코트를
걸친 문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이들은
“아아, 너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또는
“아, 그 사람 아깝게 갔어······.”라는
생사 확인으로 첫 인사를 나눈다.
이들은 임시로 만든 바라크 찻집에서
실존적 표정으로 문학을 대신하거나,
폐허 주변을 따라 늘어선 노천 주점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아직 실감나지 않는
가족과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살아남은
감동을 나누기 위해, 그러나 여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을 씻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잔을 기울인다.
.
수복 직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에
남아 있던 문인들의 부역 행위에 대한
사법 처리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며
전시 문단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부역 작가’ 명단을 작성해줄 것을
문총에 요구하고, 문총은 문협 자체의
문인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심사에 들어간다.
검사 오제도와 정희택의 지휘 아래
심사 위원으로는 김종문과 최태응
등이 임명되며, A급은 총살, B급은 장기형,
C급은 단기형, D급은 훈방, E급은 무죄라는
5단계 처벌 방침이 정해진다.
문인들로 심사 위원이 짜인 만큼
가장 눈에 띈 시인 노천명 정도가
한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진정서를 내서
풀려날 뿐, 대부분의 문인들은 D와 E급으로
분류되어 처벌을 면한다. 그러나 이 사건 처리와
관련해 싹튼 도강파와 잔류파 문인 사이의
감정 대립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10월 10일, 전쟁 때문에 흩어졌던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문총 주최로
단결과 반공 의식의 강화를 위한
‘민족 문화인 총궐기 대회’를 갖는다.
며칠 뒤인 10월 18일,
전쟁 발발 직후 많은 시민을
서울에 남겨둔 채 남쪽으로 달아났던
이승만 대통령이 민족 통일 과업을 당장에
이룰 듯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고 평양역
광장을 메운 군중 앞에 나타난다.
이 무렵 피난지에서 돌아와
제헌 국회 의원이었던 아버지가
납북된 것을 안 조지훈을 비롯해,
이북이 고향인 최태응 등은 평양으로
달려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숨죽인 채
지내던 박남수 · 김이석 · 원응서 · 오영진 ·
장수철 · 양명문 등을 만나 ‘평양예술연합회’를
결성하고 남북 문화인 교류를 결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달아오른 분위기는
두 달도 채 가지 못하고 식어버린다.
추위가 엄습한 12월 4일, 평양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수십만 인민지원군이 밀려든다는
풍문과 함께 유엔군의
철수 소식이 전해진다.
갑자기 평양 시내는
혼란으로 술렁거리고
많은 시민이 피난길에 나선다.
그러나 헌병사령부와 미군은
저희는 철수하면서도 평양
시민들의 피난을 한동안 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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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때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미아리고개에서 국군과의 치열했던 공방전.
3개월 후 9,28 서울 수복 때 쫓겨 가던 북한군.
북한군은 미아리고개 넘어 퇴각하며
많은 애국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간 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한 많은 미아리 고개’
한과 슬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
대중가요가 나와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957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음반 발매
한국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작사자의
경험이 창작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 고개는 1964~1966년 도로 확장공사.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는 고개
'미아제7동 불당골 미아사' 절이 동명 유래.
일제가 미아동 공동묘지 조성 후., 미아리고개
원래, 이 고개 이름은 "되너미고개"
병자호란 때 되놈 들이 넘어 왔다가
넘어 갔다고 해서 "되너미재","적유현"
"호유현" ~ "돈암동고개" ~ "돈암현"
이 고개는 여러 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폭도 넓어졌지만
옛날에는 몹시 험준했다.
전쟁 관련 가요의 대표작인 동시에
작사가 반야월의 대표작으로도 인정되어
1996년 서울 성북구에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세월이 가면 - 노래 박인희
뚜아애모아
1946년생 이필원
1945년생 박인희.
.
낡은 청바지에 통기타를 둘러매고 거리든
캠퍼스든 산야든 나서기만 하면 통기타음악이
그대로 낭만이 되던 1969~1970년대 시절이었다.
그당시 좋은 음향시설과 객석을 갖춘 것도 아닌데
그 시절 젊은이들은 풋풋한 통기타음악에 매료되어
자신의 감성을 흥건히 적시며 자유와 낭만을 갈구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젊음을 한껏 발산할 수 있는
매체는 그때 그리 흔치 않았다.
그 시절, 규제와 억압이 정도를 넘어섰고
생활이 그리 여유롭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트로트 일변도의 음악에서 벗어난 이미지
산뜻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이.,' 포크 음악'.
1970년대 등장했던 소위 포크 1세대가수로 불리는
김도향, 송창식, 이필원, 박인희, 한대수, 양희은 등
그들의 음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았고
이른바 386세대들의 가슴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젊은 날을 회억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로
당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며
전설적이라 할 멋진 하모니를
들려주었던 '뚜아에무아' 음악을
우리는 아직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운 사람끼리',
'썸머 와인', '제네파 주네파',
'약속', '스카브로의 추억', '세월이 가면'
'님이 오는 소리' 등.
짙은 우수가 어린 애상적이며 감미로운 감성을 지닌
이필원의 음색과 순수하고 청아한 지성적 매력을 지닌
박인희의 음색이 신비스럽고 묘한 조화를 이루던 뚜아에무아
1집 음반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며 젊은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2,3집 음반이 연이어 출시
풋풋하고 고운 그들의 음악은 지금까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설적 하모니로 평가받고 있다.
이필원·박인희씨는 데뷔 무렵
한양대와 숙명여대에 재학 중.
이들은 청소년시절부터 제각기
촉촉한 문학적 감성을 지녔기에,
번안곡이 대부분이던 그때 그 시절
보기 드물게 작사와 작곡이 가능했던
싱어송 라이터이자 국내 최초의 포크혼성
듀엣으로 우리 가요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이런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특유의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절묘한 천상의 하모니로 1971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
중창부문 가요 대상 등 4개 부분의
상을 휩쓸 만큼 실력과 인기가 대단했다.
뚜아에무아가 인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풋풋한 순수함에 있었다.
겉치레가 승리의 깃발처럼 나부끼는 세상일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지난날의 가식 없는 순수함.
이런 관점에서 보면 뚜아에무아 음악은 갓 세수한듯
화장기 없이 맑은 오월의 신록을 닮았기에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늘 우리들 가슴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젊은 날
고운 수채화처럼 더욱 아련히 가슴을 물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1972년 그들은 방송활동 등
개인의 사정에 의해 팀을 해체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서로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졌을 때 다시 만나 음반 한 장
낼 것을 약속한채 각자 솔로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이필원씨는 '고독', '소녀', '추억',
'나그네', '바람아 실어가라' 등 주옥같은
곡을 솔로음반으로 발표하면서 음악활동.
1974년 당시 인기 절정의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와 <6시의 희망곡> 진행
DJ로 그의 영역을 넓혀 더 많은 팬을 확보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자신의 집에 전문 녹음시설을 마련
영화음악·TV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음악을 제작하는 등
음악인생 끈을 놓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 나갔다.
1984년 한국방송대상 음악상을 수상
보다 넓게 그의 음악적 역량과 입지를
굳히며 알곡 같은 음악 인생을 살았다.
그는 일본에서 고교시절을 보내며
신디사이저 음악을 익혀 우리나라에
신디사이즈 음악을 보급한 선구자였다.
실제로 신디사이즈 음악을 발표한
경음악집은 당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필원은 꾸준히 음악창작을 계속하면서
보다 완성도 높은 음악을 꾸준히 갈구했지만,
가수로서의 생명인 음반은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76년 당시 국내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바람꽃>이라는 첫 시집을 발표햇다.
그의 감성적인 음색이 그가 진정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나타난 것이란 사실을 이 시집으로 대변.
이후 그는 꾸준히 음악과 문학 창작을 해오다
2008년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모아 <내 영혼이>라는
동명의 타이틀로 각각 두 번째 시집과 9번째 음반을 발표.
그의 살아온 발자취를 뒤돌아보면
'국내 최초' 수식어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국내 최초 혼성 포크듀엣'이고,
둘째는 '국내 최초 시집을 펴낸 시인 가수'
셋째는 '국내 최초의 포크싱어송라이터'이다.
...............뚜아 에 무와(Toi Et Moi)..................
'1970/80년대 우리나라 최초 유일 혼성 포크 듀오.'
남녀의 화음을 선율로 승화시킨.,'이필원 & 박인희'
높은 인기를 누리며, <썸머와인>, <그리운 사람끼리>
등 주옥 같은 히트곡들을 남겼던 '노래하는 시인(詩人)들'.
'김민기' 등장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은
외국의 히트곡을 번안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뚜아 에 무와'는 거의 자작곡을 불렀던 점에서 구별.
남성 솔로나 남성 듀오가 대부분이던 포크계에서
혼성 듀오를 이뤘다는 점도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이필원.
이태원 거점으로 '미키즈', 타이거즈(Tigers),
미도파스(Midopas) 등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연주자.
당시 박인희는 미도파 음악 살롱 MC,
우연하게 타이거즈 멤버였던 이필원과
<Let It Be Me>를 부르며 밪춘.,첫 호흡.
두 남녀의 화음에 감탄한 음악평론가 이백천.
그의 주선으로 뚜아 에 무와가 결성되었는데,
팀 이름은 프랑스어로 '너와 나'라는 의미이다.
자비를 들여 만든 첫 음반은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이후 황우루와 손잡고 내놓은 음반들이 줄줄이 히트
1970년 내놓은 1, 2, 3집 모두 재판을 찍어낼 만큼 히트.
1971년에는 각종 가요대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며
번안곡 <썸머와인> , 이필원 곡 <추억> 등 히트 대행진.
그러나, 혼성 듀오 특성 상
매스컴의 과도한 관심을 받아
신문에 스캔들 기사가 실리면서
뚜아 에 무와는 파국을 맞게 된다.
순수하게 음악으로 결합된 혼성 듀엣.
여가수 박인희는 결혼 후에도 계속 활동.
연습실이 없어 둘은 경복궁 벤취에서 연습.
그것이 매스콤의 과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박인희가 홀로 라디오 DJ를 맡게 되고,
각자 솔로 앨범을 발매하면서., 사실 상 해체.
두 사람은 백발이 된 이후 다시 만나자고 약속.
그후, 1981년에 박인희는 미국으로 이민.
음반으로 만 접할 수 있는.,그녀의 목소리.
.......................................................
가수 박인희에게는 2가지 오해받는 사실이 있다.
첫번째가 박인환의 친척(여동생, 딸 등)이라는 루머.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이
박인희의 노래나 시 낭송 등으로 유명해지면서,
둘은 친척 관계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둘의 이름이 비슷하고
박인희가 박인환 시를 좋아했을 뿐,
실제로 두 사람은 친척관계가 아니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에
당시 경향신문 기자(훗날 극작가)
이진섭이 곡을 붙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진섭(李眞燮, 1922 ~ 1983)........
방송극 작가·저술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회학과를 수료, 합동통신·
서울 중앙방송국 ·서울신문· 세계통신 등에서 활약.
1955년 경향신문사 조사부장·문화부장 역임
1957년 안양 촬영소 전속 작가로 활약하였다.
1962년 다시 경향신문사 부국장 겸 기획위원.
1965년 대한 공론사 편집위원을 역임.
1973년 이후 KBS 심의위원으로 근무.
1958년 연속 방송극 '장미빛 인생' 극작가.
이어 《삭풍의 노래》, 뮤지컬 《사랑의 도표》
《8월의 노래》 《10월의 노래》 등을 발표.
............................................................
그후 '세월이 가면'은
1969년 가수 박인희 노래로
1970년대 대중들에게 널리
폭넓게 사랑 받게 되었다.
.
............박인희(朴麟姬, 1945년 ~ )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방송인이다.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 방송인으로 재능을 떨쳤다.
차분하고 청아한 음색의 소유자로 히트곡 〈목마와 숙녀〉,
〈모닥불〉,<방랑자><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
이해인 (수녀)과는
풍문여자중학교 동창
.............................
이해인 박인희
풍문여고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두 사람
훗날 한사람은 수녀가 되고
훗날 또 한 사람은 가수가 된다.
이해인 수녀 & 가수 박인희
한때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LA 미주 한인방송 제작국 국장,
1989년에는 이해인 수녀와 함께
수필집을 내기도 했던 가수 박인희.
박인희는 숙명여대 3학년 재학 중에 지은 시
'얼굴'은 후에 '한국의 명시집'에 수록되었다.
2016.4. 29
절제된 감성과 시적 낭만
박인희 35년 만의 콘서트.
35년 만의 컴백이지만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의 청아한 음색은 변함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고 세월의 기품이 서린 그 음색.
29일 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컴백 공연., '그리운 사람끼리'
공연 제목 '그리운 사람끼리'는 자신의 히트곡
제목이자 35년의 그리움을 그대로 담아낸 제목.
120분 동안
'하얀 조가비', '겨울 바다',
'추억 속의 스카브로', '세월이 가면'
등 12곡을 들려줬고 또한 자신의 자작시
'얼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권대웅의
'달 포장마차' 등 애송 시(詩)를 낭독하였다.
히트곡 '모닥불' 하모니카 선율이 울려 퍼지며
무대에 오른 박인희는 자신이 대학교 1학년 때
지은 시 '얼굴'을 낭송하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다.
35년 만에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은 팬들" - 박인희 -
1천500여 명 관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969년 이필원과 국내 최초의 혼성듀엣
'뚜아에무아'로 데뷔해 '약속', '세월이 가면'
등의 히트곡으로 사랑받았고 1972년 결혼 후
솔로로 전향해 1974~1976년 6개의 앨범을 발표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라디오 DJ로 다양한 활동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팬들 곁을 떠났던.,박인희.
그는 '봄이 오는 길' 등 히트곡을
절제된 감성으로 부르면서도 풍부한
시적 감수성으로 관객 팬을 사로잡았다.
이날 공연에 가수 송창식이 출연.
무대에 오른 송창식은 박인희와 함께
'그리운 사람끼리'를 불렀고, 기타리스트
음악인 함춘호와도 환상의 호흡을 맞췄다.
송창식은 '한 번쯤', '왜 불러',
' 우리는', '맨 처음 고백', '나의 기타 이야기' ,
'푸르른 날' 등을 열창해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다시 무대에 오른 박인희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낭독
이어 '세월이 가면'으로 변함없는 가창력.
촉촉한 감수성과 문학적 낭만이 넘치는 공연.
박인환 시인은
프랑스 시인이자
문화 비평가이며
영화 감독이기도 한
장 콕토를 선망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박인환 이정숙 부부
“혹자는 ‘주인이 서점에 없고 장사는 안 되는데다
책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아닌 문학청년들이 모여
떠드는 소굴’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마리서사 진열책
대부분 아버지가 보유하던 외국문학 서적이라 했고요.
아버지와 절친했던 시인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빌어,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 구별이 없던
몽마르뜨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지요.
아버지는 문우들과 모여 저녁을 먹더라도,
자기가 밥값을 내고 싶어했어요.
책 판 돈은 대개 그렇게 나갔어요.”
.....
.....
박인환 시인은
서점 손님으로 왔던
이정숙 씨를 알게 되어
마침내 약혼하기에 이른다.
서점은 영업부진으로
몇 년 안 가 문을 닫지만
시인은 반려자를 찾은 셈.
“두 분은 마리서사에서 처음 만나셨어요.
여성잡지사 기자였던 어머니의 사촌언니
(이석희)와 누구를 병문안 가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렀대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쪽방 같은 곳에서
여름 모시옷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나와 자리를 권하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해요.
두 분은 많은 시간을 명동에서 보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시의 첫 독자였어요.
시를 쓰면 꼭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렸습니다.
또 그 무렵 개봉하던 영화는
거의 모두 보았다고 하고 두 분이
명동에 나타나면 문우들이 ‘한 쌍의
학(鶴)과 같다’고 말했대요.”
광복 후 미 군정 시절 MPEA
(미국 8대 메이저들의 외국배급
카르텔) 한국사무소가 1946년 생겼다.
정식 명칭은 중앙영화배급소.
이곳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배급.
한국영화는 연간 4~5편에 불과했다.
당시 이정숙의 사촌언니
이석희의 남편 임동규씨가
중앙영화배급소에 재직했다.
그가 박인환에게 시사회 초대권이나
개봉관 표를 두 장씩 자주 주었다 한다.
박인환·이정숙
두 커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충무로 바닥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생전 많은 영화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는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요.
당대 문인처럼 서양문물을 체감한
유학파도 아닌 분이 어떻게 첨단의
모던한 현대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저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돼요.
항간에는 아버지가 경기중학교를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 자리에 있던
부민관에서 영화를 보다 선생님에게 들켜
퇴학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 이모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학창시절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열면 외국영화 포스터가 두루룩 굴러 나왔대요.”
1948년 5월에 결국 두 사람은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시인 박인환 & 이정숙' 커플.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결혼 날짜가 잡히면 함이 오잖아요.
사주단자에 적힌 아버지의 실제 나이가
어머니보다 1살 밖에 많지 않은 거예요.
그동안 아버지는 당신 나이보다
5살 많게 얘기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두고 처가가 실망을 하고
두 분이 티격태격했는데 당시 우리 집
뒤편으로 꽤 깊은 개울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화가 나서 물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셨대요.
그러곤 유리병으로 자기 손을 확 찍더라는 겁니다.
1948년 이른 봄.,결혼식
감추려 했지만 몇몇 결혼식 사진에는
흰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나와요.”
‘마리서사’
박인환의 서점
그 이름은 독특하다.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일부 문인들은 ‘마리’라는 명칭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 안자이후유에(安西冬衛)가 31살 때
출간한 첫 시집 《군함 말리》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말리(茉莉)란 외래종 떨기나무의 일종.
당시 말리를 일본에선 ‘마리’라 불렀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도 훗날 “박일영(朴一英)이란 화가가
‘서점 상호를 시집 《군함 말리》에서
따 준 것’이라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장남 박세형씨는
다른 설을 제기했다.
“아버지는 프랑스 여류 예술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좋아하셨는데 그분의 이름 ‘마리’와
관련있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과 교우(交友)하신 분입니다.
자유로운 환상과 감상을
화폭에 담은 독특한 화가였다고 해요.
저나 어머니는 《군함 말리》보다
‘마리 로랑생’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박인환의 사후 20주기가 된 1976년 후손들은
생전 아버지가 펴낸 《선시집》(전체 54편)에다
이후 발표된 시, 미발표 유작(遺作), 첫 시집에서 빠진
이전 시들을 더해 시집 《목마와 숙녀》(61편)를 펴냈다.
“본래 첫 시집 《선시집》은 한정판으로 나왔었는데,
그 후 화재로 절판돼 시중에서 보기가 어렵게 됐어요.
물론 월간지, 문학지 등에서 아버지의 시 일부를 초록(抄錄)
전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렇게 거의 모든
시편을 묶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전 어머니에게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시집이 잘 나갈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게 어쩌면 현실화됐습니다. 《목마와 숙녀》가
10만 부 이상 팔렸으니까요. 자식들 결혼할 때
인세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시집장가 갔으니 말이에요.”
—많은 시 중에서 시집 제목을
왜 ‘목마와 숙녀’로 정했나요? -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도입부가 리드믹하지 않습니까. 그 시 속에 뭔가 많은 그림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1971년인가 72년인가
박인희라는 가수가 낭송을 해 크게 알려진 후였어요.”
박인희의 감성적 목소리에 실린
목마와 숙녀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유신(維新)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했다.
당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중략)’에서
뭔지 모를 멜랑콜리한 슬픔에 전 국민이 젖어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명동쌀롱’에 모인 예술가들이 박인환의 시에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붙여 소위 ‘명동 엘레지’로
알려진 시가 〈세월이 가면〉이다.
1950년대 명동의 주점
〈은성〉에서 탄생한 것.
1958년 가을, 명동의 막걸리집
‘은성’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술집 주인 이명숙(86년 작고)의
18세 외아들이 서라벌예대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던 시인 변영로
(1897~1961)가 술잔을 내밀었다.
“영한아, 술 한 잔 받아라.” 쭉 들이켠 뒤
막걸리 잔에서 술 지게미를 바닥에 털던
영한에게 시인이 냅다 뺨을 갈겼다.
“이놈, 곡식을 왜 버려?”
영한은 연기자 최불암 본명.
그의 부친 최철은 영화제작자였는데
1948년 영화 '수우'의 개봉 시사회를
앞두고 과로로 세상을 뜬다.
어머니는 대한제국 궁내악사를 지낸 분의 딸로
남편을 여읜 뒤 인천 동방극장 지하에 ‘등대’란
음악다방을 운영하다가 명동으로 와서 ‘은성’을 차린다.
단골이었던 소설가
이봉구(‘명동백작’)는
이곳 풍경을 작품 속에 남겼다.
1956년 3월 저녁 ‘은성’에 앉은
박인환(당시 30세)은 시를 쓰고 있었다.
쌓인 술빚이 미안해서 시라도 써서 갚자는 마음이었을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 년이 넘도록 가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
...............
언론인 극작가였던
이진섭(1922~83)이
곡을 붙인다.
‘백치 아다다’의 가수
나애심(가수 김혜림의 모친)이
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나중에 들어온
테너가수 임만섭이
곡을 보더니 열창을 했다.
이날 낮에 망우리
첫사랑 여인의 묘지에
다녀왔던 박인환은 이 시를 남기고
사흘 뒤 만취한 상태로 숨져
망우리 그녀의 곁으로 갔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나서
한동안 흥분으로 세월을 보냈다.
부지런히 원고도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살 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는 임궁재 등과 함께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 완성 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가지고 당시 단성사에서 상영 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케서린 햅번' 주연의 '여정'을
보고 싶었으나 호주머니가 비어 못 보고
'세월이 가면'을 애처롭게
술집에 앉아 불렀다.
.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에게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박인환은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향년 29세
아까운 인생을 마감.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도 못 찾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지 못하여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친구 송지영이 감겨주었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못 사주었다면서
김은성이 조니워커 한 병을
죽어 누워 있는 박인환의
입에 부었고 다들 울었다.
그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후배들이 따랐고
공동묘지까지 따라 온
친구 정영교가 카멜담배와
조니워커를 그의 관 위에
부어 주었다.
.
모윤숙 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송 하였고
친구인 조병화 시인이
조시를 읽었다.
"인환이 너 가는구나
대답이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있는 시를 쓰고..."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중략).
.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씨 어머니가 주인.
곡은 박인환의 절친인 이진섭이 만들었다.
“시는 말이죠, 영감이 떠오르면 후닥닥 금방 쓰잖아요.
굳이 퇴고를 안 하죠.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씁니다.
그런데 작곡은 달라요. 시어에 맞춰 작곡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시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세월이 가면〉
악보를 본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됐나요?
세종로 집으로 아버지와 이진섭 선생이
왁자지껄하게 오셨는데, 그날 8절지 도화지에
〈세월이 가면〉이 적혀 있었는데 좀 특이했어요.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음표는 없고,
아라비아 숫자가 잔뜩 있었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음표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미·솔’ 하면 ‘1·3·5’라는 식으로….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으셨어요.
〈세월이 가면〉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불렀으리라 추정해요.
왜냐? 제가 어렸을 때 사랑채에서 두 분이
함께 불렀던 샹송이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어떤 샹송인가요? -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라모나’라고 하는 노래였어요.”
그는 샹송의 리듬을 콧노래로 불렀다.
“요절 시인의 시가 지금도 회자하고,
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명동을 활보할 당시 다 어렵고
참혹하던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불행하게 가셔야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결국 아버지는 불행한 시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아버지 시를) 좋아하고,
그 감정을 행간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된 뒤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양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경상도집’에
문인 몇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1956년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한다.
나애심은 노래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자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거기에 시를 써내린다.
이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李眞燮)은 그의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낸다.
나애심은 이렇게 나온
악보를 들고 마디마디
노래를 이어간다.
...............나애심........................
1930년 9월 5일 ~ 2017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가수 겸 영화 배우이다.
본명 전봉선.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1949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1953년 노래《밤의 탱고》 가수 데뷔
1955년 《미망인 (과부의 눈물...)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그 노래가 바로
이런 가사로 된
「세월이 가면」
이다.
한 시간쯤 지나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테너 임만섭과 명동 백작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봉구가
새로 합석한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에 명동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술집 앞으로 몰려든다.
박인환은 아버지의 권유로 들어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해방 뒤 바로 그만둔다.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아버지와 이모로부터 꾼 돈 5만 원으로
시인 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20평 남짓한 서점을 넘겨받는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그는 이내 서점의 문을 다시 연다.
이 서점이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본거지로
떠오르게 되는 ‘마리서사(茉莉書肆)’다.
서점 이름은
일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딴 것이라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은
박인환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윽고 마리서사는 문학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으로 자리잡는다.
이 서점에는
앙드레 브르통 ·
폴 엘뤼아르 · 마리 로랑생 ·
장 콕토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과
『오르페온』 · 『판테온』 · 『신영토』 ·
『황지』 같은 일본의 유명 시 잡지들이 진열된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인과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든다.
시인 김광균 · 이봉구 · 김기림 · 오장환 ·
장만영 · 정지용 · 김광주, 몇몇 소설가,
‘신시론’ 동인 김수영 · 양병식 · 김병욱 ·
김경린, ‘후반기’ 동인 조향 · 이봉래,
화가 최재덕 ·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 손님이 된다.
특히 김수영과 박인환은
또래인지라 함께 어울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이라는 동인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쌓는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박광선(朴光善)은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면사무소 직원이었다.
땅도 꽤 있어서 어릴 적 그의 집은
시골 살림치고는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이
머리가 좋고 똑똑한 것으로 드러나자,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둔다.
그의 아버지는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기는 한편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한 뒤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에 진학한다.
이 무렵 그는 영화와 문학에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 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을 탐독하느라 밤을 새우곤 한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드나든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한다.
그는 중학 졸업 뒤 아버지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로
3년제 관립 학교인 평양의학전문대학에 들어가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다.
헌칠한 키에 얼굴도 잘생긴 박인환은
당대의 문인 가운데 최고의 멋쟁이,
‘댄디 보이’였다.
여름에도 정장 차림을 하던 그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냐?” 하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는 땅바닥에 끌릴 듯이
긴 외투를 입고 친구들 앞에 나타나서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
하고 의기 양양하게 지껄인다.
러시아의 시인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에 입었던 외투를
사진에서 보고 미군용 담요로
본떠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시인 김차영은 이렇게 돌아본다.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검정 박쥐 우산,
봄 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 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
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몹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잔 같이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보이곤 한다.
수주 변영로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문단 선 · 후배들이 함께 있던
어느 영화 시사회장에서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평론가 백철을 향해 “어이, 백철 씨! 저걸 알아야 돼.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하고 일갈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박인환은 마리서사의 단골인
『국제신보』 주필 송지영의 도움으로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선보이고,
이듬해에는 『신천지』에 시 「남풍」 등을 내놓아
‘신세대 시인’으로 문단에 나선다.
6·25 직후 미처 피난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하 생활을 하며 혼쭐이 난 박인환은
9·28수복 뒤 『경향신문』에 들어가
신문사 소속 종군 기자로 활동하던 중
1951년 1·4후퇴를 맞게 되자
누구보다도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피난지에서 『경향신문』의 종군 기자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김경린 · 이봉래 · 조향 ·
김차영 등을 모아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다.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발표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등 그는 피난지에서도
도전적인 글들을 내밀며 기성 문인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박인환이 이렇게 동인 활동을 펼치는 동안
지난날 ‘신시론’에 같이 있던 친구 김수영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김수영 시인 & 박인환 시인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
김수영 시인과 여동생 김수명.
..........김수영 시인.................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 이주
그곳에서 교원생활과 연극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 중퇴.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북한군 징집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그뒤 미군통역생활,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으나,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
그의 작품 활동은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
임호권(林虎權)·양병식(梁炳植)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이 때의 시들은 「공자의 생활난」
(1945)·「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
「아메리카타임지」(1947)·「웃음」(1948)·
「이[虱]」(1947)·「토끼」(1949) 등이 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탐닉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전진로를 개척하려고
한 점에서 서구취향 모더니스트 자기극복과정을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수록된 대표적 작품들은
「달나라의 장난」(1953)·「헬리콥터」(1955)·
「병풍」(1956)·「눈」(1957)·「폭포」(1957) 등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19혁명.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이 때의 대표작품으로
「푸른 하늘을」(1960)·
「후란넬저고리」(1963)·
「강가에서」(1964)·
「거대(巨大)한 뿌리」(196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엔 카운터지(誌)」(1966)·
「풀」(1968)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제1회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죽은 뒤 출판된 시집으로는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
『퓨리턴의 초상』 등이 있다.
저서·역서로는
『20세기 문학평론』
(柳玲·蘇斗永 共著, 1953)·
『카뮈의 사상과 문학』
(김붕구 공역, 1958)·
『현대문학의 영역』
(Tate, A. 원저, 이상옥 공역, 1962)
등이 있다.
.............
김수영 시인
온갖 고생 끝에 뼈만 남은
몰골로 나타난 김수영을
모두 반가이 맞지만,
박인환과 김수영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게 된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늘어놓는
현란한 언어와 유행병에 걸린 듯한
그의 취향을 곱게 봐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루는 김수영이 박인환의 글 가운데
한 낱말을 가리키며 무슨 뜻이냐고 묻자
박인환은 “응, 이건 네가 수용소에 있을 때
새로 생긴 말이야.” 하고 천역덕스럽게 대꾸한다.
이런 일은 김수영뿐 아니라 이봉래 · 김경린 등
박인환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한두 번씩 겪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그게 본디 박인환의 특성이려니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반면, 남달리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수영은 모멸감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나중에 김수영은 박인환을 두고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는 거친 말을 내뱉기도 한다.
김수영은 진보주의자이자
서양적인 새로운 것에 마냥 쏠리는
박인환을 취향이 경박하며 겉멋에 치우친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붙인다.
이에 맞서 박인환은 김수영을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헐뜯는다.
1952년 박인환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처삼촌의 주선으로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대한해운공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어떠한 날까지」 ·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을 쓴다.
환도령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1955년 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일보』에
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와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詩抄)」
등을 발표한다.
얼마 뒤 대한해운공사에서
퇴직한 그는 한동안 시에만
신경을 쓴다.
이렇게 매달린 끝에 같은 해 10월
그의 첫 단독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이 나온다.
첫머리에 ‘아내 정숙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들어 있고
총 4부 56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대표작이 거의 다 실린다.
한때 그가 ‘신시론’과 ‘후반기’ 동인의 결성에 앞장서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기는 하지만, 이 시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를 모더니스트로 보기 거북하게 만들 만큼 서정성이 짙게 묻어난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목마와 숙녀」만 하더라도 ‘버니지아 울프’라는
낯선 외국 작가로 말미암은 이국적 분위기와 ‘목마’라는
낭만적 요소를 묘하게 섞어 슬픔에 물든 생각을
잔잔하게 흘리고 있는 서정시다.
여기서 시인에게 인생이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며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목마와 숙녀...............
이시는 6·25 전쟁의 체험을 통해
시인이 느낀 문명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절망과 좌절을 형상화한 작품.
이 시는 전체 분위기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1행)에서는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화자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부정적
의미의 서술어와 결합함으로써 화자가 마주선
허무와 절망을 보여주면서 시의
감상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두 번째 부분(12~25행)은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해야 한다'는 당위적 종결법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위나 결단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
이는 작가가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삶의 지표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극한적인 절망과
비애의 감정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26~32행)은
절망적 현실과 인생에 대한
페시미즘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시적 화자가 인생을 돌아보고,
체념적 상황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비관적 태도를 극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愛書家)이기도 하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품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가지고 다녔다.
박인환은 한국일보사에 다니던
시인 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오석천 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그가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에 놓인
경제나 정치 서적까지 슬쩍 집어가곤 한다.
인생을 통속적인 대중 잡지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시인 박인환은 누구보다도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 17일 오후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상의 생애와
문학을 기리며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댄다.
그와 가깝던 문우의 증언으로는,
죽은 이상(李箱·1910~1937)의 기일
(忌日·3월 17일)을 기해 사흘 동안
술을 마셨고, 죽던 그날도 화가 김훈이
사 주는 자장면을 한 그릇 먹었을 뿐
빈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염상섭·박종화·현진건 같은
당대 주호(酒豪)가 아니라 그저
풋술을 즐기던 여린 시인이었다.
.
술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
라고 적힌 쪽지를 준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그는 쪽지를 건네며
무슨 예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씩 웃는다.
20일 밤 잔뜩 취해
세종로 집에 돌아온 그는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유언처럼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그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한 것일까.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세종로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주검을 망연히 바라본다.
그 치뜬 눈을 송지영이 감겨주고,
다른 친구 하나가 그의 주검에
조니워커를 붓는다.
.......송지영(1916~1989).........
1936년 ≪신동아≫와 ≪신가정≫
수필 또는 기행문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 동아일보 입사, 1938 만주특파원
1940년 중국 상해시보(上海時報) 기자.
중국 난징(南京) 중양대학 재학중이던
1943년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3년 만에 중퇴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선고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감, 8·15광복 후 출소.
1946년 한성일보 편집부장이 되었는데,
당시 한성일보는 안재홍(安在鴻)이 사장
동아일보와 함께 대표적인 우익신문으로
반탁(反託)에 앞장섰다. 이 무렵부터 소설가로서
작품활동을 병행, ≪백민≫에 '젊은날의 노래' 발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역임
1948년 8월 당시 중앙 5대신문 하나였던
국제신문 주필을 맡았다가 이듬해 3월 필화로
폐간되자 태양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옮겼다.
1950년 피난수도 부산에서 발행되던
국제신문 논설위원, 1956년 희망사 주간
1959년 4월부터는 조선일보 논설위원,
9월부터는 편집국장이 되어 곧이어
일어난 4·19혁명을 겪었다.
1961년한국전통사(韓國電通社) 사장에 취임
그해 2월 13일에 창간된 ≪민족일보≫ 와
관련을 맺었다 하여 5·16군사정변 직후 구속
1961년 8월 혁명재판소에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를 비롯,
안신규(安新圭)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조용수는 그 해 12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송지영과 안신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의 감형을 위해서 문단과 언론계 인사
104명이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진정서
재판부에 제출하였고, 일본에서도 평론가·
작가·문인 등이 ‘3명의 한국언론인
구출동지회’를 결성하여 서명운동.
1969년 7월 8일에 출소하여
1972년 2월 조선일보 논설위원
1979년 문예진흥원장에 취임하였다가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당)을
역임한 뒤, 1984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맡았다.
저서로는 소설집 '청등야화' '천풍' 등이 있고,
1972년 전 7권의 ≪송지영대표작전집≫을 출간
≪우수의 일월≫은 민족일보사건으로
옥중에 있을 때의 경험을 쓴 책이다.
................................................
박인환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어준다.
신시론’과 ‘후반기’ 등 1950년대
문단의 모더니스트 그룹을 이끌며
도시풍 시를 쓰고 숱한 에피소드를 뿌린
‘댄디 보이’ 박인환(朴寅煥, 1926~1956).
......박인환.....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광선과 어머니 함숙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두고는
〈자유신문〉·〈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지하실〉
(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에 지었다는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강원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
'박인환 문학관'
2017.07.01
1950년대
대표 문인
박인환 시인.
.
...................
1950년대 문학
....................
한반도 사람들에게 1950년대는
6·25 곧 한국전쟁의 포성과 함께 열린다.
1948년 남과 북의 권력층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따로이 세워진다.
삼팔선은 남한과 북한의 대립선이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아시아 쪽
경계선이며, 세계의 분단선이 되어버린다.
이윽고,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북녘 김일성은 국토 완정론을 내세우자
남녘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구호로 내건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대규모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가 어렵게 된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매듭 지어진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에서 커다란 비극으로 기록.
이 전쟁은
남 · 북한 인구의 5분의 1인
6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낳는다.
3년 남짓 이어진 이 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집과 공장뿐 아니라,
도로와 철도 및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이
거의 다 파괴된다. 이로 말미암아 휴전 뒤에도
폐허 속에서 가족과 거처, 생계 수단을 잃고 떠도는
살아남은 이들의 절망과 비탄이 오래도록 한반도를 뒤덮는다.
휴전 협정과 함께
포성이 멎지만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다.
주요 교전 당사국끼리
종전 협정 또는 평화 협정을
맺은 적이 아직도 없는 것이다.
6.25 전쟁으로 성장 잠재력을 유실한 대한민국은
이후 정치 · 군사 · 경제 ·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의 지원에 기대게 되며,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남한 정권은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 진영의 최강대국
미국에 예속되는 길을 걷는다.
전쟁이 남긴 상흔과 파행으로 얼룩진 정치,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으로 대한한국 사회는
1950년대 가난과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서민 대중 사이에 현실 도피와 패배주의
정서를 담은 비탄조의 유행가들이 퍼져나간 것도
6.25 전쟁 전후 남한 사회의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이 시기에는 「가거라 38선」 ·
「굳세어라 금순아」 · 「꿈에 본 내 고향」
· 「이별의 부산 정거장」 · 「단장의 미아리고개」처럼
전쟁으로 말미암은 이산(離散)과 이향(離鄕)의 아픔을
반영한 노래 또한 유행한다.
매체가 발달하면서
대중 문화의 싹이 튼 것도
1950년대의 일이다. 이에 따라
외국의 대중 음악도 빠르게 퍼지는데,
그 한 가지 보기가 ‘맘보 음악’이다.
맘보는 음악만이 아니라 춤도 유행되고,
패션에도 영향을 미쳐 ‘맘보 바지’가 나오기도 한다.
전쟁 뒤 한국 사회의 일각에는 미군 PX나 암시장에서
흘러나온 군수품과 밀수품이 범람하고,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대다수 서민과 달리 일부 상류층은 호사와 향락을 누리기도 한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자유 부인」은 춤바람이 난
대학 교수 부인을 내세워 향락과 탈선에 빠진
유한 계층의 행태를 묘사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이 대중 소설은 『서울신문』의
발행 부수를 크게 신장시킬 뿐 아니라,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일약 베스트 셀러에 오른다.
1953년 2월 15일 0시를 기해
대한민국 정부는 화폐 개혁을 선포.
이에 따라 ‘원’ 표시의 통화가 금지되고
‘환’ 표시 통화가 유통되는데, 교환 비율은
1백 원에 1환으로 정해진다. 이윽고 물가가
천정 부지로 올라, 미국의 압력 속에서 단행된
이 때의 화폐 개혁은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900년대 문학
...................
인류가 일찍이 겪은 바 없는
파란과 격동으로 이어진 20세기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개막과 함께 열린다.
파리 샹드마르스공원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
2백 일 동안 5천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밀려든다.
새로 건설된 지하철과 도로를 통해 몰려든 관람객들은
공원을 가득 채운 바로크풍의 전시관들과 아르 누보의 물결에
감동을 받고, 앞날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가슴에 품는다.
만국 박람회장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그 누구인들 20세기가 내장한 격동과 파란,
숨막히는 냉전 체제, 미증유의 살상극인
1 · 2차 세계대전을 내다볼 수 있었으랴!
서구의 한복판에서 화려한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
아득히 먼 극동의 한 작은 나라, 오랫동안 문호를 닫아 걸고 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세계 열강 앞에 따로 준비할 겨를도 없이
자신을 열고 불안과 공포가 어린 음울한 눈빛으로 앞날을 응시한다.
1876년 개항 이후 서구 문물이 밀려들고
봉건적 왕조 체제가 급격히 무너져내리던 이 무렵,
조선의 운명은 거센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마찬가지였다.
밖으로는 미국 · 영국 · 러시아 ·
일본 같은 외세가 국권을 넘보고,
안으로는 봉건 지주와 외래 상업 자본가에게
이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과 의병 일부가 뭉쳐 만든
활빈당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힘을 잃은 왕권은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개화파와 수구파,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세력은 혼란스럽고
소모적인 논쟁을 되풀이한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해 1905년, 병탄을 위한
사전 조치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불평등 조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은 조정 대신들을 매수하고 위협하는 한편,
어전 회의가 열리는 궐내에 무장 헌병들을 들여보내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뒤 일본 행상과 거상들은 드러내놓고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서 값싸게 생산한
면직물 등을 팔고 조선의 미곡을 실어 내가는 구조를
고착시키면서 경제 예속을 빠르게 진행시킨다.
1910년, 조선은 마침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강점된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 거리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을 중추로 새로 정비된다.
경운궁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에 이르는 길과
숭례문 곧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 중심 가로를 이루었는데,
평탄하게 깎은 길바닥에 자갈을 깔고 갓길에는 하수관로를 설치한 뒤
그 위에 여기저기 돌다리를 얹었다.
처음에는 소나 말 · 개 · 닭의 똥오줌을
큰길이나 도랑에 내다버리는 주민이 많았으나
도로가 정비되면서 이런 현상은 차츰 사라진다.
민간용 전화가 처음으로 개통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통신원에서는 재력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입을 권유하나,
전화를 외세의 침략 도구로 생각한 나머지 신청하는 이가 드물었다.
1903년 6월에 들어 인천 앞바다 팔미도에는
나라에서 관할하는 첫 등대가 세워져 밤 뱃길을 밝힌다.
많은 문학사가는 열여덟 살 난 최남선에 의해 『소년』이 나온
1908년을 신문학의 시발점으로 보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중국과 한약재 무역을 통해 막대한 가산을 이룬
거부(巨富)를 아버지로 둔 최남선이 펴낸 『소년』은
우리 나라 최초 근대 문화 잡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
1910년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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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대량 생산 기술의 개발이 이루어진 1910년대는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이 된 연대다.
대량 생산 기술의 개발은
양지와 음지를 아울러 지니게 된다.
인류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대 실현이 양지라면,
고성능 살상 무기의 양산 체제가 미증유의 살상자를 낳은
세계대전은 그 음지다. 세계대전은 러시아혁명의 촉매 인자로 작용하는데,
그 혁명의 내부에는 20세기를 뒤흔드는 ‘격동과 파란의 유전자’가 숨어 있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문호를 연 뒤
드높은 외세의 파도에 휩싸여
움츠리고 있던 우리 나라는
이 연대의 초입에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세계사에 편입된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이 전해지자
국권 상실에 따른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선비들의 순절은 곳곳에서 이어진다.
특히 “문자나 안다는 사람,
인간 되기 어렵구나.”라는 내용의
「절명시」를 남긴 매천 황현의 자결은
나라 잃은 선비들의 슬픔과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우리 나라를 한입에 삼켜버린
일제는 지배 체제를 다지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차린다.
초대 총독을 맡은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穀)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제를 정비해 2만2천 명의 관리를 배치하고,
헌병 경찰 제도로 통치 권력을 장악한다.
데라우치 총독은
아울러 토지 조사 사업에 착수하고
회사령을 선포해 억압과 수탈로 이어지는
무단 통치를 위한 토대를 닦는다.
한편,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피살당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면 살상전으로 번진다.
산업혁명에서 뒤처진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불만을 품은 독일이
국지전을 빌미로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들며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규모의
인명 살상을 낳은 전쟁이 되고 만다.
늘어난 외채 때문에 휘청거리던 일본은
이 대규모 전쟁 덕분에 뜻밖의 반사 이익을 얻는다.
전쟁 특수로 구리 · 아연 · 석탄 채광과 같은 1차 산업이
활기를 띠게 되고, 화학 약품과 염료의 국제 가격이 폭등하며
군수품의 대종을 이루는 면직업에도 주문이 쇄도함으로써,
일본 경제는 갑자기 호황 국면으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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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나라 안에서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쌀의 원활한 유출을 위해 호남평야와
목포항을 잇는 호남선이 개통되고,
대륙 진출을 위한 정치 · 군사적 목적으로
서울에서 철원과 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총 연장 222.7km의 경원선이 잇달아 개통된다.
1917년 이광수는 남녀의 애정 문제를 축으로
전통과 근대의 긴장과 갈등 구조를 풀어가는
새로운 소설 『무정』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 문학 사상 최초로 등장한
장편 소설이자 한국 현대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곳곳에서 피압박 민족의
독립 투쟁이 잇따른다.
우리 나라의 3·1운동을 비롯해
중국의 5·4운동, 간디가 이끈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그 보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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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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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이 땅에서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고,
이에 대한 반발로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가 끊이지 않은 시기다.
무력으로 강토를 점령하고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모조리 장악한
일제의 수탈로 말미암아 기층 민중은
궁핍에 시달리며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처지가 된다.
일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날로 비등점을 향해 들끓는다.
이에 따라 나라 곳곳에서
항일 성격의 소요와 쟁의가 빈발하더니,
1925년 무렵에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황해도 재령군 북률농장에서
동척과 소작 농민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해,
엽총을 쏘는 등 과잉 폭력
진압 사태가 불거진다.
1922년 이후 계속된 재해에 의한 대흉작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농민들이 소작료 감면을 요구하며
납부를 거부하자, 동척은 일본 이민들로 구성된 척식청년단과
어용 소작인 수십 명을 엽총과 몽둥이로 무장시켜 강제 징수에 나선다.
식민지 경제 수탈의 첨병 구실을 한 동척은
이 과정에서 빈농들의 알량한 재산마저 차압하고
소작권을 몰수하는 한편, 쟁의에 앞장선 사람들을 구속한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는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잇달아 실린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워진다.
사설의 핵심 내용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새로 경제 도약기를 맞게 된
일본의 영향력 아래 1920년대에
조선의 토착 지주와 자본가들이
일정 규모의 산업 자본가로 변신하며
정치 권력 분점의 필요성을
제기한 데 따른 주장이다.
김성수 · 송진우 · 최린 등
『동아일보』 경영진과
천도교 일부 세력에 의해
추진된 이 자치 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독립 불능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이는 유력한 자산 계급에게
권력 분점의 이익을 맛보게 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의 약화 또는 포기라는
더 큰 실익을 챙기려는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 부응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내 나라 안에는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동아일보』 불매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다.
깜짝 놀란 『동아일보』는 이 사설의 집필자인
이광수를 퇴사시키고 사장 송진우도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한다.
1923년 6월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이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종로 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서 귀국 독창회를 연다.
1926년 10월 1일에는
종로 단성사에서 나운규
각본 · 감독 · 주연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다.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아리랑」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350석의 객석이
날마다 사람들로 꽉 찬다.
1928년에는 홍명희가 장편 대하 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해
독자들의 사랑을 흠뻑 받는다.
「임꺽정」은 천민 계급 출신의 주인공을 내세워
고유 정서가 배어든 토속어로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 양식을 총체적으로 묘파해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벽초 홍명희는
『조선왕조실록』 ·
『기재잡기』 · 『남판윤유사』
· 『열조통기』 등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이런 문헌에 나오는 일화와 설화를 추슬러
걸작 대하 소설을 써냄으로써, 그가 최남선 ·
이광수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라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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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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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최대 은행인 크레디트 안슈탈트가
돌연 휴업을 선포함으로써 촉발된 연쇄적인 은행
휴업 사태로 국제 금융 부문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세계 경제는 공황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자본주의 경제권을 강타한 대공황이
일본이라고 비켜 갈 리는 없다.
내수 시장이 협소해 일찍부터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던
일본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구미 시장의 무역 장벽 때문에
수출이 어려워지고 경제가 활력을
잃게 되자 일제는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타개책의 일환으로 만주 침략에 나선다.
일본은 이미 만주 지역의 철도와 해운 등
기반 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해놓은 상태였다.
독점 시장을 확보하고 중국 대륙 깊이 진출하려면 만주는
일제가 보기에 놓쳐서는 안 될 전략 요충지였다.
이 무렵 우리 농촌의 살림은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고,
일제의 징세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와 폭동이 꼬리를 문다.
한편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 자본주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풍속이 생긴다.
백화점의 옥상 정원과 다방,
재즈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카페,
산책로와 실내 골프장, 돈을 받고
데이트를 해주는 스틱 걸과
모던 걸이 이런 신풍속도의 일부다.
아울러 눈길을 끄는 것은 동아일보사 ·
조선일보사 · YMCA 등이 주축이 되어
벌인 브나로드[Vnarod(민중 속으로)]
운동의 물결이다. 1929년부터 『조선일보』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기치를
내건 채 문자 보급 운동을 펼치고, 1931년부터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벌임으로써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계몽 운동은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든다.
이 운동으로 함께 먹고 자며
글을 가르치는가 하면,
소비 조합을 세우고
뒷간과 부엌을 개조하기 위해
농촌으로 떠나는 청년 학생들이 줄을 잇는다.
이는 농촌 경제의 피폐화를 배경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적색 농민 조합이
확산되는 것에 맞서 민족주의 계열이
펼친 농촌 계몽 운동이었다.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특별 공모에서 당선한 심훈의
「상록수」는 이와 같은 브나로드 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일제는 1930년대 말엽에 들어
드러내놓고 민족 말살 정책을 편다.
창씨 개명의 강제, 조선어 사용 금지,
일본어 상용 강요 등은 내선 일체
(內鮮一體)로 포장되나, 명백히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의 주요 시행 항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조선문인보국회 같은 갖가지
친일 단체를 만들어 파시즘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이에 따라
여러 문인이 ‘문필 보국’이라는
미명 아래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데 동원된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로
나라 안은 환희와 감격의 도가니가 된다.
1936년 4월, 서울은 구역 확장을 단행한다.
이로써 동대문 밖 신설리 · 청량리 · 신당동 ·
왕십리, 서대문 밖 아현동 · 마포, 한강 이남의
노량진 · 흑석동 · 영등포 등이 시계 안으로 편입된다.
피폐한 농촌을 버리고
흘러드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이 무렵 서울은 인구 70만에
이르는 대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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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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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평화로운 일요일,
전쟁에 광분한 일본의 전투기 183대가
선전 포고 없이 하와이 진주만에 자리잡은
미 태평양 함대 기지를 급습함으로써
미일 전면전이 일어난다.
태평양 함대를 공습해 미군 공격력의 상당 부분을
초기에 괴멸시킨 일본은 아무런 제지 없이 필리핀 ·
미얀마 · 인도네시아 등으로 진격해 잠깐 사이에
동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점령한다.
이후 전선이 확대되고
군수품으로 조달할 물자가
모자라자 일제는 귀금속은 물론이고
놋그릇 · 대야 · 수저와 같은 생활 필수품까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간다.
전쟁의 벼랑 끝으로 몰린
일제의 말기적이며 발악적인 수탈로
우리 농민들의 살림은 거덜나고 만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의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떨어뜨린 원자 폭탄 하나로 인구 34만의
소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다.
사흘 뒤인 9일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일제는
전의를 상실하고 최고 전쟁 지도자
회의를 소집한 뒤 연합군과
항복 협상에 들어간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고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해방의 기쁨으로
온 나라가 출렁거리던 바로 그날,
여운형과 안재홍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이튿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자중과 안정을 요청하고 경거 망동을 금하며
지도층의 포고에 따르라.”는 포고문을 낸다.
같은 해 9월 5일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명의로 포고령 제1호를 발포한다.
“북위 38도 이남은 나의 관할 아래에 있으니 모든 사람은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위압적인 포고문이 말해주듯이
한반도는 곧바로 연합군의
과도기적인 통제를 받게 된다.
정확하게 34년 11개월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우리 민족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군인 · 군속 · 노무자 · 위안부 등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에 동원된 총 2백만 명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사람도 숱하게 생긴다.
전쟁 물자 수급 때문에 온갖 물자를 약탈,
파괴당한 국토는 거의 쑥대밭으로 변한다.
절대 부족한 물자, 불거진 이념 대립,
증폭되는 혼란과 불확실한 미래······.
이런 가운데서도 도처에 방치된
식민지 잔재를 쓸어내고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해방과 함께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은
정치 일선에 나서고, 자고 일어나면
정당과 정치 조직이 새로 나타나는 등
온 나라가 한바탕 정치 열기에 휩싸인다.
이 무렵 김구는 “앞으로 나라를
세우는 일은 임정을 중심으로
미소 등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가운데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여운형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
미소 연합군의 승리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강고한 해방 투쟁을 전개한 결과다.
미소 등 연합국과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주체적 역량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민족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자주 역량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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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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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와 ‘히피’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1960년대를 상징하는 기호들이다.
1960년대는 폭력과 기만으로 얼룩진
기성의 체제와 가치에 대해 ‘젊음’을 앞세운 세대가
전에 없이 강력한 도전과 저항의 몸짓을 보인 연대다.
세계를 휩쓴 저항의 물결은
낡고 오래된 것에 대한 염증과
변화에 대한 욕구, 그리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이상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반전 운동과 히피,
1968년 5월의 파리의 학생 시위,
홍위병을 앞세운 중국의 문화혁명······.
이 저항의 연대의 첫머리에
한국의 4·19혁명이 놓여 있다.
권력을 독점한 채
일당 독재를 휘두르던 이승만과
제1공화국은 1960년 3월 15일의
관권 부정 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내 무너진다.
4·19혁명은 1960년대 이래
한국 문학의 중추를 형성하는
4·19 세대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4·19 세대는 대학에 다닐 무렵
4·19를 체험한,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첫 번째
한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4·19 세대의 등장은
문화사적으로도
커다란 함의를 갖는다.
이들은 전통적 · 토속적 · 농촌적 정서를 지양하고,
도시적 정서와 개인의 내면 의식을 문학의 중요한 테마로
삼음으로써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다.
4·19 세대는 주체적 정체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의 첫 세대라는 맥락에서
그 의미를 짚어봐야 할 것이다.
김병익은 이들의 문체가
“순수한 우리말 체계로 문장을 구성”하며,
“실재의 삶과 그것의 정서적 관념적 표현이
단절 없이 융합되고 있는 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중요한 업적으로 지적한다.
4·19에 이어 박정희와
그를 따르던 젊은 군인들이
주도한 5·16정변이 일어나고,
근대화와 경제 건설을 국가의 목표로
설정하는 제3공화국이 들어선다.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대통령 중심제, 단원제,
중앙 집권적 행정 체제를 갖추고
이미 제2공화국 장면 내각 때
입안된 바 있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인다.
박정희 정권은 대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저항에 부딪히지만,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 자본과
국내의 값싼 노동력에 의지한
제3공화국의 산업화 정책은
경제의 대외 의존도 심화를 비롯한
갖가지 폐해를 낳게 되기도 한다.
앞서 1950년대의 미국 원조 경제와
제1공화국의 인플레이션 경제 정책은
제당 · 제분 · 면방직 등 이른바
3백 산업 중심의 일정한 자본 축적을 가져오나,
한편으로 저곡가 정책으로 이어지며
농업 기반의 붕괴와 농촌의
궁핍화를 촉진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농민은
농지 개혁으로 분배받은
토지를 매각하고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1960년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이촌 향도(離村向都) 현상은
산업화와 수출 우선 정책이
농민과 농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간접 증명한다.
농촌이 도탄에 빠지면서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모여든
이농민은 대개 노동자나
도시 빈민으로 변신한다.
장기 집권을 꾀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이 크게 일그러진 박정희 정권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고,
이후 한국 현대사는 군부 독재 또는 개발 독재 세력과
반체제 세력 사이의 갈등과 충돌로 얼룩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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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
워터게이트 사건, 오일 쇼크,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1970년대의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전태일 분신, 새마을 운동,
유신 헌법, 민청학련 사건,
박정희 암살 등은 우리 나라의
1970년대를 압축해 보여준 사건들이다.
영구 집권의 야욕을 품은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 운동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며
정치가 긴장 국면에 빠져든 반면, 경제 부문에서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바탕으로
가파른 성장을 이룬 시기가 1970년대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박정희는 불쑥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대통령과 비상 국무 회의가 전권을
거머쥐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른바 10월유신이 단행된 것이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 조치가
잇달아 발동되며, 유신 헌법을 부정 ·
반대 · 왜곡 · 비방하는 행위, 유신 헌법의
개정 · 폐지를 요구하는 행위, 또 이를 청원 ·
발의하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재야 인사와 학생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과 발을 묶으며
영구 집권을 꾀한 정치 암흑기, 야만의
“겨울 공화국”이 깊어가는 것이다.
이내 대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문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반유신 운동이 거세진다.
이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1971년에 수출 10억 달러가 달성되고,
6년 뒤인 1977년 12월 22일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선다.
이는 1962년의 수출액
5천6백만 달러에 비하면 무려
2백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에
지하철이 처음 개통되어
새로운 대중 교통
수단으로 떠오른다.
한편 같은 날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나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숨진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아랍석유수출국기구가 미국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동맹국에게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고
값을 서너 배나 올려버리자 세계 경제는 오일 쇼크에 빠진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나라에서
실업자가 넘쳐나게 되고,
인플레 사태가 빚어진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도
위기의 징후를 드러내며 휘청거리다가
고비를 넘기자 다시 고도 성장의 궤도에
올라 산업 사회로 나아간다.
베트남전에서 큰 쓰라림을 맛보고 물러난 미국은
대통령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사임하고,
저우 언라이와 마오 쩌둥이 잇달아 세상을 뜬 뒤 중국은
덩 샤오핑의 지도 아래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다.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혁명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활을 예고한 것은
이 연대의 막바지인 1979년의 일이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을 휩쓴 저항 문화에서
파생된 히피 문화가 흘러들어
유신 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생맥주와 청바지와 통기타,
젊은이들 장발과 미니스커트.
이 땅에 청년 문화의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 1970년대의 일.
매체의 보급과 발달로
대중 문화의 성장 토대가
마련된 것 또한 특기할 만한 일.
1960년대 후반까지
10만 대 텔레비전 수상기는
1980년에 660만 대가 보급된다.
1979년 10월 26일 밤,
청와대 이웃 궁정동에
총성이 울린.,10.26사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영구 집권을 꾀하며 독재자의 길을 걷던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쓰러진 것이다.
이로써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유신 체제도 종말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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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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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반체제 운동 불길이 뒤덮은 연대.
박정희가 죽은 뒤 권력 향방은 안개에 휩싸이고,
최규하 과도 정부 체제 속에서 김대중 · 김영삼 ·
김종필 세 김씨의 대권 경쟁이 달아오른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한다는 발표가 날 즈음,
“신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는 외신이 날아든다.
1980년 3월, 전국 대학생들은
계엄 해제, 유신 잔당 퇴진 및,
정부 주도 개헌 중단 등을 요구하며
거의 날마다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다.
5월에 들어 학생 시위와
소요가 더욱 번져나가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며,
세 김씨를 정치권에서 밀어내는
비상 조치를 취한다.
그때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지역 차별과 박탈감에 시달리던
호남 중심 광주에서 민중 항쟁이 일어나고,
신군부는 무장 병력을 투입해 이를 유혈 진압한다.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되고
이어 간접 선거를 거쳐 신군부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5공화국 출범.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 사회 건설,
정의 사회 구현 등을 국정 지표로 내세운
제5공화국의 ‘주체 세력’은 집권 과정에서의
정당성 결핍으로 말미암아 집권 기간 내내
학생과 노동자, 지식인과 종교인, 재야 민주
세력의 거센 저항과 투쟁에 시달린다.
.
1980년대에 들어
성장 위주 정책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며 한국 경제는
물가 폭등, 무역 수지 적자,
내수 시장 침체 등으로 허덕인다.
이에 정부는 산업 구조 조정에서
타개의 실마리를 찾아 중복 과잉
투자된 중화학 공업, 자동차, 해운업,
해외 건설업, 건설 중장비 분야 등의
통합과 조정을 시도한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물가가 잡히고 경상 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면서 나라 경제는
다소 안정을 되찾는다.
이즈음 우리 경제는
개방화의 흐름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시점을 맞는데,
정부가 느슨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거대 재벌과 독점 대기업은 정부의 금융과
세제상의 지원으로 더욱 몸집을 키우나
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은 더욱 멀어진다.
제5공화국은 언론인 무더기 해직,
언론사 통폐합, 언론 기본법 제정 등으로
언론통제 고삐를 쥔채 권력 기반을 다져나간다.
한편으로 신군부 정권은
야간 통행 금지 해제, 해외 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등을 시행해 국민의 일상 생활과
관련된 몇몇 통제를 풀면서 민심을 얻으려 애쓴다.
1982년 1월 6일 자정을 기해
지난 37년 동안 계속된
야간 통행 금지가 풀리는데,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범죄의 증가나
혼란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무렵 국민 소득이 늘어나고
민간 소비 부문이 활성을 띠는데,
컬러 텔레비전 방송 시대가 열리자
대중 문화 분야가 크게 성장한다.
제5공화국은 스포츠 부문 육성에
유난히 공을 들여 프로 야구와
프로 축구 리그를 출범시킨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로
국가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신군부 정권의 전략은
어쨌든 성공을 거둔다.
1987년 초여름을 뜨겁게 달군 6월항쟁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 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수용
한국의 정치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달아 붕괴하며 국제 정세는
엄청난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
1990년대
............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 9일의 일이다.
이내 소련형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소련과 미국을 두 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러나 냉전이 잦아든 뒤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 ·
인종 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아울러 무인 화성 탐사,
복제 양 돌리, 엘니뇨와
라니냐가 부른 기상 이변 등이
세기 말의 빈 칸들을 채운다.
1990년대로 넘어오며
한국 사회에는 탈이념화 ·
탈정치화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문학적
담론의 무게 중심은
‘이념’에서 ‘욕망’으로,
거대 담론에서 미시 담론으로,
마르크스에서 푸코와 보드리야르로,
급진적 좌파주의에서 다원주의적
자유주의로 옮아간다.
급진 좌파와 강경 우파,
혁신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수그러드는 한편에서는
시한부 종말론과 휴거 소동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이런 혼돈 속에서도
깜냥대로 균형을 취하며 빠르게 대중
소비 사회, 개방 사회 체제로 나아간다.
이 변화를 주도한 것은 텔레비전 ·
영화 · 컴퓨터 산업의 영역이 급속히 커지며
각광받은 영상 문화, 또는 멀티미디어 속에서
감각과 의식을 키워온 신세대다.
신세대의 등장과 함께 노래방 ·
비디오방 · PC방 · 록카페 · 24시간 편의점 ·
호출기 · 핸드폰 · 디지털 · 컴퓨터 게임 · 인터넷 ·
시뮬레이션 · ‘서태지와 아이들’이 삶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한강의 성수대교가 내려앉더니
이 사건이 일어난 지 1년도 안 된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0분께,
다시 서울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며
1천5백명이 건물 잔해에 깔리는 참사가 일어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잇단 붕괴는
우리 사회의 성장 만능주의가 빚은
총체적 부실의 실상을 백일하에 드러낸
참혹하고도 부끄러운 사건으로 기록된다.
1992년에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국가 경제의 토대가 흔들리는 발밑 형편도
살피지 못한 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서두르고 국민에게 장밋빛 미래를
선전하는 실정을 거듭하더니, 끝내 집권 말기인
1997년에 이르러 외환 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낳고 만다.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한국 경제는
무거운 하늘을 인 채 가까스로
비틀걸음을 옮겨놓는다.
기업의 무더기 도산과
대량 해고로 실업자들이 쏟아지고,
영세 제조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된서리를 맞는다.
하루아침에 일터와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이나 곳곳의 지하도를 떠도는가 하면,
중산층도 보유 자산의 가치가 뚝 떨어지고
수입이 크게 줄면서 고통스런 내핍 생활의 강제에 놓인다.
이런 사태는 국제 자본이
동아시아의 과잉 유동성을 회수하러 나서고,
재벌 기업들의 과잉 · 중복 투자와 경기 후퇴가
수익성 악화 및 금융 부실을 부채질하며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도가 곤두박질친 데서 비롯된다.
2000년 6월 13일,
평양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는다.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난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숨진 뒤 전략 무기
개발 문제를 놓고 겉돌기도 한 남북은 이로써
급격히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로 돌아선다.
이는 김대중 정권이
일관되게 추진한 대북 정책과
북한 지도부의 결단이 맞물려 거둔 열매다.
이틀 뒤인 6월 15일, 남북 정상은
평화 통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공동 선언을 내놓는다.
문학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다른 예술과 구별되고, 예술이란 점에서는
언어활동의 다른 영역과 차이점이 있다.
‘문학’의 ‘문’은 말이 아닌 글을 뜻하고,
‘학’은 예술이 아닌 학문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어원에 따라서 대상의 성격이 규정되지는 않는다.
말로 된 것이든
글로 적은 것이든
언어 예술이면 문학.
문학에 대한 비평과 연구가 오랫동안
글로 적은 문학을 특히 중요시하였던
사정이 용어에 흔적을 남겼을 따름이다.
예술과 학문이 구별되지 않던 단계에서
문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혼란이 생겼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술활동은 ‘문학’이라 하고,
학문활동은 ‘문학연구’라고 한다.
이이(李珥)는 사람이 내는 소리로 뜻을 가지고,
글로 적히고, 쾌감을 주고, 도리에 합당한 것을
문학이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규정한 데에
문학의 기본 성격과 문제점이 잘 요약되어 있다.
언어는 일정한 뜻을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소리와는 구별된다.
뜻을 기본 요건으로 삼기에 문학을 의미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글로 적힌 것은 문학의 기본 요건일 수 없으나 오랫동안 그렇게 인식.
쾌감을 주고 도리에 합당한 것이
문학이라고 한 말은 언제나 논란이
되고 있는 문학의 양면성을 지적하였다.
문학작품이 수용자를 즐겁게 하면서
진실을 깨우쳐 준다는 양면성은
어느 한 쪽도 부정할 수 없으나,
둘 사이의 관계와 비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문학관이 달라진다.
즐거움과 깨우침 중에서
즐거움을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으면
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 말이나 글이 아주 많아진다.
깨우침을 부차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문학적 표현은 실용적인 언어 사용과는
다르다는 점이 강조되고,
문학의 범위는 줄어든다.
이처럼 문학의 범위는
넓게 잡을 수도 있고
좁게 잡을 수도 있다.
원래는 문학의 범위가 넓었으나
신문학운동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이광수(李光洙)는 ‘문학’이라는 말을
‘리터리처(literature)’의 번역어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지(知)·정(情)·의(意)로
구분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문학은 정에 근거를 둔다고 하며,
지나 의와의 관련은 부차적일 따름이라고 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한용운(韓龍雲)은
광의의 문학은 ‘문학’이라 하고
협의의 문학은 ‘문예’라고 하고서,
문학은 돌보지 않고 문예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반론을 폈다.
이식된 문학관과 전통적인 문학관
사이의 논란은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한국 문학은 한국인의 문학이고 한국어로 된 문학.
이 경우의 한국인은 한민족을 말한다.
국가는 침탈되거나 분단되어도 한민족과
한국어가 지속되고 기본적인 동질성을 가진다는
이유에서 한국 문학은 단일한 민족문학이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해외교포의 문학이라도
자신을 한민족으로 의식한 작가가
한국어로 창작한 것이면 한국 문학에 속한다.
그런데 민족문학과 민족어로 된 문학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이다.
한국한문학은 한민족이 쓴 문학이고
한민족의 생활을 다룬 문학임에 틀림없으나
한문으로 쓰여졌다는 점이 논란이 된다.
그러나 한문은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문어이었으므로
모두 다 중국의 글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한국발음으로 토까지 달아서 읽었다.
이렇게 읽는 한문은
중국어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한국어 문어체의
극단적인 양상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현대에 와서 한민족 출신의 작가가
일본어나 영어로 쓴 작품은 이렇게
고려할 여지가 없기에 한국 문학에서
제외됨은 물론이다.
한국 문학은 크게 보아서
세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구비문학이다.
말로 이루어지고 말로 전하는
문학을 구비문학이라고 한다.
문학의 요건이 말이 아니고
글이라고 할 때는 관심 밖에 머무르거나
민속의 한 분야라고만 여기던 구비문학이
이러한 관점이 수정되는 것과 함께 한국 문학의
기저로 인식되고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구비문학뿐이었는데,
한자의 수용에 이어서 한문학이 나타나자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이 공존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한문학은
동아시아 공동 문어문학의
규범과 수준을 이룩하는 한편,
민족적인 삶을 표현하는 데 그 나름대로
적극적인 구실을 하였기에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
국문 기록문학은 처음에 한자를 이용한
차자문학(借字文學)으로 시작되었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구비문학을 받아들이고
한문학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그 판도를 결정적으로 넓혔다.
그러다가 신문학운동이 일어난 다음
구비문학이 약화되고 한문학이 청산되어
국문 기록문학만이 현대문학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문학은 서구문학의 이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계속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한때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이루어진 연구와 비평의 성과는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게 한다.
구비문학과 한문학 그리고 국문 고전문학이
현대문학과 이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전통의 현대적인 계승이 전제되어야
민족문학의 바람직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으며, 전통의 현대적인 계승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문제될 뿐이다.
.....................................
195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
.......................................
향토 문인들은
전란 때문에 중앙 문단에서
피난온 작가들을 환대한 편이다.
피난 문인들은 더러
원주민 작가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오영수는 피난 작가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방을 몇 개 비워두었다가 김동리 · 조연현 ·
황순원 · 박용구 · 이봉구 · 박기원 등에게 내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여학교 건물을 육군병원과 부대 시설로
쓸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서며, 여학생 제자들에게
이 병원의 간호 보조 업무를 맡게 한다.
피난 작가들이 모인 다방을
거의 날마다 들여다보던 그는
집으로 불러들인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신바람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오영수는
그의 문학만큼이나
향토적인 순박성으로
피난 작가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김말봉 또한 형편이 넉넉치 않음에도
거의 날마다 피난 문인들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피난온 작가들에게 정을 베푸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안다.
문인들이 어쩌다가 오영수의 집으로 몰려가거나,
모임에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새침해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 식으로 서운함을 드러낸다.
더러 누구한테서 칭찬이라도 받는 날이면
그는 문인들에게 커피에 밥이며 술까지 사주곤 한다.
이처럼 김말봉은 문학 소녀 같은 순수한 열정으로 피난 작가들을 대한다.
유치환도 이 무렵 심각한 정신 분열증을 보이던
서정주에게 따로 방을 내주며 보살피는 인정을 베푼다.
................
................
그러나 ‘후반기’ 동인이며
다다이스트 시인인 조향은
피난 작가들에게 방을 내주기가 싫어
일본식 적산 가옥을 팔아버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는 개인 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날마다
술에 절어 추태 부리는 것을 ‘문학 행위’로 여기며
구태 의연한 파벌 다툼이나 일삼는 김동리며 조연현 같은
기성 문인들에 대한 반발 심리도 크게 작용한 것이다.
문단 초년생이거나 문학 지망생들인
박인환 · 이봉구 · 이형기 · 조영암 · 이봉래 ·
이일 · 오상원 · 홍사중 · 황운헌 · 정창범 등은
부산의 ‘밀다원’ · ‘금강’ · ‘태백다방’과 ‘갈매기집’,
대구의 ‘아담다방’ ‘녹향’과 ‘말대가리집’ · ‘감나무집’ 등
선배 문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그들은
선배 문인들이 따라주는
술을 조심스레 얻어 마시고,
때로는 남포동 선창가로 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친교를 나눈다.
이럴 때면 그들은
선배 문인들의 일부에게는
존경과 추종을, 일부에게는
저항과 배반을 과장되게
표현하곤 한다.
가끔 그들은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온
음악 다방 ‘르네상스’나 부산의 ‘스타다방’에서
바흐와 브람스를 듣는 문화적 사치와 낭만으로
문학에 대한 욕망을 대신하기도 한다.
스타다방은
중견 작가 신인 작가들뿐이 아니라
이일 오상원과 황운헌 들도 옹기종기 모였다.
그 때 법대 1학년의 여학생
전혜린 배동순이 대담하게 다방에 나왔다.
이일 황운헌 들의 자리로 전혜린의 쪽지가 날라온다.
“에트랑제들이여······”라는 사연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담배도 사주고 때때로
술값 몇 10원도 쥐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으로 조숙한 것이다.
고은, 『1950년대』(청하, 1989)
서정주의 광기는 갑작스럽게
6·25가 터진 뒤 한강을 건너
피난지에 머물 때부터 나타난다.
‘문총구국대’는
처음 한동안 유명 무실하게 굴러가지만,
이윽고 임무를 띠고 활동에 나서게 된다.
1950년 7월 중순, 서정주는 구상과 함께
김천 지구에 들어갔다가 눈앞에서 젊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 분열의 징후를 보인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정신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구상은 피해 망상증으로
심한 발작 증세를 보이는
그를 육군병원 정신과에
서둘러 입원시킨다.
서정주의 이런 증세는
9·28수복 뒤 좀 가라앉는 듯하더니
1·4후퇴 때 재발된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부산이나 대구로 피난을 가지만, 그는 자신이 추천해
문단에 나온 이철균과 하희주가 있던 전주로 간다.
그는 한동안 전주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서정주가 전주에 머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충남 강경에 있던 김관식을 비롯한 인근의
문학 지망생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서정주는 문총 전북지부장과
전시 연합대학 강사를 겸하고
시국 강연도 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이에 따라 그의 발작 증세도 한결 가라앉는다.
그러나 서정주는
처가가 있던 고창에 갔다가
다시 사건을 겪게 된다. 술에 취해
밤 늦게 돌아다니던 그가 ‘공비’로 오인되어
헌병에게 붙잡힌 뒤 총살 직전까지 가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의 발작 증세는 급격히 도지기도 한다.
얼마 뒤 그는 전주를 떠나
김현승이 있던 광주로 가서
조선대학교 부교수로 강단에 선다.
그는 광주에서 김현승과 천경자 ·
김남중 · 허백련 · 박흡 · 임자연 등과 어울리고,
이동주와 함께 해남 대흥사를 찾기도 하면서
예전의 평온을 되찾는다. 한때 그는 아예 삭발을 하고
불심(佛心)에 젖어들기도 하며, 나쁜 기억들을 잊고
「상리 과원」 · 「무등을 보며」와 같은 빼어난 시편들을 써낸다.
그러나 휴전이 되고 나서도 서정주는
꽤 오랫동안 전쟁과 죽음의 망령들을
말끔히 떨쳐내지 못한다.
............
.............
전쟁은 으레
정주 사회(定住社會)의
오랜 관습을 깨뜨리며,
사람들을 ‘집’에서 ‘거리’로
내몰기 일쑤다.
방비 없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직면하는 것은 실존의 한계 상황이고,
그들에게 생존은 절대 명제가 된다.
문인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 버릇하던 이 ‘정신 노동자’들에게
관념이 아니라 실물로 주어진 전쟁 상황은
더욱 혹독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흥남 철수에 이어 빠른 속도로 후퇴한다.
전선이 남하하며 북쪽에서 발원한 피난민의 물결도 남쪽으로 향한다.
피난민은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로 내려갈수록 불어나기만 한다.
전쟁 초기의 피난 행렬에 비하면 이 때의 피난 행렬은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족의 대이동을 방불케 한다.
문인 중에는 김이석 · 강소천 · 한정동 ·
함윤수 · 장수철 · 원응서 · 박남수 · 김영삼 ·
양명문 · 이인석 등이 1·4후퇴의 물결에 합류한다.
그들은 주먹밥이나 건빵으로 허기를 채우며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언 땅 위로 동상이 걸린
발을 질질 끌고 가는 사람, 열차 꼭대기에 매달려 가다가
낙엽처럼 떨어져내리는 사람을 숱하게 목격한다.
9·28수복 뒤 전쟁 전의
평균 인구 밀도를 회복했던
대구와 부산은 1·4후퇴와 함께
다시 모여든 피난민으로 북적거린다.
이로써 부산과 대구는
다시 한 번 정치와 언론,
예술의 중심지가 된다.
토착민의 언어에
경기도 · 함경도 ·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 ·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피난지는
토속어 박람회장처럼 들끓는다.
공공 건물은 정부의 주요 기관이나
시설이 차지한 뒤라서 일반인들은 낡고
비좁은 곳일망정 조그만 틈이라도
눈에 띄면 비집고 들어간다.
곧 이조차 여의치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부산 용두산이나 완월동
또는 동래 등의 언덕 자락에 임시로
집을 지어 둥지를 튼다.
이 때 생겨난
바라크와 판자촌 문화는
전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한 시절의 표상이 된다.
서울에서 소개(疎開)되어 내려온
학교 · 병원 · 교회 · 옷집 · 음식점 ·
다방 · 술집 등이 들어서고, 밤이 지나면
해가 떠오르듯이 피난지에서 이어가는
불안정한 유목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 길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거리는 이런 무리가 만들어내는
암울한 활기로 가득 찬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여기서 말미암은 자학과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는다.
현재 진행형의 전쟁과
후방 사람들의 암울한 정서,
바로 이런 것이 1950년대 피난민
문학의 발생론적 근거가 된다.
개전 직후 대전 · 대구 · 부산에서
임시로 결성해 활동에 나선 ‘문총구국대’
체험을 바탕으로 문인들은 이윽고
각 군(軍)별로 종군 작가단을 조직한다.
피난지에서 가장 먼저
발족한 종군 작가단은
1951년 3월 9일 대구에서
결성된 ‘공군종군문인단’이다.
공군종군문인단은
흔히 ‘창공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학 애호가인 김기완
공군 정훈감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를 등에 업고 출범한 이
종군 작가단의 단장에는 마해송,
부단장에는 조지훈,
사무국장에는 최인욱이 임명된다.
아울러 단원으로는
최정희 · 곽하신 · 박두진 · 박목월 ·
김윤성 · 유주현 · 이한직 · 이상로 ·
방기환 등이 참여한다. 이들은 기관지
『창공』과 '코멘트'를 발간하는가 하면
항공기 헌납운동에 앞장서기도 한다.
공군종군문인단에 소속된 문인들은
이런 일을 하며 대가로 봉급 외에
쌀 배급을 받는 등 제법 후한 대접을 받는다.
구상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대구 덕산동 ‘영남일보사’ 사옥에 딸린 방 하나가
‘창공구락부’의 연락 사무소가 된다.
작가들은 아침에 이 곳으로 나와
임무를 하달받은 뒤, 난로도 없이
창 틈으로 새어드는 햇볕을 온기 삼아
전쟁시나 종군 체험기를 쓴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 가락국수나
막걸리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오후에는 군복을 입은 채
시내의 ‘향수다방’에서 죽치거나
‘말대가리집’ 또는 영남일보사 맞은편
골목의 ‘감나무집’ 또는 이 집보다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석류나무집’으로 몰려가
외상 막걸리를 마시면서 문학 얘기나 넋두리로 시간을 보낸다.
4월에 접어들자 조지훈 · 최인욱 등이
‘종군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쟁 현장에 투입되고,
이어서 박두진 · 유주현 · 이상로 등도 뒤를 따른다.
그러나 생전 처음
정찰기를 탄 이들은
조종사가 기체(機體)를 뒤집을 때
공포감에 휩싸여 졸도하는 등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한다.
이로 말미암아 작가들의 현장 투입은 곧 중단된다.
종군 작가들은 대신 조종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출정기 취재와 좌담회에 임하고, 전사자들의 공훈기나
종군기를 작성해 후방에 알리는 것에 주력한다.
종군한 뒤 이들은 대구 국립극장에서 종군 보고 강연회를 열고,
소설가 최인욱이 각색하고 최은희와 황정순 등이 배우로 나선,
공군을 상징하는 ‘날개’를 제목에 넣은 연극 「날개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다.
공군종군문인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것은
1952년 1월 15일과 16일에 육군종군작가단과 함께
건군 기념 예술 제전이라는 이름으로
대구 시내 자유극장에서 공연한
문인극을 들 수 있다.
김영수가 쓴 1막 2극의 희곡 「고향 사람들」을
김영수가 연출하고 김기진 · 최정희 · 박영준 · 전숙희 ·
유주현 · 정비석 · 장덕조 · 양명문 · 최인욱 · 박훈산 등의 문인과
코주부 만화로 이름을 날린 김용환이 배우로 출연하는데,
무대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의 실수 연발 연기가 오히려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며 박수 갈채를 받은 것이다.
이틀 동안의 대구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이들은
얼마 뒤 부산의 ‘문총’이 주관한 3·1절 기념 행사에
초청을 받아 원정 무대에서 다시 한번 갈채를 받는다.
결성한 지 1년쯤 되어
김동리 · 황순원 · 전숙희 ·
박훈산 등이 공군종군문인단에
가세하는데, 황순원과 김동리는
부산에 머문 까닭에 이따금 참여하게 되며
전숙희는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활동한다.
‘육군종군작가단’은
공군종군문인단보다
석 달 남짓 뒤인 1951년 5월 26일에
역시 대구에서 결성된다.
훨씬 많은 문인이 참가한 만큼
이 종군 작가단은 활동의 폭 또한 한결 넓다.
육군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문인들은 대구 아담다방에서
무기명 투표로 단장에 소설가 최상덕,
부단장에 김송사무국장에 박영준을 선출한다.
아울러 김기진 · 김이석 · 구상 · 박인환 ·
유치환 · 최태응 · 최독견 · 정비석 · 장덕조 ·
박영준 · 양명문 · 장만영 · 정운삼 · 조영암 ·
서기원 · 임긍재 · 이봉구 · 박귀송 · 유치환 ·
이호우 · 김영수 · 윤석중 · 손소희, 그리고
만화가 김용환 등이 단원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기관지 『전선문학』을 발간하고
일선에 투입되어 종군하는 한편 종군 보고 강연,
군가 작사, 시국 강연, 문학의 밤, 시화전, 문인극 공연,
종군기 발표, 육군의 밤 방송, 벽시(壁詩)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종군 작가단 가운데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규모가 작은 ‘해군종군작가단’이
같은 해 6월 부산에서 결성된다.
정식 결성 시기는 늦지만
해군에는 문단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염상섭 · 이무영 · 윤백남 외에 안수길 · 이선구 등이
들어가 일찌감치 종군 작가단의 틀을 잡아놓는다.
진해에서 특별교육대 훈련을 받고 나온
윤백남이 중령으로, 염상섭과 이무영이
소령으로 임명되어 현역 복무를 하고 있었고,
안수길과 이선구 등이 안수길의 친지인 김성삼
제독의 요청으로 정훈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6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해군종군작가단의 단장에는
이선구가 선임된다. 염상섭은 정훈감실 편집과장,
이무영은 진해 통제사령부 정훈실장,
윤백남은 정훈감실 공보과장을 맡는다.
아울러 안수길 · 박연희 · 박계주 · 이종환 ·
윤고종 · 공중인 · 이봉래 · 김규동 등이
이 종군 작가단에 참여한다. 이 가운데
박계주와 박연희 등은 배를 타고
나가기도 하지만 해군이라는 특수한 성격,
즉 “눈부신 해전이 없었던 만큼일선에서
종군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주로 부산역 앞의 2층 목조 건물에 나와
기관지 『해군』을 펴내는 일에 주력한다.
가끔 우리는 정훈감들의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육군 공군 구별할 것 없이 한데 모여서 즐겁게 먹고 마셨다.
어느 때엔 ‘은희네’라는
아마 고급에 속하는 요정에
갔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
우리가 한창 즐거울 때
일선에서 왔다는 한 병사가
후방이 이 꼴인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싸우라는 거냐고 고함을 지르며 권총을 빼어들었다.
그는 권총을 쏘기까지 했다.
여자 종업원들이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우리들 중에서도
도망간 사람이 더러 있었다.
병사들의 눈엔 우리들이
항상 그렇게 잘 먹고 흥청거리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최정희, 「피난 대구 문단」,
『해방 문학 20년』(정음사, 1966)
물론 피난지에서 문인들이
날마다 고급 요정에 드나들면서
흥청거린 것은 아니다.
전란의 북새통 속에서도
전쟁 현장의 체험을 다룬
이영순의 『연희 고지』,
유치환의 『보병과 더불어』,
장호강의 『총검부』 같은 종군 시집이 나오고,
김동리의 「귀환 장정」과 「흥남 철수」,
염상섭의 「취우」, 박영준의 「용초도 근해」,
「김 장군」, 유주현의 「기상도」 같은 소설이 나온다.
그러나 피난민 작가들이 대부분
한국전쟁의 이념적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나 신념 없이 다만
생활과 신분의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군 작가단에 참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50년대의 작가는 일종의 걸인이었다.
그들은 비극을 이유로 몇 푼의 돈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고은, 『1950년대』(청하, 1989)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걸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모욕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란중 문인들은 기껏해야
다방이나 술집에 앉아 무위 도식하며,
가끔 피난민의 푸념이나 한탄을 담은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것으로
문학적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한다.
인민 재판 현장
당시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벌어진
이런 재판에서 많은 사람이 처형된다.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사진은 팔봉 김기진의 수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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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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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학은 사회적 변동과 연관
1945~50년의 평화적 조국건설기,
1950~53년의 조국해방전쟁기,
1953~60년의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을 위한 투쟁기,
1960년대 이후의 이른바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과 사회주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기 등 4단계 과정을 거쳐왔으며,
1960년대 중반을 전후 양상이 크게 바뀐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반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문학적·예술적 실천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문예이론이 창작과 비평 또는
문예운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북한 문학은 해방 직후부터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체제 정립을 위해
사상과 이념에 대한 선전·계몽에 앞장섰으며,
1946년 3월에는 사회주의 이념의 문학적 실천을
목표로 한 북조선예술연맹이 결성되었다가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려 했다면
이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의
독자적인 문예활동을 펼치려는 목적으로 조직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서울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문예활동을 펼치기 위해 월북한
문학가들로서 이기영·한설야·안함광·송영·박세영 등이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공산당 정치노선에 문예활동을 종속
그해 5월 중앙예술공작단을 조직해
그 이념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이른바 건국사상동원운동은
당시 북한 주민의 사상을 공산주의로
개조하기 위한 의식개혁운동이었는데
문학가들이 앞장서 교화와 계몽운동을 담당
6·25전쟁 후에는 문학가들이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발전을 위해
동원되기에 이르렀고, 천리마운동 등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과 대중의 사상을 쉽게 통제.
8·15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의 시로는
조기천 장시 〈백두산〉과 강승한 〈한라산〉
이 두 작품은 시에 있어서 서사성을 확보했다는 공통점
〈백두산〉이 영웅적 형상을 통한 이념 제시를 위주로 한 반면
〈한라산〉은 집단적 의식을 통해 투쟁성을 강조한 점에서 대조적
이 시기의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는
이기영의 〈땅〉·〈두만강〉을 들 수 있다.
〈땅〉은 북한의 토지개혁운동을 배경으로 한
무산계급의 사회적 성장과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을
역사적인 필연성으로 해석하고자 했고, 〈두만강〉은
대하소설로서 한국 근대사를 민중세력의 성장과
자주성을 위한 투쟁으로 구체화시켜 놓았다.
그밖에 생산문제를 둘러싸고 새 것과 낡은 것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영웅적 성격을 보여준
윤세중의 〈시련 속에서〉(1957)와 석개울의 농업협동화
과정을 3부작으로 그려낸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 봄〉(1955~63)
등은 사회주의 체제의 정립과정과 연관되는 내용으로서
집단적 계급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김일성만을 찬양하고
그의 지도력을 선전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특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용맹성을 노래하거나
6·25전쟁 당시의 지도력을 과장·선전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해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그들 주체성과 혁명성을 더욱 드높이는 변모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에는
주체적·혁명적 투쟁의식을
강력하게 내세움으로써 그만큼
이념성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른바 주체문예이론은
문예형식의 민족적 특수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내용에서 혁명적 이념이라는 사회주의적 사상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바탕으로 혁명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혁명적 문예형식'을
항일혁명문학예술이라 칭하며 민족문학예술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혁명적 문예형식의 주요 작품으로는
항일무장투쟁기에 김일성의 지도 아래
창작되었다고 하는 〈꽃 파는 처녀〉·
〈피바다〉·〈한 자위단원의 운명〉·
〈혈분만국회〉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노동계급이 앞장서 진행했던
혁명투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입장을
기본으로 해서 그려냄으로써 인민의 계급적 각성을
가능하게 하고 인민의 요구와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문학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피바다〉·
〈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같은 작품들을 이른바 혁명적 대작으로
완성하기 위해 연극·가극·영화 등으로 제작했다.
이 세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계급적 모순을 폭로하면서
계급혁명과 항일투쟁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인민을 혁명대열에 참여하도록 하는 선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꽃 파는 처녀〉에서는 농촌의 한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일제의 탄압과 지주들의 횡포로
부모를 잃은 여주인공이 조선혁명군의 대원이 된 오빠의
도움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혁명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그려냈다.
또한 〈피바다〉는 일제 침략으로
남편을 잃은 아낙네가 공작원을 살리기 위해
아들마저 잃게 되나 강인한 의지로 혁명투쟁에
나선다는 이야기이며,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일제의 강압으로 친일조직인 자위단에 끌려간
남자 주인공이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일제에 대항하여 유격대에
참여한다는 이야기이다.
해방 이후 북한 문학은 이른바
항일혁명문학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웠으며, 당의 문예정책
또한 혁명사상의 구현을 중요한 지표로
내세워 문학의 창작과 연구에서 혁명성의
이념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성과 사상성의 강조,
문학예술의 선전적·선동적 기능을 강조하는
특성으로 인해 북한의 문학작품은 특히 1960년대
이후 구성과 인물성격의 형상화에서 하나의 고정된
틀을 되풀이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혁명적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
비노동자 계급의 인물형상화가 천편일률적인 점,
선악의 도식적 대립, 김일성과 주체사상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행복한 결말 등이
그 정형성의 주요 요소들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북한 문학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도 잘 알려진 남대현의 〈청춘송가〉
나 백남룡의 〈벗〉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내부비판을 조심스럽게 허용하면서 점차 일상생활에서
풍부하게 나타나는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간의 이질성과 같은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박태원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도
이 시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사회주의 체제의 절대적 우월성과
김일성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계 내에서의 변화이기는 하나, 해방 이후부터 전개되어온
북한문학의 흐름에서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 들어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으로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자 북한 문예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주체의 문예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으로 대변되는 김정일의
〈주체문학론〉(1992)에 입각한 주체사실주의문학을
내세워 종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학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의식을 중시하며
조선민족제일주의를 내세운다는
주체문학이 기실 수령을 향한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배타적 문학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김일성의 항일혁명문학에만
완강하게 한정시켰던 문학사적 전통을
카프 및 고전문학의 진보적 영역으로까지
넓히는 등 현실적 유연성을 보이는 것은
남북한 문학의 궁극적인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과 민간인 학살.
반동분자 인민재판 현장
1950년대 청계천
한민족 공동목표를 위해 공존 보다는
동족끼리 무모한 대결과 중상·비방을 거듭.
한반도를 둘러싼 타민족에게
일방적 유리한 전략적 이익을 주고
스스로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
1970년대 세계적 긴장완화에 따라
남북한은 남한의 '평화통일에 대한
기본구상'에 의해 19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거쳐 역사적 남북대화.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다.
1973년 8월 28일 북한측 대표의
남북대화 거부성명으로 대화 중단.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1·19남북대화재개 제의에 따라
판문점에서 양측 대표가 만나
토의에 참여했으나 진정한 대화는
이뤄지지 않고 또다시 중단되었으며,
10·26사태 이후 북한은 통일방안으로서
'연방제' 주장에 역점을 두었다.
1980년 1월 11일
남북한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이 있기까지 남한은
남북한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남북대화 진행, 남북한 자유총선
등을 지향하는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과
남북한 경제협력협의기구 등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민족분열 고착 모략이라고 거부해왔다.
1980년 7월에 북한은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
파견한 남북한 단일 팀 구성을 위한
1차 접촉을 시도했고, 1983년 10월 9일
남한 고위관리 17명이 희생된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키신저가 1975년부터 제의해 온
4자회담·6자회담 등을 무시하고 3자회담을 미국에 제의.
1984년 남한측에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와
아시아 경기대회 및 각종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한
단일 팀 구성을 시도했으나 양측의 의견이 대립되어
또다시 실패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를 위한
남북한 단일 팀 구성조차도 북한의 올림픽 공동개최
1985년 9월 20일에는
남북한 적십자사 노력으로
고향방문단 교환방문이 이뤄졌다.
1990년도에는 3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통일축구대회·통일음악회 등 비당국간 교류로써
남북한간 동질성 회복이 엿보였고, 1991년 9월 17일에는
남북한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여 국제연합(UN)에 동시가입.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게 되었고,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도 합의하여
남북한간에 핵통제공동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남북 핵 상호사찰의 길을 열었다.
1992년 5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분야별 공동위원회 구성과 운영,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
7월 19일 김달현 부총리 일행의 서울 방문
1991년 11월 서울에서 개최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 여연구 등 북한여성대표 참석
1992년 7월 2일 이 토론회에 참석
하기 위해 남한대표가 평양을 방문.
1993년에 들어서면서 영변 핵시설 사찰문제로
북·미 간에 갈등이 격화되면서 한반도 긴장 고조
북한은 3월 12일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와 국제원자력기구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IAEA)의 북한 특별사찰
결의에 맞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서
남북간 긴장고조, 1994년 봄 미국 조야에서 북한폭격론까지 제기.
미국 대통령에게 핵문제의 타결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용의가 있음을 전달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러한 카터의 주선으로 남북은 예비접촉 후
7월 25일~27일에 평양에서 정상회담 개최 합의.
이 합의는 7월 8일 김일성 사망으로 불발되었다.
김일성의 사망은 남한에서
그에 대한 조문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조문파동'이라는 일대 파동
정상회담 합의로 대화해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던
남북관계를 오히려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1994년 10월 21일 북·미간의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위기가 해소되었을 때에도,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적 대결은 해소되지 않고 앙금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조문파동'을 이유로
김영삼 정권 내내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대남강경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종교단체 주축 민간차원 남북교류 노력은 계속되었다.
1997년 남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른바
'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흡수통일 포기, 교류·협력에 있어서
정경분리원칙의 적용, 평화정착 우선주의 채택.
남한 정부의 화해정책에 대해 그 동안
체제보호를 위하여 외부에 대한 개방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특히 남한에 의한
독일식의 '흡수통일' 가능성을 크게 우려해 온 북한은,
종전의 정권들과 달리 김대중 정부가 북한체제 유지론을
기초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대북 평화·협력의 추구에
초점을 둔 대북 포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데 대해
마침내 신뢰의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55년 만에 평양에서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남북관계는 종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상호신뢰 구축에 기초한 남북관계 실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었다.